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특히, 카오스 신을 믿다 죽은 인간들에겐 더욱 그러하였다.
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자, 자신은 특별하리라 착각한 범인,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에 취한 자.
거대한 계획의 일부에 휩쓸린 자,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자, 일생을 바친 믿음에 배신당한 자.
고통과 후회에 울부짖는 영혼들은 그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종착지는 결국 동일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그들보다 조금 더 운이 없는 자들은,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 '헤녹'의 눈앞에 놓인 여인과 같이 되었을 테니.
헤녹은 팔다리가 잘린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여인의 비명소리를 음악 삼아 그녀의 이마에 칼을 대었다.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그의 칼날이 여인의 살을 파고들자 그녀는 고통과 공포, 그리고 광기에 휘말린 괴성을 내질렀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헤녹은 자신의 갑주에 새로 달은 인간의 머리 가죽의 위치를 매만지며 고문실에서 걸어나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와 같은 워밴드에 속해있는 또 다른 카오스 마린인 '칼다리안'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헤녹은 이빨이 약간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장식을 추가했지."
"한번 살펴봐도 되겠나?"
"얼마든지."

칼다리안은 헤녹의 왼쪽 어깨 부분에 달린 새로운 '장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절단면이 거의 보이지 않아. 그리고 마치 지금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지네."
"신속함이 생명이었지. 계집년의 주의를 돌린 다음, 순식간에 목을 잘라냈네."

그 말에 칼다리안은 장식의 목 부분을 살펴보았다.

"더더욱 놀랍군. 보통 그러면 급하게 자르느라 절단면이 고르지 못한데, 자네의 장식물은 마치 도구를 이용한 것처럼 반듯하잖나!"
"과찬일세."
"겸손하지 말게나. 이러한 실력은 우리 워밴드에서도 드문 것이니. 그러면서도 머리카락은 온존하여 남겨두었군. 그렇게 남긴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가죽에 그림을 새겨넣었고. 그리고 머리카락에는 피를 먹였어. 말라붙은 피와 약간의 기름기가 자네가 그린 그림을 눈에 띄게 하는구만. 잔혹하고, 그로데스크하며 아름답네. 하지만... 어떻게? 머리카락에 피를 먹이면 금방 뻣뻣해지고 두꺼워져서 가죽을 상하게 만들 텐데? 그렇다고 머리카락을 먼저 가죽에 바느질했다기엔 가죽에는 피가 물들지 않았군. 비결이 뭔가?"
"아, 형제여. 진실로 알려주고 싶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네. 하지만 자네가 나에게 그대의 어깨에 달린 뿔장식의 세공법을 알려준다면, 나 역시 나의 비밀을 공유할 수 밖에 없겠군."

헤녹은 칼다리안의 오른쪽 어깨에 높게 치솟아있는 뿔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제안에 칼다리안은 빙긋 웃었다.

"그것참 탐나는 제안 이내만, 알려줄 수 없네."
"애석한 일일세, 형제여. 그건 그렇고. 그사이 또 다른 세공을 하였군?"
"알아보겠나?"
"어찌 못 알아보겠나? 마지막으로 그대가 자랑하였던 그림의 바로 옆에 무려 3cm 크기로 그려놓았지 않은가. 이번엔 무엇을 의미하는 상징이지?"

칼다리안은 왼손으로 새로 새긴 그림을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이건 내가 최근 거짓 황제를 따르는 머저리들에게 교훈을 준 이후에 새긴 것일세. 그들은 어리석게도 그 보잘 것 없는 작은 빛줄기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하여 그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거울을 새겨놓은 것일세."
"아, 이제 보니 거울의 테두리가 보이는군. 하지만 그 안에는 기하학적이며 신묘한 무늬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눈썰미가 좋군, 형제여. 바로 보았네. 이 문양은 철저하게 계산된 프렉탈 무늬를 새겨놓았네. 아름답지 않은가?"
"무한으로 발산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바로 그걸세, 형제여. 거기에 더불어 무한으로 나아가면서도 점점 더 작아지는 이 아이러니를 담아보았지."
"그대의 깊은 심미안에 감탄하였네."
"자네는 말로써 날 부끄럽게 하는군. 그대에 비하면 아직 멀었네."

그들은 그렇게 서로 훈훈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칭찬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빠르게 서로의 신체를 훑어보며 단점을 찾아내었다.

'고작 그 정도 변화 가지고 생색내는 꼴을 보니, 이 녀석의 미술적 영감이 벌써 다 떨어졌나 보군.'
'저렇게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고작 저 정도라니. 나였다면 저 머리카락들을 이용하여 가죽과 가죽을 꿰메 단단하게 고정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주는 느낌이 확 달라지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숨기던 칼다리안이 화제를 바꾸는 겸 해서 입을 열었다.

"아, 형제여. 그러고 보니 무릎의 갑주를 바꾸었군?"
"알아보겠나? 저번에 물질계에 갔을 때 구한 것이라네."
'그걸 그대로 달았군. 저급한 놈. 새로운 갑옷을 자랑하기 위해서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다니. 하수 중의 하수만 할 법한 생각이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군. 그래, 거기에 뭔가 장식할 계획인가?"
'네놈은 마지막으로 물질계에 나간 지 한참 되었겠지. 부러움을 감추느라 고생한다, 멍청한 놈.'
"아직은 구상 중일세. 사실, 이 장식을 이 무릎에 달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보다도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말일세."
'너같이 예술적 감각이 떨어지는 놈은 내 새로운 장식 정도로도 놀랐겠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자네들이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이군."

보이지 않는 비방전을 펼치던 둘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서 긴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모아 높게 틀어 올린 마린 한 명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자이몬. 헤녹이 새로 장식을 달았다네."
"오, 그렇군. 그리고 자네도 뿔에 새로운 것을 새겨넣고, 목 갑주 가죽을 새로 염색했군."

자이몬의 지적에 순간적으로 헤녹과 칼다리안의 얼굴에 당혹감이 지나갔다.
헤녹의 경우는 칼다리안의 갑주를 새로 염색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칼다리안은 반대로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칼다리안이 되물었다.

"알아보겠나?"
"그럼. 알아보고말고. 저번에는 그대의 갑주 테두리를 칠하는 대에 인간의 피를 썼지만... 이번엔 엘다의 피를 조금 섞었군. 그렇지 않은가?"
"그걸 어떻게...?"
"인간의 피를 쓰면 색상에 어쩔 수 없이 탁한 검붉은기가 돌지. 하지만 거기에 엘다의 피를 섞어준다면 지금 그대의 갑주 색처럼 색이 더 선명해진다네. 이는 엘다의 피와 인간의 피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지. 나 같은 경우 거기에 약간의 황동 가루를 섞는다네. 그럼 일반적으로는 얻기 힘든 색을 얻어낼 수 있지. 저번에 쓰던 게 남아있는데 나중에 원한다면 조금 주겠네."
"아니... 괜찮네..."

칼다리안은 떨떠름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이몬은 이어 헤녹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눈을 반짝였다.

"헤녹, 잠깐 좀 봐도 되겠나?"
"무엇을?"

자이몬은 헤녹의 허리춤에 달린 벨트에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이내 흥분해서 말했다.

"세상에, 역시 자네의 손기술은 최고로군."
"무슨 소리인가?"

칼다리안은 자이몬의 말에 의문을 표했으나 헤녹은 말없이 미간을 구겼다.

"보게, 이 벨트는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걸세."
"그게 어쨌단 말인가? 자네도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장식품을 매달고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게. 모르겠나?"

칼다리안은 그의 말에 벨트를 자세히 들여다봤으나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자이몬은 칼다리안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보게. 하얀빛이 감돌지 않는가?"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인간의 살가죽 아래로 하얀 무언가가 보였다.

"뼈일세. 뼈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주변을 살가죽으로 두른 거야.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하면 이렇게 은은하게 색이 드러나지 않지. 헤녹은 분명 처음부터 살가죽에 지방이나 근육 같은 섬유질이 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벗겨낸 걸세. 그러고 나서 깨끗한 물로 피를 씻어내고, 뼛가루를 속에 문질러서 남은 찌꺼기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부드럽게 만든 것이지. 그걸로 끝이 아닐세. 살가죽을 최대한 넓고 고르게 펼쳐서 피부의 바깥면을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 갈아낸걸세. 아마 거기에도 뼛가루를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하네만, 오히려 고운 돌가루를 사용했을 수도 있겠군. 어느 쪽인가?"
"...돌가루일세."
"그렇군! 아무튼, 그렇게 만들어낸 가죽을 동일한 간격으로 잘라서 뼈에 감은 거야. 그러니 이런 걸작이 나온 것이지. 뭣보다, 단단하면서도 신축성을 잃지 않기 위해 뼈들을 조각내서 이어붙였군. 아마... 40조각? 아니, 이 정도 간격이면 50조각도 넘겠군. 아무튼 정말 대단하네. 역시 워밴드 제일의 손재주를 지녔다고 할 만 하군."
"고맙네."

헤녹은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했으나, 그의 은밀한 자랑이 들켰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이몬은 그의 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둘 모두 대단하다는 말만 했다.

"역시 자네들의 예술 능력은 대단하군. 나도 질 수 없지. 새로운 영감을 얻으러 가봐야겠네. 아마도 이번엔 코른의 악마를 잡아다가 고문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군. 자네들도 함께 하겠나?"
"아니, 난 오늘은 되었네."
"나도 다른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쉽게 되었군. 다음에 보세."

자이몬은 그들을 남겨둔 체 떠나갔고, 남은 둘은 씁쓸함을 느끼며 침묵 속에 나란히 서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의 시야에서 경쟁자가 사라진 후, 헤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정하기 정말 싫지만, 자이몬의 눈썰미는 이겨낼 수 없군."
"동의하네. 하지만-"

칼다리안이 뭔가 덧붙이려 하자 헤녹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저놈의 야자수 머리."
"-저놈의 야자수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