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바다가 있을 적에, 인간이 하늘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그 시대에, 한 성자가 살았다.


성자가 토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제자가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제자는 스승을 몹시 존경했고, 몇 시간이고 서있어도 싫증낼 줄을 몰랐다.


제자는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그가 훌쩍 가깝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제자는 놀라 눈을 비볐지만 어느새 그는 바로 몇 걸음 밖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자줏빛 옷에는 알지 못할 뜻을 품은 상징이 정교하게 수놓아졌다.  


팔과 발목에는 진주와 에메랄드, 사파이어에 루비, 토파즈, 산호가 박힌 금과 은팔찌가 반짝였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 육체였다. 


일찍이 부유한 집에서 남녀간의 쾌락을 깊이 배운 제자였으나, 이런 자는 보지 못했다. 


상아를 깎은 듯한 피부, 깊은 밤하늘같은 머리카락, 붉게 여물은 입술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자는 정신을 차리고 그 모습 뒤를 향해 마음의 눈을 기울였다.


 보라! 그것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요, 신이나 반신이나 인간조차도 아니었다. 


그건 수천 가지 베이는 고통이요, 수만 가지 어루만지는 쾌락이라, 


수많은 팔과 가슴을 가진 그는 분명 여섯 하늘의 주인이었다.



"마라." 


제자는 그가 스승의 적임을 알았다. 그리고 할 일은 한 가지 뿐이었다.


"물러가라. 마라여.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제자는 온 힘을 실어 무겁게 말했지만, 그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네가 패한 것을 잊지 않았더냐? 아니면 다시 스승님께 고개를 조아릴 생각으로 왔는가?"


마치 죄인을 심문하는 형리처럼 제자는 냉혹한 경멸을 담아 그에게 던졌다.


"내가 그의 적이라고 누가 그랬지?"


제자를 혼란케 한 건 그 곱고 달달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일찍이 스승님은 깨닫기 전에 그와 전쟁을 치르셨다고 하


지 않았던가? 그리고 스승님은 승리하시어 깨달으셨다.




"무슨 일이더냐?"


토굴 속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마주했다.


실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 명은 실로 화려하다 못해 


번뜩이는 미를 뽐냈지만, 다른 한 명은 너무나 소박한 옷


을 두르고 햇볕에 그을린 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면과는 사뭇 다른 추악함과 고귀함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마침내 스승이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뭐라고? 제자는 어이가 없었다. 


제자가 뭐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스승이 다시 말했다.


"얘야. 차를 끓여오너라. 손님이 오셨구나."


제자는 지금 상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스승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저것은 마라가 아닌


가? 자기가 잘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자는 물러나 찻잎을 찾아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를 내오는 사이에도 마라가 스승님께 해를 끼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감히 스승님께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았다.




제자가 차를 끓이는 동안 스승은 방석을 내왔다.


둘은 마주 앉아 한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서로가 진정 누구인지를 보았다.


한 쪽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요, 한 쪽은 불가해한 혼돈의 화신이었다. 


한 편엔 고요하고도 흐림 한 점없는 맑은 빛이 있었고, 한 편엔 온갖 잡음과 향과 색깔이 가득한 어둠이 있었다.


제자가 차를 내와 두 사람 앞에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지냈는가?"


스승이 먼저 물었다.


"어딘가에서는 꽁꽁 묶이고, 어딘가에서는 날 죽이려는 놈들이 생겼지."


그의 미소에 흉한 일그러짐이 일었다.


"많은 일이 있었군."


"그리 버거운 일은 아니야." 그는 뭔가 재밌는 일을 떠올리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 한편에는 날 속박했다고 착각하게 내버려뒀지. 거기다 신출내기가 뿅 나타나선 칭얼댄다고 날 어쩌진 못해."


"자네는 마라니까." 스승은 껄껄대며 웃었다.


"난 마라지만, 그 이상이기도 해. 당신이 모르는 세상들도 내 앞에선 벌벌 떨지. 난 오슬란이고, 


위대한 뱀 로에쉬이고, 창백한 소이며, 쾌락이자 고통이고 과잉이야. 


나는 곧 한 종족과 무수한 별들의 생명을 대가로 태어날 거야. 곧 내 앞에 형제들도 머리를 조아리게 될 걸."


"그건 모르는 거네. 자네가 지금 강하다고 해서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어." 


"모르겠어? 생각의 세상에는 시간이 중요치 않아. 난 지금 여기 있기도 하지만 아직 태어난 적도 없는 거라고."


"차를 마시지 않겠나? 맛있다네."


스승의 점잖은 말에 일단 그는 찻잔에 입을 갖다댔다. 


이내 표정을 찌푸렸지만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맛없네. 각설탕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제자는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스승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당신이 옛날처럼 살았으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됐을 거야."


"지금도 그렇지 않나."


"넌 내 제안을 거절했어." 처음으로 그가 화난 기색을 띄었다. 


"널 세상의 왕으로 만들 수도 있었어. 아니면 온 은하의

 

황제도 나쁘지 않았겠지. 근데 그걸 쓰레기 던지듯 버리다

니 말야."


"자네가 주는 쾌락엔 독이 섞여 있지." 스승은 차를 한 모

금 다시 마셨다.


"그대의 방식으로는 절대 아무도 구할 수 없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래? 내가 당신이 뭐라고 할지 모를 줄 알아? 난 당신의 가르침은 속속들이 알아. 


그리고 후에 얼마나 하잘것 없는 꿈 같이 사라질 것도 알지."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아." 스승은 조용히 그러나 굳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댁의 희망 사항이지." 그는 남은 차를 순식간에 다 마셔


버리곤 찻잔은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벌써 다 마신건가. 안타깝군. 마라."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어? 지금도 늦지 않았단 말야.


저기 하늘을 봐. 지금은 안 보여도 저 너머엔 정복할 별들


이 수도 없이 많아. 저 산을 봐. 저 산 너머에는 뺏을 수 있


는 땅과 보석이 엄청나다고. 나와 함께하자. 그럼 모든 걸


 함께 가질 수 있어. 영원한 젊음이 필요하지 않아? 아님


 수없이 많은 쾌락의 노예들은? 내 부하들도 너에게 봉사


해줄거야. 응?"



"난 자네 뜻에 따르지 않아." 


순간 주위가 완벽히 고요해졌다. 바람소리도 벌레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오직 스승의 말소리와 정적만이 세상에 가득했다. 


"넌 언젠가 죽을 거야." 마지 못해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누구도 육체의 죽음을 피하진 못해."


그 말을 하는 스승의 얼굴엔 어떤 번뇌도, 두려움도 분노도 없었다. 태초 이전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스승은 남은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스, 스승님. 그는 누구였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답했다.


"내 오랜 친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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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프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하다잖아. 그럼 우리에겐 먼 과거도 워프의 신들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쓴 팬픽임.

참고로 이 일화는 부처님과 아난다가 마라에게 차를 대접한 그 이야기에서 따왔어. 

근데 정작 그 이야기의 출처는 모르겠더라. 아무튼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