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행성계 전투 전야


지구, 황궁


황혼의 그림자가 원형의 홀의 바닥을 채우면서 중심부를 에워싼 동상 주변으로 번졌다. 엷은 새털구름이 가르며 빛을 잃어가는 푸른 하늘이 적막한 공간을 덮었다. 차가워지는 공기와 돌에 맺힌 저녁 습기의 냄새가 원형 홀의 널찍한 문 가운데 한 곳을 통해 들어서는 지기스문트의 피부를 핥았다. 철제 기둥 위에 조명 구체가 달려 있었으나 여전히 반쯤 어둠에 잠긴 홀은 밤과 낮의 경계였다. 그 자리에서 대성전이 별들 사이로 나아갔고, 그 곳에서 맹세들이 다져졌다.


지기스문트는 생각했다.


이제 그 맹세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깨졌군.’


그는 고결감과 단호함 사이에 자리한 흰 대리석 상들을 올려다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길리먼 공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군. 어느 정도는 말이지.’


그곳에는 스물, 마지막 펜델키온 장인들이 프라이마크들을 본떠 조각한 석상 스물이 있었다.


그 가운데 사라진 둘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석상의 대좌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리젼 역시 공허로 사라졌다. (반역파의) 아홉 프라이마크를 본뜬 석상의 얼굴은 그들의 반역으로 인한 수치를 숨기기라도 하듯 천으로 덮여 있었다. 석상의 일부는 정과 망치로 담아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라도 한 듯 눈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멀리 보이는 돈에게 다가갔다.


지기스문트는 이스트반 5 행성의 대참사 이후 돈이 뭔가 변했음을 느꼈다. 마치 프라이마크 내면에 있는 힘과 의지의 구조가 뒤바뀐 것 같았다. 돈은 연이어 이어지는 브리핑에 참석하고, 황궁을 허물고 요새화 시키는 노동 부대를 감독하는 한편, 태양계 너머 행성들의 소식을 듣고 연락하기 위해 아스트로패스들을 압박했으며, 비밀 회의실에서 콘스탄틴 발도르와 말카도르와 함께 상황을 논의했다. 그 사이에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돈은 황궁의 흉벽과 조용한 곳을 거닐었다. 지기스문트는 아버지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그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이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는지 다시 의문을 가졌다. 죄책감? 그렇다. 그게 원인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 분께서 이해하지 못할 진실을 아는 동안, 아버지의 신임을 이용해 그를 속였다.


지기스문트는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시여. 하지만 당신께서는 반드시 아셔야만 합니다. 저는 그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보셔야만 합니다.’


지기스문트는 전략의 기본 원칙을 생각했다. 단순한 한 문구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 방어의 첫 번째 원칙은 네가 무엇을 막으려하는지 이해함이다.


지기스문트가 다가왔을 때, 돈은 얼굴이 가려진 석상 가운데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돈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아들아, 무슨 일이더냐?”


지기스문트는 가려진 돌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천 아래에서도 여전히 잘 알아볼 수 있었다. 포식자를 연상케 하는 자세, 덮여 있는 천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것 같은 손톱의 손. 지기스문트는 깨달았다.


커즈다.’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그 분의 형제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의 징조인가? 우리는 살해당하기 직전의 암울한 날을 겪을 것인가?’


지기스문트는 말했다.


모든 반역자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놈들은 맹세를 지키는 자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돈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지기스문트를 바라보았다.


네가 직접 하겠느냐?”


주군, 제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직접 수행하겠습니다.”


돈은 잠깐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기스문트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까?”


돈은 답하지 않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커즈의 가려진 석상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 제국은 이 반역을 견뎌내고 이어지리라.”


지기스문트가 보기에 돈은 자신만큼이나 커즈의 석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아직 명예와 충성이 남아있다.”


돈은 얼굴을 굳히며 시선을 내렸다.


아들아, 나는 앞으로의 전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도 알 수 없다. 허나 반역은 결국 실패할 것이고, 그 날을 위해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다.”


지기스문트는 돈의 표정에 동조하며 말했다.


호루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고, 아군은 혼란 속에서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아군을 각개격파하며 우리가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돈이 지기스문트를 예리하게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버지 역시 같은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커즈나 알파리우스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그 둘은 이 반역의 중심이 아니다.”


돈은 하늘의 어두운 구석에서 떠오르는 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은 붉었고, 밤을 맞이하는 황궁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와 연기로 얼룩졌다.


돈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이곳으로 올 것이다. 별들 사이에 머무르면서 무의미하게 우리에게 피해를 누적시키진 않을 것이다. 그래. 호루스는 여전히 호루스다. 숨통을 노리고 최후의 일격을 날릴 창끝을 내지르겠지. 그는 이 일을 끝내기 위해 이곳으로 올 것이다. 어느 날 밤이면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천상이 불타는 모습을 눈에 새기겠지.”


지기스문트는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그 모습을 보셨다. 최소한 그 일부분만큼은.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이 옳으며, 내 결단을 이해해주시리라.’


아버지시여.”


돈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기스문트는 프라이마크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평가하고 판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더냐?”


제가 왜 응징의 함대지휘를 맡지 않고 테라로 돌아오기를 청했는지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더냐. 나는 네 판단에 의문을 가질 이유를 찾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기스문트는 숨을 들이켰다. 목이 갑자기 바싹 말라붙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말이 허공에 걸린 느낌이었다.


이제 말씀드렸다. 돌이킬 수 없다.’


말해 보거라.”


프라이마크가 차분해지며 그의 모든 것이 지기스문트에게 집중되기라도 한 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먼지 냄새가 섞인 바람이 흰색 테두리의 망토를 움직이며, 깔리는 어둠에 맞서 들어올렸다.


지기스문트는 눈길을 돌리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