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파국
“나르쉬 님?”
몇 초간의 정적 끝에 다르시가 간신히 말했다.
새로 태어난 그것이 나르쉬와는 전혀 닮지 않았어도 말이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아엘다리와 닮았지만 피부는 환한 분홍빛이었다.
거기에 은으로 장식된 발굽과 뿔, 집게발은 정교한 조형물같이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자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움직이는 몸짓 하나까지조차 극도로 정제되었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웠다. 무엇보다 광채가, 손톱과 팔과 상반신을 따라 보석을 수놓은 듯
번쩍이는 문신에서는 보는 걸 넘어 강렬한 향기마저 느껴지게 했다.
“아, 어쩌면 내가 너무 빨랐던 건가?”
참으로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을 음악같은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 목소리에는 음험한 조롱이 배어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아스라니는 지금 눈 앞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에 한 문장을 내뱉
는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호오, 너는 제물이구나. 살았으니 잘됐네. 뭐, 그래봤자 잠깐이지만.”
“나르쉬 님이 아닌가?” 살짝 중얼거린 말인데도 그것은 놀라운 청각으로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르쉬? 아, 저거?” 날선 집게발이 흩어진 핏덩어리를 가리켰다.
“저놈의 영혼은 아직 소화중이야. 당분간 철저하게 자극을 주며 녹여 먹어야지.
그야 너무 맛있는걸! 너희 종족이 앞으로 우리의 최고급 식사가 될 거야. 축하해.”
느리고 나른한 박수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럼 넌 누구냐? 이 세상의 생물은 아니겠지만.”
우르비는 이전에 이마테리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가끔 그곳에서는 상상 속에나 볼
법한 악몽들이 생생히 드러낸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기사 어떤 생물이 이런 괴기한 아름다
움을 갖출 수 있겠는가?
“난 쾌락과 고통의 아이다.” 처음으로 그것이 진지하게 말을 시작했다.
“난 과잉의 군주의 첫째가는 자식이요, 그분의 첩이자 창부이기도 하다. 난 고문를 가하는 자
이며 유혹자이다. 너희 식으로 말하자면...비밀의 수호자이다.”
“그게 새로운 신이란 말이야?” 일라나의 얼굴은 핏기가 싹 빠진 채였다.
“여기 이것들은 그렇게 말했지.” 비밀의 수호자가 손으로 넋이 나간 군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분의 왕국으로 이르는 문이 곧 열릴 거다. 나는 뒈진 그 녀석의 몸 속에 있었기에
조금 더 빠르게 나온 것뿐이야.”
“혹시 다른 이들도 그렇게 되나? 인도자들도?” 아스라니의 말에 단상 위에 서있던 인도자들
이 일제히 비밀의 수호자에게 눈을 돌렸다.
“그렇지. 아님 어떻게 되겠어?” 그 무슨 시시한 말이냐는 듯 수호자는 집게발을 내저었다.
“전능한 신의 수하이자 우리의 지도자시여!”
갑자기 다르시가 휘황찬란한 미사여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저희는 당신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바치고 행성을 바쳤습니다.
우리 종족의 미래를 바쳤습니다.”
“어, 그랬지.” 의외로 그 말에는 수호자도 수긍했다.
“그럼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저희는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가축이 되라면 될게요!
부디 살려주십시오.”
비굴하다 못해 비참한 모습에 인도자들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일단 사는 게 먼저였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인도자들 뿐만 아니라 군중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연달아 온갖 충성맹세가 이어졌지만, 결국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비밀의 수호자는 눈을 내리깔며 느긋하게 다르시를 향해 걸어갔다.
발굽 소리와 함께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마침내 수호자가 입을 열었다.
“얘야.” 다르시가 고개를 살짝 들고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우러러보았다.
“싫은데?”
다르시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는 발굽 아래 박살이 났다.
당연히 주위에서는 일제히 비명이 쏟아졌다.
“그래, 충성을 바쳤지.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왜 보답해야 하는데?”
비밀의 수호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전혀 이해를 못하겠단 모습이었다.
“말도 안돼! 당신들이 그랬잖아. 우리 종족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겠다고!”
이젠 존댓말도 버린 채 한 인도자가 주저앉은 채 지껄였다.
비밀의 수호자는 한 걸음을 성큼 내딛고는 바로 집게발로 머리를 베어내었다.
“그거야 나르쉬가 멋대로 한 말이지.” 똥이라도 밟은 표정을 지으며 비밀의 수호자는 집게발에서 피를 털어냈다.
“내가 그 놈이 한 약속을 지켜야 하나?”
군중들은 한 발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씩.
그리고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켜, 어서!”
“너나 비키라고!”
“내 팔, 내 팔이!”
입구를 향해 도망치는 모습은 이미 지옥이 내려온 듯 했다. 너나할 것 없이 도망치느라 서로
를 짓밟은 것이다.
결국 신전 밖으로 대다수가 도망쳤지만, 남아있는 이들은 몸이 성치 못했다.
바닥에 엎드리거나 기둥에 기댄 채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하네. 도망쳐봤자 그게 그건데.”
반면 수호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죽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갑작스레 위르나가 담담한 어조로 질문하자 비밀의 수호자는 살짝 눈길을 주었다.
“우리도 그렇게 되나? 나르쉬처럼?”
비밀의 수호자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건 좀 있으면 알텐데?”
역시 악마다운 말을 하며 비밀의 수호자는 제물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더니 머리를 숙인 채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뭐지?”
“조용히! 생각 중이다.”
쉿쉿거리는 뱀같은 소리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쳐들었다.
“결정했다. 너희를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재밌을지.”
재미라고? 도무지 선의라곤 알지 못하는 놈의 말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다들 놈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에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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