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아님. 비정기 연재 워해머 판타지 제국 소설)
오늘 우리 부대에 새로 들어온 놈은 별로였다. 잔뜩 눈에 힘을 주고선 가까이 오지 말라는 표정으로 막사 천막 한 쪽에 자기 짐을 풀었다. 요즘 우리 검병대 평균 복무일이 계속 짧아져서 여기저기서 모병, 전입, 탈주자 재배속 등으로 신병이 계속 들어왔다. 부대장인 내가 다 얼굴을 익히고 인사를 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는 양이 많았다. 물론 여기서 나간다는 건 싸우다 죽었다는 얘기다. 보통 경험없는 놈들은 멋모르고 기세등등하거나 주춤거리며 캠프로 들어왔다. 그러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손이나 발이 없는 우리 병사들을 보면 쥘파니아 좀비라도 본 듯이 겁먹고 토해댔다.
그나마 이놈은 생전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닌듯했다. 참혹하게 부상입고도 앉아서 무기를 손질하는 내 검병들을 보고 익숙하다는듯 지나갔다. 그리고 여태껏 여러 부대를 거쳐온 모양인지 알아서 천막 빈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어젯밤에 얼뜨기 같은 신병 열 몇 명이 굴러들어와서는, 도저히 못 싸우겠다며 칼 들고 소동을 벌여댔다. 무서워하는게 아니라 어이없어하는 내 병사들 앞에서 내가 직접 신병 몇 놈을 두들겨패서 세금으로 내버린 정신이 돌아오게해줬다. 그런 일까지 있던 터라, 태도는 맘에 안들지만 익숙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사라지는 신병이 차라리 고마웠다. 면담을 해줄 생각따윈 없었지만 호기심이 생겨 신병을 호출했다. 그리고 그게 오늘 밤 벌어진 사투와 엮일 줄 그땐 몰랐다.
'야! 사기치지마!'
왼쪽 오른쪽으로 높은 산과 숲이 시야를 막았지만, 그 가운데로 시원하게 뚫린 하늘과 초록색 들판이 쭉 이어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높은 언덕에는 라이클란트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이 들어간 큰 천막이 수십 늘어서있었다. 천막 주변에 제국이 자랑하는 대포, 헬스톰 로켓, 헬블라스터들이 수십 개 놓여있었다. 근처에서 병기를 끄는 군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었다. 천막 뒤로는 높은 성벽을 자랑하는 헬름가르트 협곡 요새가 거인이 앉은듯 우뚝 솟아있었다.
어이없다는듯 소리친 사람은 라이클란트 53연대 직할 포병대 소속, 그레이트캐논 포수 지크만이었다. 그리고 지크만 손가락이 가리킨 사람은 비앙트였다.
'넌 네 꼴리는대로 킬마크를 올리잖아. 말이 되냐?'
비앙트는 짐짓 놀란 척 하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과장된 목소리로 깨달았단 듯 얘기했다.
'아! 맞다. 저번에 녹색피부놈들 한 부대 쓸어버린 거 까먹었다.'
그러면서 비앙트는 모자 옆에 껴둔 하얀 분필을 꺼내서 헬스톰 로켓 배터리 뒤쪽에 빗금을 계속 그었다. 새까만 표면에 빗금 다섯 개짜리 묶음이 이미 수십 개 있었다. 하얀 킬마크가 옆에 계속 붙었다.
'그거는 잡졸들 쓸어담은 거고, 난 거인하고 큰 거밀 죽인거잖아! 그럼 난 곱하기 오 해야겠네? 아니 곱하기 십 해야겠네.'
그러면서 지크만은 분필을 뺏어들고 자기 담당 그레이트캐논으로 달려갔다.다른 포병들은 어처구니없고 기준도 결말도 없는 이 싸움이 어디까지 가나 끌끌대며 구경했다. 오늘 야외 사격훈련이 막 끝난 참이었다. 헬스톰 배터리 포반은 고득점을 받았지만 그레이트캐논 포반은 목표를 맞추지 못한게 시작이었다. 지크만은 헬스톰이 넓게 로켓을 뿌려대니 득점하는게 당연하다고 화냈고, 비앙트는 대포가 표적을 못 맞추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놀려댔다. 그 이야기에서 각자 몇 명을 쏴죽였냐는 얘기까지 온 거였다.
지크만은 숲 가까이 놓은 자기 캐논으로 왔다. 킬마크 빗금 17개를 동그라미쳐서 묶은 뒤 곱하기 10을 썼다. 킬마크 하나하나가 거인, 아라크나록 거대 거미, 멧돼지 전차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을 쏴잡고 동료를 구한 소중한 기록이었다. 물론 비앙트가 표시한 킬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최전선에 있는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면 항상 포병대에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했다. 지크만은 킬마크 곱하기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크르륵.'
'비앙트, 너도 웃기냐?'
'크륵.'
자기가 분필을 들고 달려온 거리, 웃음소리라고 하기 이상한 짐승같은 소리. 본능적으로 지크만은 허리에서 단검을 뽑으며 고개를 들었고, 도끼에 머리가 쪼개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져간건 자신의 빨간 킬마크였다. 머리에 찍은 도끼를 빼며 새빨간 눈을 가진 오크가 숲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어 수백의 고함소리가 울렸고, 숲이 떨리며 거대한 멧돼지를 탄 오크들이 창을 들고 뛰쳐나왔다. 지크만이 쓰러져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쟁병기로 뛰어가는 포병대원들이었다. 이날 오후 헬름가르트 전투가 시작됐다. 포병대는 병기를 끌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두 죽었다. 포병대보다 더 나가있던 검병대는 고립되었다.
이글대는 불이 꺼지자 밤은 더 징그럽게 꿈틀댔다. 언덕 위에서 마법 바람을 모아 불을 만들던 브라이트 위저드는 어디서 날아온 조잡한 화살에 머리를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통제력이 사라지자 마법사 손에 모인 불덩이가 요란하게 폭발했고, 방금 생긴 시체를 공중에 날려보냈다. 검병들은 갑자기 뒤가 밝아지며 목 쪽에 열기가 확 퍼지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언덕 위 마법사가 없었다. 병사들이 다시 앞을 보려는 차에 새빨간 로브를 두른 시체가 언덕 위에 떨어져 퍽 소리를 냈다. 언덕 너머 보이는 헬름가르트 요새는 새까맣게 몰려든 오크 무리를 떼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핸드건이 발사되며 생긴 노란 불꽃들이 작게 빛났다. 헬름가르트는 작은 악마들을 떼어내려 애쓰는 힘없는 거인 같았다. 요새가 멀지 않은데 검병대는 포위되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앞을 돌아본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진짜 밤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지옥에서 기어나온 녹색 악마들이 눈 앞에 있었다. 놈들이 숨 닿는 거리에서 이해못할 괴성을 꺽꺽대며, 칼인지 도끼인지 모를 뭔가로 제국 방패를 내리쳤다. 어떤 기술도 형식도 없이 내려찍는 힘에 검병대의 방패가 하나 둘 쪼개지다 부숴졌다. 공격을 막다가 그대로 손목이나 팔이 부러진 병사도 있었다. 녹색피부족이 헬름가르트 수비군 제2 검병대를 둘러싸고 죽여갔다.
수비대장 베르하른은 요새 성벽 위에서 아래 전황을 보며 이를 갈았다. 갑작스런 오크의 기습으로 헬름가르트는 헬스톰 로켓 같은 귀중한 전략병기를 다수 잃었고, 주력 중 하나인 제2 검병대는 요새 앞 언덕에 고립됐다. 빠른 말로 오 분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구하러 나가는건 말이 안됐다. 헬름가르트 수비대는 활, 석궁, 핸드건만으로 성 아래 오크를 쐈고, 바싹 달라붙어 올라오는 오크는 창과 할버드로 쳐내야했다. 오크놈들이 기습하려고 머리를 쓴 덕분인지, 거인 같은 거대한 괴물이 없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공성병기나 큰 괴물이 있었다면 이미 성문이 뚫렸을지 몰랐다. 우버스라이크와 아일하트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최소한 며칠을 버텨야했다. 헬름가르트는 그린스킨을 포함한 외적을 막는 관문이어서 그간 풍족히 지원받았지만, 쥘파니아에서 일어난 사태 때문에 황제 칼 프란츠가 직접 병력 다수를 차출해가면서 병사 수는 물론이고 화약 재고도 워머신도 상당히 줄었다. 그럼에도 웬만한 침공은 버틸만한 힘은 있었지만, 오늘 기습은 예상을 뚫고 일어났다. 그린스킨이야 그렇다치고 평소 주변을 감시하는 사냥꾼과 정찰대는 뭘 했는가? 오크가 나타나기 하루 전, 아니 적어도 몇 시간 전에는 보고가 있어야 했다. 군 기강 해이인가? 정찰대는 황제에게 포상까지 받은 베테랑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헬름가르트를 지켜왔기에 이들이 그린스킨의 움직임을 놓치거나 늦게 보고할 일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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