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요새는 한때 이 은하의 중심이었다. 수천의 세계에서 온 모든 소식이 필연적으로 제 갈길을 찾아 움직이던 바로 그 곳. 수많은 감각 옥좌 중 하나에 앉아 들어오는 전송 격자에 동기화되면 제국 전체에 닿는 거리에 있기라도 한 듯이 느낄 수 있으리라.
이제 밥 요새는 그저 맹목의 바다에서 휘둘리며 흔들리는 시야를 가진 섬에 불과했다. 그 정점에서 강화된 성벽 사이의 얇은 관측창을 내다보면, 흔적도 없는 전장에서 뻗어나와 그저 모든 것을 삼키는 암흑을 볼 뿐.
로갈 돈은 이제 지휘실 주변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가 가 버렸다. 때로는 알아보는 얼굴도,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얼굴도 있었다. 그와 함께 있던 아카무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싸우러 갔던 것일까? 지기스문트가 뭔가 사소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돈은 한참을 듣다 지기스문트가 저 암흑의 구렁텅이로 보내져 속도를 늦추기 위해 영영 떠났음을 깨달았다. 아마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의 정신이 마침내 닫혀가기 시작한 순간, 그는 선잠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얼마 전부터,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보이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작동중인 오스펙스 렌즈를 들여다보던 그때, 후드를 눌러쓴 얼굴이 그를 돌아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두운 유리에 비친 그 얼굴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돈은 거칠게 눈을 문지르고 뺨을 때리며 다시 경계 태세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잠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성을 지켜야 했고, 요새의 주인이었으며, 그 요새의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한 영혼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강점, 잠재적인 약점, 그리고 모든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지친 마음속에 그 어느 때보다 설득력있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맞서야만 했다.
포기해! 당장 도망처라. 누구도 널 탓하지 못해. 넌 할 만큼 했다. 포기해.
아카무스가 무엇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것인지는 몰라도, 다시 돈의 곁에 시립했다. 블러드 엔젤 군단원도 하나 있었고, 캡틴 제너럴을 대표해 온 아몬 역시 같이 시립했다. 그 갑주 차림의 거인들은 다른 부처에서 찾아온 수많은 선임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같이 낡은 제복에 창백한 피부였다. 돈은 그들 중 상당수의 이름을 기억했다. 전부의 이름은 아니었다.
“생귀니우스의 소식은 있더냐?”
돈이 물었다. 기진한 어조였다.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유로파 지역의 요새에서 탈출 작전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아카무스가 답했다.
“1시간 내 보고가 있을 예정입니다.”
돈이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천사의 마지막 수면은 언제였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시절은 언제인가? 사실, 전장에 나서는 게 지금 돈의 책무보다 나았다. 프라이마크들의 육체는 전사로서 빚어졌지, 자신이 빚은 감옥 안에 갇히도록 빚어진 것이 아니지 않던가.
“생귀니우스가 완료했음이 확인되면, 최종 철수 신호를 보내도록.”
돈이 자신의 망막 피드에서 영원히 유령처럼 맴도는 이미지들 중 전투서열을 불러들이며 말했다.
“생텀과 팔라틴에 있는 모든 전력은 철수하도록. 나머지 지역은 모두 포기한다.”
시각 아거 센서가 제 기능을 잃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돈은 끊임없이 들어오는 오덱스 소식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증원을 요청하는 비명, 공포에 질린 감시탑의 보고, 후퇴하는 지휘부의 숨죽인 보고까지. 그 정보를 실사한 자료와 결합한 순간, 그는 전체 전장의 도식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선두에만 수십만에 이르는 막대한 보병 병력이 진격하고 있었고, 백만도 더 되는 병력들이 잔해 속의 텅 빈 길을 따라 밀려드는 중이었다. 기동 가능한 기갑부대와 기계화 보행병기, 중력병기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모두 핵심부에 근접해 있었다. 타이탄과 나이트들도 내궁으로 자유로이 진입해 오고 있었다. 놈들이 발을 디디는 곳마다 돌이 가루가 되어 평평한 들판이 되고 있었다. 저기 비길 규모의 군대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한때 불굴이리라 여겼던 요새를 뚫고, 무너진 벽과 보루를 짓밟는 그 발길 곁에 불생자들이 비명이 따라붙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 자체를 거부했던 존재들이건만. 이 모두가 이제 곧 생텀의 가시거리 안에 들어올 것이다. 눈과 눈이 맞닿고, 검과 검이 맞닿으리라.
압도적이고, 멈출 수 없으며, 용서도 없으리라.
“그대의 주인은 지금 어디인가?”
돈이 아몬에게 물었다.
“탑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커스토디안은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 정중함 속에 참을 수 없다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 역시 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안달이 나 있었다. 돈은 그 임무가 어떤 것이었는지 묻지 않았다. 레기오 쿠스토데스는 다른 충성파 병력들이 죽인 것을 전부 더한 것보다도 많은 악마들을 참살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없었다면 생텀의 저층부는 이미 끓어오르는 광기로 가득 찼으리라. 캡틴 제너럴은 자신의 주인이었고, 아마 생텀을 위한 최후의 결전에 참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썽쟁이 형제가 벌인 무모한 짓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주항에서의 소식은?”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질문이 던져졌다.
“확실한 소식은 없습니다.”
아카무스가 답했다.
“천공 갑주가 파괴되었고, 안테리오르 방벽 일대에서 격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안으로 들이기에 충분했는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돈이 툴툴거렸다. 자가타이의 명예로운 투쟁은 이제 우주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크 엔젤 군단이 예상치 못하게 아스트로노미칸을 점령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저항의 작은 지점을 마련한 대가로 모든 도움에서 끊겨나가지 않았는가. 값을 비길 수 없을 수천의 귀중한 전사들이 바로 이곳, 생텀에서 붉은 천사의 도래에 맞서야 했건만, 부질없는 저항 지점에서 낭비되지 않았던가.
“계속 확인하라.”
돈은 형식적으로 명령했다.
“뭔가 확인되거나, 만약 그가 어떻게든 살아서 빠져나온다면 즉각 내게 알리도록.”
아카무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단 하나만 더 살필 게 남았다. 아직 폭발하지 않은 방어선의 유일한 부분이랄까. 총 9개의 영역으로 나뉜 그 지점은 적이 달려들고 있음에도 버텨내고 있었고, 그 결과 흡사 화살촉처럼 적의 손에 떨어진 지역에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빨리 철수하지 않는다면, 회복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또 다른 포위된 충성파 병력의 파편으로 화할 뿐이리라.
“그리고 지기스문트에 관한 것이다만.”
돈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대전사지요.”
장교들 중 하나가 답했다.
그리고 돈은 그 장교를 향해 돌아섰고,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지금 자네가…”
마음을 가라앉힌 돈의 말이 이어졌다.
“누가 그를 그렇게 부르지?”
소장의 제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군대를 지휘하는 그녀조차, 긴장 속에서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그저… 방금 들었을 뿐입니다.”
돈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고, 곧 삭여낼 수 있었다.
한때, 돈을 황제의 대전사로 칭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때, 이 빌어먹을 보루, 질식할 것 같은 성벽, 영혼을 빨아들이는 공허함을 벗어날 수 있었던 시절, 그때 그는 황제의 대전사로 곱혔다. 그의 시선이 잠시 갈 길을 잃었고, 다음 순간 돈은 강화 유리마다 아까의 후드를 눌러쓴 얼굴이 보이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그 얼굴은 돈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제 넌 끝장이야, 로갈. 충분치 않았던 게군, 그렇지 않나? 네가 기울인 노력은 이제 누구도 모를 테지. 네게 주어진 작은 명성조차 이제 사라지는군.
돈은 길고 말라붙은 호흡을 들이쉬었다.
“그에게 걸맞은 이름이군.”
돈은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어쨌든, 그를 다시 데려와라. 지기스문트는 내 명을 충분히 수행했다. 그 이상은 자살행위다.”
각각의 직원들이 돈의 지시를 서둘러 전하기 시작했다. 무감정한 표정,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 확률이 표정에 묻어나고 있었다. 아카무스는 남았다. 굳건하고, 믿을 수 있는 아카무스.
“다른 명하실 바가 있으십니까, 주군?”
돈에게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면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때였다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한 무언가를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타이탄 군단이라거나 말이다. 아니면 저 구석에서 나타난 러스라거나 말이다. 우주로 떠나지 않은 러스는 힘을 담아 포효와 웃음을 터뜨리며 제 야생의 군단을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냥 농담이었네, 형제여! 당연히 테라를 떠났을 리 없잖나!
하지만 돈에게 더 이상의 기력은 없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릴 정도의 힘이 남았을 뿐. 늘어선 센서 렌즈의 대열을 응시하는 채, 후드를 눌러쓴 얼굴과 시선을 마주했다.
“영원의 문에 신호를 보내라.”
돈이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에게…”
어떤 정확한 명령도 무의미했다.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여전히 전해져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말해야만 할 게 있었다. 그가 자신만의 너덜너덜해진 정교한 방어 계획으로 둘러싸인 자신만의 던전에 향하기 전에, 이 순간을 표시하기 위해 무언가 말해야 했다.
“그들에게 전하라.”
돈이 흔들림 없이 말했다.
“머지 않았노라고.”
간만의 역자의 말.
번역상에서의 변경점이 있음. 지금까지 armor/armour를 인명이 착장할 때는 갑옷이라고 번역해 왔는데 지금은 갑주라고 변경. 그 결과 천공 갑옷 역시 천공 갑주로 번역명을 바꿨음.
이걸로 3부 역시 반환점을 거의 돌았음. 3부 마무리가 11장이었나 그랬으니까. 워호크 완결되면 진짜 쉰다 일단.
읽다가 느낀건데 툴툴거리다를 대체할 단어는 없나? 본인도 짱구 굴려봤는데 마땅한게 없어서 그대로 쓴적이 있어서 그런데 쓰면서도 영 마음에 안들었음
나도 여러 대체어를 고민해 봤는데 뾰족한 게 안 나오더라고. 툴툴거리다 아니면 퉁명스럽다 정도인 거 같은데 퉁명스럽다는 그 정서를 담아내기 모자란 거 같아서 아직 툴툴거리다라고 하는 중.
툴툴거리다는 초등학생이 이잉 오늘 태권도 가기 시른데 하고 엄마 앞에서 땡강부리는 이미지라 더 그렇더라고 ㅋㅋㅋ
저 초인이 피곤해서 눈 비비고 뺨 때릴정도면..
영원의 문 방어전이 진짜 기대된다
순간 돈에게서 페투라보의 모습을 본것 같음
님이거 모음집이나 블로그같은거 있나요?
무기력증의 근원이 모타리온이니까 계속 속삭이는건 모타리온인걸까.
항상 번역 사랑. 감사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