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그림자
아스라니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그는 일라나와 유명한 행성들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적어도 다른 행성들이 아크토샤처럼 변하진 않았으리란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하면 심했지, 나은 데라곤 없었다.
어떤 행성은 바다와 숲에 미생물을 풀어 향과 색을 현란하게 바꾸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동식물이 죽어나가며 재와 연기로 사라져 갔다.
다른 행성은 아예 지하부터 상공에 이르기까지 무도장이 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약을 섞은 안개와 특수한 광채가 도시를 메꿔 나갔다.
주거지를 잃은 일부 아엘다리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또 다른 행성은 말 그대로 사냥터였다.
양서류부터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동물들은 사냥당하기 위해 겁많고
순하게 개조되었고 고기의 질과 양을 위해 사지와 살이 넘쳐 뒤뚱대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식탁에서는 매일같이 변이된 고기와 내장을 탐했고,
주방의 불은 꺼질 일 없이 별들을 건너온 향신료와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심지어 아직 살아있는 동물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잘라먹는 것을 미식이라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더 많이 먹으려 음식을 토하고 아예 식탁 위로 달려드는 모습에
둘 다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이건 한 행성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엘다리 문명 전체의 문제였다.
전날 밤, 일라나는 침대에서 <새벽의 인도자>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공허함에 지친 자신에게 나르쉬가 어떤 말을 해주었는지,
함께 무슨 짓을 했는지를 힘겹고 눈물지으며 말해주었다.
사실 그녀와 나르쉬 사이는 이미 멀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그림자가
일라나 안에 드리워 있었다.
아스라니는 이야기를 들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릴 뻔 했지만, 가능한 열심히 들었다.
일라나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고향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아엘다리가 있는 곳엔 어디나 있어요." 일라나가 속삭였다.
"나르쉬는 새로운 신이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줬다고 했어요. 그리고 자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들었다고도 했고."
"이해가 되질 않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신이라니, 그런 게 어떻게 말을 걸지?"
"글쎄요, 나르쉬 자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를 거에요. 하지만 그 신이
바라는 건 분명해요. 더 많은 감각과 쾌락, 무엇보다도 과잉이죠."
"어쩌면 그 조각상, 집게와 발굽이 달렸던 그게 그 신의 모습일지 모르지."
"이상하지만 저도 그걸 어디서 본 기억이 나요.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일라나의 말에 아스라니는 괴로운 기억에서 깨어났다.
"아, 괜찮아. 그냥 좀 신경쓰여서."
"이해해요. 나도 괜찮지 않으니까." 이제까지와 달리 일라나의 눈빛은 진지했다.
일라나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영향이 컸으리라.
"이제 곧 도착할 거야."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일라나 자신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아스라니는 일라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만큼은 지킬거야."
일라나도 그를 안았지만 미소는 힘없기만 했다.
청백색 빛이 사라지며 검은 우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라니는 두 번 안도했다. 첫째는 고향이 아직 심하게 변치 않았다는 것. 둘째는
사드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왔다는 것이다.
"이 친구야, 잘 지냈나."
"물론. 나야 잘 먹고 살고 있지. 자네의 연인과는 좋은 시간이었나?"
사드마의 눈을 본 일라나가 흠칫하며 물러섰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친구가 변한 기색이라곤 한 톨도 없었던 것이다. 그럴 리도 없고 말이다.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네만, 그렇지는 못했네."
"그러고보니 자네 전시회는? 괜찮지 않다니, 무슨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건 내 집에서 이야기 하고 싶네."
주위를 둘러보는 아스라니의 시선에 사드마는 의아해했지만, 이내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본 것은 많아도 설명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전시회에서
주먹을 날린 일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그의 목소리에는 혐오와 분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스라니는 격한 어조로 타락을 이야기했다.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어떻게
고통받는지, 얼마나 아엘다리들이 방탕해지고 도착적이 되었는지를 분노에 차서
그러나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사드마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고 일라나는 무슨 걱정을 하는 지 불안한 시선이 둘 사이로 오갔다.
"심지어 어린 새끼마저 파내서 한 입먹고는 버렸다네." 아스라니는 금방이라도 토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친구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우려와는 다르게 사드마는 제법 침착한 모습이었다. 사드마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꺼냈다.
"내가 보기엔 확실히 심각하네, 친구. 그런 일들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그렇지, 그렇다고."
"하지만 다들 생각이 없진 않을거야. 곧 제정신을 차리겠지. 그런 저열한
쾌락에 언제까지고 파묻혀 있겠나?"
"문제는 그런 쾌락주의 뿐만이 아니야. 새벽의 인도자가-."
"인도자가 왜?" 사드마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아스라니는 격한 감정에 밀려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아니 나와 일라나가 생각하기엔 새벽의 인도자들이 뒤에서 몰래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
"그럴리가 있나! 그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일라나도 그들과 함께했잖아."
"난 이제 그들의 일원이 아니에요." 일라나가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말했다.
"그들하고는 관계를 끊을 겁니다."
"정말로?" 단호한 일라나의 말투에 사드마는 어딘지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네." 일라나는 사드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자네도 조심해, 사드마.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어. 이 아엘다리 문명
전체에 말이야! 함부로 인도자들과 얘기하는 걸 주의하게."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군. 조금 지나치지만 알겠네."
사드마는 순순히 대답해주었고 아스라니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다.
그런 사드마의 모습을 일라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마치 뱀의 눈을 보는 듯한 그 느낌, 그건 나르쉬의 눈과 똑같았다.
어디서부터 아스라니에게 얘기해야 할지도 들어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두워진 사원 속에서 나르쉬가 한 줄기 자줏빛 광선 아래 서 있었다.
"나르쉬 형제님." 사드마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드마 형제. 말씀하세요." 나르쉬의 목소리에는 힘과 권위가 실려있었다.
"일라나가 배신했습니다. 아스라니가 우리의 행동을 눈치챘고요."
나르쉬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일단 지켜보세요. 추후 제가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나르쉬는 사드마에게 공을 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쾌락과 고통 앞에서
어떤 지성체도 무력하다. 단지 몇 종류의 약과 수많은 여성들, 특수한 힘을
깃들인 요리와 술로 이루어진 만찬, 그리고 어두운 즐거움으로 가득한
심상들. 이것이 새로운 신의 힘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였다.
돔 위에서 그녀 또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모든 생명은 그 분이 온 우주에 미소짓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기분좋은 조바심이 나르쉬의 영혼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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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부터 금까지 연재하는 것도 제법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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