어린 병사의 침묵의 의미를 스베미르 중사는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 정도로 나빴더냐?” 그가 말했다. “하이브 뜨주르카가 거친 곳이라는 얘기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반체제 조직들 때문에 문제를 겪었다지, 놈들이 오래된 탄약 공장을 점거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들어본 적 있느냐?”


 스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그의 아버지가 지역 아르비테스 조직 휘하의 민간 경찰이셨으니까. 아버지는 전투 중에 살해당하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스타빈의 삶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의 가족을 가난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어두운 전환점. 허나 개인사에 불과한 얘기들이었다. 고통을 밀어낸 스타빈은 가볍게 답했다. “11년 전입니다, 중사. 벌써 끝난지도 오래된 얘기죠.”


 “다행이구만.” 고개를 끄덕인 스베미르가 말했다. “그런 나쁜 놈들이 보스트로야에서 얼쩡거리게 놔둘 순 없지. 뭐, 요즘 들어선 고향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말이다. 너도 곧 이렇게 될 게다. 여기저기 여러 행성들에서 싸우다보면... 나중에 가서는 전부 뒤섞여버리지. 한평생 쉼 없이 싸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게 또 싸워나가는 힘이 된단다. 결국엔 연대가 집이 되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괜찮은 친구들을 몇 잃고, 눈밭위에 널브러져서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 보면... 때가 되면 이 돌덩이 행성을 기쁜 마음으로 뜰 텐데.”


 권총형태로 생긴 주사기를 집어든 스베미르 중사가 말했다. “20년을 꼬박 임페리얼 가드에서 복무했지. 옥좌시여, 정말 꼭 시간이 손가락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 같다니까.”


 잠시 동안 스타빈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 분명했다. 스베미르 중사가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게 긴 시간인 것 같으냐? 10년을 채운 뒤에는 떠났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게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넌 아직 어리단다, 꼬맹아. 아직 고향에 대한 기억도 생생할 테지. 시간이 지나봐라. 앞으로 10년이 지나고 네 앞에 전역증서가 나오면 그땐 너도 나처럼 두 번째 복무를 선택하게 될 게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폐하를 위해 복무하고 나면, 남은 시간을 또다시 폐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되지. 어느 정도 죄책감이 들기도 할 테고. 난 내 전우들이 여전히 싸울 거라는 걸 알면서 그저 떠나버릴 수는 없었단다. 임페리얼 가드에서 전역이라는 건 비겁한 얘기야.”





 다른 차량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길 속을 달리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갑작스럽게 차량 앞쪽에서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테라시여,” 사마로프가 소리쳤다. “대령께서 염려하신대로입니다. 차량이 버티질 못합니다. 연료탱크가 폭발할 것 같습니다.”


 키메라의 한쪽 궤도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세바스티브는 차량이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느꼈다. 급작스럽게 속도가 떨어졌다. “왼쪽 궤도를 잃었습니다.” 조종수가 외쳤다. “제기랄!”


 아래쪽에서 귀가 멀 듯한 소음이 터져 나왔을 때, 세바스티브는 간신히 소리칠 수 있었다. “충격에 대비하라!” 전복되어 내동댕이쳐진 키메라가 땅에 닿을 때까지도 차량의 오른쪽 궤도는 마치 절박한 달음박질을 계속하듯 허공을 가르는 새된 소리와 함께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계신 옥좌시여!” 정치장교 카리프가 소리쳤다. “부디 우리가 불길을 통과했다고 말해주시오.”


“온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마로 중위가 말했다. “간신히 뚫고나온 것 같습니다.”


 꼭 세바스티브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쿠리친 중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불길을 헤쳐 나온 것이 확실하다면, 어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오크들이 벌써 이쪽을 눈치 챘을지도 모릅니다.”


 카바노프 대령이 말했다. “장비들을 챙기고 즉시 저 해치를 열게. 사마로프 중사, 밖에서 우리와 합류하도록.”


 조종수로부터는 그 어떤 답신도 돌아오지 않았다. “중사, 내 말 들리는가?”


 차내를 거슬러 운전석으로 향한 세바스티브의 어깨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속에 힘을 잃고 떨구어졌다. 완전히 검게 타버린 사마로프 중사의 시신이 운전석에 거꾸로 매달려있었다. 작은 불씨들이 여전히 그의 옷가지와 살점을 태우고 있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깨져버린 차창이 보였다. 산 채로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보스트로얀 조종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다른 이들을 살려냈다. 비명소리 한 번 내지르지 않고서. 그는 진정한 퍼스트본으로 죽어 다른 이들을 구했다. 


 “사마로프 중사는 사망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다 헤쳐 나가고 나면, 중사에게 제국 명예훈장을 추서하고 싶습니다.”


 카바노프 대령은 비통함 속에 이를 악물었다. 사마로프는 12년 동안 그의 전담 조종수로 함께해온 이였다. 슬픔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그는 세바스티브를 바라보았다. “후방 해치를 열어주게나, 대위. 마로, 이 피 닦는 것 좀 도와주겠나? 병사들이 이런 꼴을 봐서는 안 되네.”





 “대령께서는... 건재하시네.” 세바스티브가 말했다. “다리까지 우리를 거뜬히 이끄실 게야. 상황은?”


 그들을 지나쳐간 정치장교 카리프가 소리 높여 당번병을 찾았다. 대다수 병력들과 함께 대열 후방 패스커터에 탑승하고 있었던 스타빈이 달려 나와 그의 앞에 서자, 정치장교의 얼굴에 눈에 띌 정도의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타카로프 중위가 시선을 떨구었다. “키메라 한 기는 뚫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중위의 말은 끝에 가서는 슬픔으로 거의 갈라져있었다. “5소대입니다, 대위.”


 세바스티브의 어깨너머에서 쿠리친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위,” 그가 말했다. “세베린 중위가 말씀을 청합니다. 그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복스-채널 델타입니다.”


 통신채널을 맞춘 세바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세바스티브 대위다. 무슨 일인가, 세베린?”


 되돌아온 세베린의 목소리는 마치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라도 억지로 참고 있는 듯 심하게 더듬거리고 있었다. “잔해에 걸렸습니다, 대위.” 그가 말했다. “궤도가 엉켰습니다. 여기는... 산 채로 구워지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폐하!” 가까이 대기하고 있던 중위들을 향해 세바스티브가 포효했다. “저기서 우리 애들을 꺼내 와야 해!”


 “너무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통신망을 따라 세베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핀을 뽑고 있습니다. 차라리 수류탄이 더 빠를... 그나마 이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대위...”


 “세베린!” 세바스티브가 통신망 너머로 외쳤다.


 “카바노프 대령께는...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세베린! 옥좌에 빌어먹을, 이보게!”


 더 이상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의 장벽 너머 어딘가에서 울려오는 폭발음과 함께 세베린의 통신이 침묵에 잦아들었다. 허공 속으로 세바스티브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쿠리친 중위,” 그가 소리쳤다. “워프에 빌어먹을 기갑지원은 어디에 있나?”


 쿠리친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령. 복스 통신망이 완전히 혼잡스런 상태입니다. 통신을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통신망의 혼잡한 상황은 카바노프 대령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그의 귀에도 혼란에 빠진 35연대 기갑소대들의 무전이 낱낱이 들어오고 있었으니. 들어오는 무전의 내용들이라고는 모조리 암울한 것들뿐이었다.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는 도시의 반쪽에 갇힌 보스트로얀 병사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여기는 스베미르, 5중대 지휘부에게.” 중대 의무병의 송신이었다. “내 말 들리는가?”


 “잘 들린다네, 스베미르.” 카바노프가 답했다. “상황은 어떠한가? 패스커터는 현재 어느 지점까지 와있나?”


 “완전히 뻗었습니다, 대령. 현재 고속도로 중간에 퍼져있는 상태입니다. 오크들이 안으로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그저... 무운을 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상자들에게는 편하게 해줄 약물을 주사했습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놈들이 무력한 자들을 학살하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싸우다 가겠습니다.”


 더 이상 카바노프가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자네는 용기 있는 사람이야, 중사. 회색여인께서 폐하 곁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네를 기다리고 계실 게야. 정녕 그러할 게야.”


 “감사합니다, 대령.” 의무병의 답신이 돌아왔다. “놈들이 뚫고 들어왔습니다.”


 중사의 최후와 함께 그의 무전 또한 침묵에 잦아들었다. 카바노프는 사악한 외계인들에 대한 분노로 내장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북으로 가야한다.” 그가 외쳤다. “뚫어라! 마로, 대형의 중앙으로 가서 앞쪽으로 수류탄을 던지게. 앞길을 막는 놈들을 어떻게든 약화시켜야해.”





 괴물 같은 덩치의 검은 오크가 전열을 비집고 들어와 세바스티브 앞에서 포효했다. 짙은 가래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싯누런 어금니를 갈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든 놈은 도끼를 들어 그대로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세바스티브는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세차게 날아간 도끼날이 그대로 다른 오크의 몸통에 들이박혔다. 괴물이 무기를 채 빼내기도 전에 세바스티브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발길질로 앞으로 내민 놈의 무릎을 꺾은 그는 그대로 한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파워 세이버가 아래에서 위로 오크의 머리통을 깔끔히 꿰뚫었다.


 쓰러지는 거대한 몸뚱이를 세바스티브는 뒤로 펄쩍 뛰어 피해냈다. 어느새 그는 다시 원진 안으로 복귀해있었다. “타카로프 중위가 쓰러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헤스토르의 불알 같은, 세바스티브는 생각했다. 타카로프, 안 돼!


 “체르니코프 대위도 죽었어!” 또 다른 병사가 외쳤다.


 “세바스티브 대위,” 마로 중위가 소리쳤다. “지휘권을 잡으십시오. 흰 멧돼지께서 부상당하셨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로를 탈출시켜야 합니다.”


 포로 따위는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해,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로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로노프?” 세바스티브가 고함쳤다. “아로노프, 아직 살아있나?”


 세바스티브의 어깨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온 라스 피스톨이 우측에서 덤벼들던 오크의 면상을 구워버렸다. “건재합니다.” 덩치 큰 정찰병이 그의 귓가에서 으르렁거렸다. “이래가지곤 오래 버티진 못하겠습니다. 망할 놈들의 전열이 약해지질 않습니다, 대위. 이 배신자 놈을 내려놓고 전우들과 함께 싸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옳은 말이었다. 아로노프는 전우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길 원했다. 이미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정찰병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세바스티브도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많은 놈들을 상대로 모두 최선을 다해주었어. 지금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부하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들의 지휘관일 수 있었다는 것도.


 이게 가드맨이 죽는 법이라는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부끄러울 것이 무에 있겠는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을 바쳐 싸운 것을.


 “허가한다, 병사.” 세바스티브가 말했다. “포로를 내려두어라.”




 마로와 쿠리친이 카바노프 대령을 전차 위로 안전히 올릴 때까지 세바스티브는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대령의 안전이 확보되자, 마침내 모두가 전차 위로 올라탔다.


 “갑시다, 정치장교.” 둔중하게 울리는 헤비 볼터 총성 사이로 세바스티브가 외쳤다. “전원 탑승했소.”


 커다란 전차들의 차체 위는 바득바득 올라타 있는 5중대 생존자들로 가득했다. 조종수가 전차의 속도를 최고로 높이자 병사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차체를 붙들었다. 정치장교의 전차에 올라탄 카바노프 대령은 마로와 세바스티브 사이에 몸을 누인 채였다.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령이 세바스티브의 소매를 붙들었다.


 “수류탄, 대위.”


 입과 코에서 핏줄기가 비져나오고 있는 대령의 혈색은 마치 유령처럼 창백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대령.” 세바스티브는 탄띠에서 두 발의 수류탄을 끌렀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대령이 말했다. “아니네, 세바스티브. 두 발 모두 내게 주게나.”


 대령의 이상한 지시에 당혹감을 느꼈으나, 세바스티브는 명령을 받들었다.


 카바노프 대령과 마로 중위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설명해줄 수 있겠나?” 그가 물었다.


 처연히 고개 숙인 마로는 말이 없었다. 세바스티브는 사내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다.


 “좋아,” 카바노프 대령이 말했다. “뒷일도 맡겼으니, 드디어 흰 멧돼지가 퇴역할 때로군.”


 그 말과 함께, 대령은 리만 러스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대령을 붙들기 위해 황급히 내뻗은 세바스티브의 손을 마로가 붙들었다.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대위. 저분께서 원하셨던 겁니다. 대령께서 정녕 어느 이름 없는 병상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시길 바라셨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세바스티브는 마로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리는 전차를 멈추어 다시 그를 구하러 돌아가라 명하고 싶었다. 그의 영웅. 그 오래전 68연대에 처음 입대했던 그 날부터 그의 우상이었던 남자. 그러나 마로의 말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흰 멧돼지와도 같은 전설은 전장에서 져야하는 법이라는 걸.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 또한 뒤를 따르리라. 


 밀려드는 오크 무리를 맞이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카바노프 대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바스티브는 조용히 경례를 올렸다.


 “덤벼라, 더러운 악마들아!” 휘청이는 몸을 다잡은 노병은 적을 향해 포효했다. 수류탄의 핀이 뽑혀 나왔다. “인류의 황제폐하께서 내리시는 마지막 하사품이니라!”


 세바스티브는 대령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분께 진 빚을 어찌 다 갚을런가. 정확한 숫자를 셀 수는 없었으나, 흰 멧돼지가 그 훌륭한 최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숫자의 녹색 쓰레기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을 그는 똑똑히 새겨보았다.


 우르릉거리는 전차가 교차로의 모퉁이를 돌아나가면서 대령의 마지막 모습도 시야 사이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