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 러스는 늑대의 전당에 홀로 앉았다. 그의 손에는 잔에 든 와인이 들려 있었다. 대취하게 해 줄 묘드를 마실 상황은 아니었다. 와인은 그의 감각을 무디게 하지도, 살육을 빚어낼 투혼을 끌어내지도 못하지만, 훌륭한 와인은 그가 갈망하는 세련됨을 품고 있었다. 그 맛이 잃어버린 여름을, 저 멀리 떨어진 대지를 떠올리게 했다. 와인은 애도의 음료였고, 그의 기분을 메워 주었다.


그렇기에 지금 러스는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예리한 사냥꾼의 감각은 그저 액체에서 발견한 화학적 화합물이 이름을 멍하니 새겨낼 뿐이었다.


그의 한살매를 풀어내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바닥 위로, 그의 룬들이 혼란스럽게 널려 있었다. 테라에 머무는 돈의 분노는 여전히 그를 찔러댔다. 생귀니우스의 어딘가 틀어박히기라도 할 것 같은 행동 때문에 걱정이 일었다. 그리고, 마그누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매일 그의 귀에 메아리쳤다. 넌 잘못된 손에 쥐어진 칼이다. 너는 무고한 목을 베었어.


러스는 전당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미 한 번 기만당했다. 호루스를 쫓으면서, 다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테라의 신중함 대신, 노골적인 공격을 가한다는 펜리스의 방식을 선택한 것 자체가 잘못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너무 늦기 전까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테라의 사람도, 펜리스의 사람도 아니다. 간혹, 그는 자신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복도 뒤에서, 작은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예리한 귀에 들어온 그 소리는 흡사 전령만큼이나 분명하게 들렸다. 문이 다시 벽과 하나가 된 순간, 크바의 모습이 나타났다. 러스는 이미 룬 프리스트가 있을 곳에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색에 잠긴 러스의 날카로운 눈빛을 견딜 수 있는 이는 크바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룬 프리스트는 레기오네스 아스타르테스 기준으로는 결코 나이든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지병 때문에, 그는 나이 들어 보였다. 검은 돌바닥 위로 크바가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갑주가 그의 움직임을 돕고 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오히려 갑주 때문에 더욱 힘겨워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흩어져 있는 룬을 바라보며, 크바는 자신의 발 밑에 깔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움직였다.


“크바.”


프레키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흡사 전투용 단검을 떠올리게 하는 송곳니가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게리의 노랗고 검은 눈동자가 크바를 응시했다. 야만의 지성이 그 눈동자에서 빛났다. 전사들이 없는 늑대의 전당은 무덤처럼 어둡고 음울했다. 그릇에 담긴 불꽃과 촛불 꼭대기의 불길이 화강암으로 빚어진 바닥에 흔들리는 불길을 열었다. 간혹 함체를 따라 흐르는 전율 속에, 불길이 뒤틀리며 길이 끊기기도 했다. 다음 흔들림이 지나가며, 다시 보이지 않는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주군께서 원하시는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위대한 야를이시여.”


크바가 입을 열었다.


“벌써 네 번째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지켜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설령 의도치 않더라도, 아주 작은 부름에라도 달려올 겁니다.”

“안다, 안다고.”


러스가 조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워프에 있는 동안 아랫골의 의식을 치르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짓 아니더냐. 잘못을 인정하마. 바로잡도록 하지.”


프라이마크의 말은 반쯤은 반어법처럼 들렸다. 크바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러스를 주의 깊게 살폈다.


“주군께서는 프라이마크시지요. 그 누구에게라도 행동을 정당화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로 향하시건, 저희는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러스는 와인이 담긴 은빛 병에 손을 뻗었다.


“내가 무류하다고 믿게 만들 작정이냐? 그럼 온갖 문제들이 따라올 텐데?”


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 꼴만으로도 충분히 오만하단 말이다.”


늑대는 제 옥좌의 앞으로 몸을 기울여 낮은 가시나무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비틀린 야수들의 형상이 온통 새겨진 채였다. 두 번째 잔이 거기 있었다. 러스는 크바에게 손짓으로 마음껏 들라고 권하고선 제 잔에 와인을 가득 채우고서 크바에게 술병을 건넸다.


“한잔하자꾸나.”


러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야기할 테니, 너는 들어라.”


크바가 대기에 퍼진 냄새를 향해 킁킁거렸다.


“와인입니까?”

“와인이다.”


러스가 답했다.


“사자의 포도밭에서 길러낸 포도로 빚은 거지. 우정의 선물이랄까.”


러스는 미소를 지었다. 


“짙은 빛에, 씁쓸하고, 복잡한 풍미가 나지.”

“그분과의 관계에 적절히 들어맞는 설명이군요.”


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독한 우짖음이었다.


“그렇지.”


돌의 표면 아래서 무언가 문제가 될 만한 흔적이라도 볼 수 있다는 듯, 러스의 시선이 어두운 바닥을 가로질렀다.


옥좌가 놓인 연단 근처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바는 한 잔을 따라 마시고서, 허락 없이 그대로 의자에 앉아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상태 때문에, 많은 것이 허락되었다.


“말하고자 하실 바가 있으면 말씀하소서, 주군.”


크바가 입을 열었다. 러스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말해봐라.”


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 창 말이다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러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나는 이 창을 절대 좋아해 본 적이 없지.”

“모든 클카가 그 진실을 아는 바입니다.”


크바가 답했다. 그가 말하는 진실이란, 그 창에 ‘황제의 창’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붙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부인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펜리스의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 미신적인 공포가 거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모든 무기는 모든 남녀가 그러하듯 진짜 이름을 품는다. 그 이름으로 무기가 설명될 뿐 아니라, 그들이 빚어내는 무기에 한살매를 부여하고, 어떻게 쓰일 것인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무기에 이름을 붙인 전사에게, 무기는 힘을 내어준다. 황제의 창이라는 이름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부황이 내리신 선물에 이름을 지으신 바가 없지요.”


크바가 대꾸했다. 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식적으로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그 이유를 알려주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네가 듣고 판단하도록 해라, 조각난 자여.”

“그럼 듣고 있나이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바가, 리만 러스가 제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 황제의 창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황제께서 이 창을 주신 것은 불의 바퀴를 겪은 이후였다.”

“제 일전의 시간입니다, 야를이시여.”


크바가 답했다.


“물론 그 사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아주 긴 시간 전이었지.”


러스가 답했다.


“나는 최초의 바라기르와 함께였다. 황제께서 이르시기 전에, 내 곁에서 싸우던 이들이었지. 테라 출신 군단병도 우리와 함께이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군단은 두 세상에서 모인 야만인들이 하나로 뭉쳐 싸우던 혼혈아나 다름없었지. 우리는 그 시절에 ‘별을 쫓는 늑대’로 불리기도 했다. 내가 원정 전에 했던 연설 때문이었지.”


러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리멤브란서들이나 학자들에게 빌어먹을 인상을 좀 남기고 싶어서 연설문을 쓰는 데 꽤 시간을 쏟았었다. 그래서 모두가 기억할 자명한 부분을 놓쳐버렸지. 별을 쫓는 늑대? 스페이스 울프?”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애새끼 이름이나 다름없구나. 우리는 우리를 항상 라우트라고 여겼다. 그 이름이 어디서 유래한 표현인지 아느냐?”

“마음 깊이 새겨진 오랜 모욕이지요. 그 모욕을 던진 자들에게 반드시 되돌아갈 저주입니다. 말로서 던진 창이, 붙들린 채 뒤집혀 그 투척자에게 쫒힘을 이릅니다.”

“그러했다.”


러스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테라의 제6군단으로부터 전해진 마지막 유산 중 하나지. 어쨌든, 내가 군단과 다시 결속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호루스와 황제께서는 나를 엘드크링글라(Eldkringla), 즉 불의 바퀴로 시험하고자 했지. 불안정한 성운들과 떠도는 별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린스킨이 넘쳐나는 지옥 같은 곳이지. 우리는 놈들을 파괴하라 요청받았고, 그렇게 했다.”

“그것이 저희 본성 아니겠습니까, 야를이시여.”

“그렇지. 실로 그렇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이빨은 다 깨져나갔지. 내가 이끌던 잡종 군단은 일전의 그 어느 공세에도 저항하던 오크들의 제국을 무너뜨렸다. 5년이 걸렸고, 제6군단의 힘은 일전의 삼분지 일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러스는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오크 십억 마리를 죽이고, 라우트의 삼분지 일을 잃은 대가로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가장 큰 선물은 물론 애트였지. 물론 그 이름은 절대 선물이 아니었다만. 체임버 카스텔라니스(Chamber Catelanis)의 머저리들은 그걸 팽이라고 부르는 게 재밌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다른 선물이 바로 이 창이었다.”


“기념식이 있었다. 만물아비께서는 아주 교활하게 그런 것들을 활용하시지. 겉으로는, 절대 즐기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만. 페러스와 호루스도 거기 있었다. 페러스가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펄그림이 그 모가지를 자르기 직전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솔직히 좀 당황스러워 보이는 기색이었다만. 만물아비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니까. 정말 계산된 행진이었다. 만물아비께서는 그 자리를 둘째 아들을 기리면서 셋째 아들을 세상에 내보이셨다. 그때, 바로 그때 만물아비께서 나에게 그 창을 하사하셨지.”


러스가 으르렁거렸다.


“그 창은 실로 창이자 창이었다. 내가 들 정도로 거대한 창이었지. 황제께서 내리신 선물들이 그러하듯, 아주 잘 만들어졌고 아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그 창을 잡은 순간, 나는 그것이 단순한 창이 아님을 깨달았다.”


러스는 한 모금 더 들이키고서, 잔을 다시 채운 뒤, 말을 이었다.


“인류의 군주께서 나에게 그 창을 건넨 순간, 나는 그 창에 얽힌 불길한 한살매가 내 영혼에 스치는 것을 느꼈다. 거의 미소가 사라질 뻔했지. 영광스럽기 그지없어 미소를 짓지 않는 척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흡사 비꼬듯이 러스가 말을 내뱉었다.


“내 아버지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나는 아버지가 내 불안감을 눈치챘음을 드러내리라 여겼다. 아니면 불쾌해하시거나, 망설이는 기색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설령 알아차리셨더래도, 그런 반응은 전혀 없었다. 아무 말도 없으셨지. 솔직히, 창 자체보다 그것 때문에 더 골머리가 아팠다. 그분께서 내 마음의 요동을 알아차리지 못하실 리가 없으니까. 만약 느끼셨다 해도, 아무 말씀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셨지. 그저 그 창이, 할 바를 하도록 두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요동을 품고서, 페러스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페러스 바로 옆에 있는 내 구역으로 돌아왔지.”


“내 누각으로 돌아와서도, 그 창을 그냥 내려놓을 수 없었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니, 자랑스럽게 걸어 놓기는 했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부끄럽긴 하다만, 볼 엄두도, 만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 번도 전투에서 휘두른 바가 없지.”


다음 순간, 흐라픈켈은 천공이 얽히며 빚어낸 단단한 덩이와 충돌하며 격렬하게 뛰어올랐다. 러스의 말이 끊겼다. 술병이 뒤흔들리고, 게리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로 몇 개에서는 석탄이 튀겼다. 바닥에 나뒹군 석탄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주황빛으로 번뜩이며 짧은 호흡을 마쳤다.


엔진이 다시 울부짖으며 몇 번 높은 소리가 터졌다. 높낮이를 오가며, 늑대의 부르짖음보다도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는 조용해졌고, 다시 그들의 항해는 평탄해졌다. 러스는 여진이 함선을 뒤흔드는 것이 끝나기를 기다리고서 입을 다시 열었다.


“이 모든 일이 세라피나 V(Seraphina V)에서 벌어졌지. 그 성계에 가 본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야를이시여.”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절대 5번째 행성에는 가지 마라. 핌볼소머(Fimbolsommer)만큼이나 덥고, 매력은 그 이하니까. 그 전쟁은 세라피나 성계를 두고 벌어진 거였다. 성계와 별들을 놓고 벌인 싸움이었지. 이제 불의 바퀴는 텅 빈 채다.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까.”


“그날 늦은 밤이었다. 무더운 천막에서 혼자 퀴퀴한 묘드를 마시다 잠이 들었지. 만물아비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빚으셨는지 조금 배웠던 시절이었다. 만물아비께서는 변이를 겪지 않은 인간에게 있어 수면이 가지는 주요 기능이 뇌척수액 안의 손상된 단백질을 청소하고, 기억을 튼튼히 새기는 것이라 하셨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빚으신 프라이마크들의 경우, 이러한 요구가 다른 과정을 통해 충족된다. 이것 때문에, 나는 습관적인 것 이상으로 잠을 자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아무 의미 없이 잠을 잤다. 이례적인 일이었지. 역시 이례적이게도, 그날 꿈을 꿨다.”


러스의 침묵이 길게 드리웠다. 아마도, 묵시의 정점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누는 것의 가치와 위험을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였고, 크바는 인내심을 품고 기다렸다. 결국, 프라이마크는 다시 포도주를 비우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본 꿈은 이러했다. 크바, 무슨 뜻인지 풀어보거라. 나는 화염으로 정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량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고성능 촉진제가 풍기는 악취 때문에, 프로메슘으로 빚어진 파괴였음을 알아차렸지. 불탄 대지에서 뿜어지는 열기 때문에, 공습이 불과 몇 시간 전에 끝났음도 역시 깨달았다. 땅에서 김이 무럭무럭 뿜어지더구나. 짙은 회색과 보라색 연기구름이 하늘을 물들였다. 그 성계의 항성이 떠오르고, 전쟁의 자욱한 안개 아래로 빛이 기울어 보이더구나. 그 여파 위로 쏟아지는 녹아내린 빛이 구름 아래를 밝히며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왼손으로 눈을 가렸는데, 머리 위로 더 밝은 빛이 비췄다. 다음 순간, 나는 내 오른손에 황제의 창이 들려 있음을 보았다. 세상은 온통 어두웠고, 갑주는 연기와 오물로 물들여져 있었지. 모든 것이 더러워졌음에도, 오직 그 창만은 깨끗했다. 처음 무기장인의 손길이 윤기를 내었을 때만큼이나 말이다. 창은 내리쬐는 빛을 반사해 두 배로 되돌리며 더 찬란하게 빛났다.”


“그 대지에서, 그 창 외에 아름다움은 없었다. 살아남은 것은 전혀 없었지. 균일한 그을음이 모든 것의 표면을 뒤덮은 채 황금색 빛을 빨아들이더구나. 거의 초현실적일 만큼이나 대비되어 느껴졌다. 마치 정말 내가 거기 있는 것 같았지. 꿈은 현실이고, 내가 깨어날 세상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진실이었겠지요.”


크바가 답했다.


“다른 차원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희가 앉은 이 전당만큼이나 진실이었겠지요.”

“난 이것이 진실일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제국의 진리가 부정하는 바 아니더냐.”

“제국의 진리는 영 둔한 도구지요. ”


크바가 대꾸했다.


“가끔, 틀릴 때도 있습니다.”


크바의 말에 섞인 이단적인 개념도 러스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의 길을 빚어내는 이였기에.


“그러다가, 잿더미 사이에서 갑주 파편을 보았다. 도색은 불타버렸고, 세라마이트조차 변형되는 열기 속에서 보라색으로 변색한 채더구나. 내 발 가까이에 견갑이 놓여 있었는데, 아직 색깔이 좀 남아 있었지.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견갑을 집어 들 때 무엇을 볼 것인지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꿈의 논리는 나에게 몸을 굽혀 그 오물 사이에서 방호구를 집기를 강요하더구나. 솔직히, 다른 누군가가 행하는 것을 보는 일종의 구경꾼처럼 지켜봤을 뿐이다.”


“내 손의 힘이라면 그 세라마이트 조각을 부술 수도 있으리라 여겼고, 아주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그 반대편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타 있더구나. 하지만 예상대로, 으르렁대는 늑대의 머리가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갑주 조각을 떨어뜨렸지. 순식간에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세라마이트 조각이 바람에 날렸지. 다시, 꿈의 논리가 나를 일깨웠다. 바로 그때, 여기 널린 뼈들이 평범한 인류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레기오네스 아스타르테스의 뼈였다.”


“내 눈에 닿는 것만 해도, 족히 수백은 되었다. 수천까진 아니었던 것 같다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자세하게 눈에 비치더구나. 부서진 갑주, 시체 위에 널린 늑대 해골까지, 수없이 널려 있었다.”


러스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더 이상 그의 시선은 크바를 향하지 않았다. 오직, 기억 속에 남은 광경을 응시할 뿐.


“어떤 전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의 정체도 마찬가지고. 생각해 보면, 앞으로 닥쳐올 전장의 모습을 보인 것 같더구나.”


“구름 위로, 항성이 떠올랐다. 대지는 다시 어둠에 잠겼지. 나는 끔찍한 예감을 느꼈다. 검은 바람이 일었고, 죽은 이들의 재가 휘날려 내 얼굴에 소용돌이쳤다. 불에 탄 그들의 고기 맛이 느껴지더구나. 바람 속에서는 끔찍한 울부짖음이 들렸지.”

“늑대 울음소리는 이런 꿈에서 좋은 징조일 수도, 나쁜 징조일 수도 있습니다.”

크바가 답했다.


“여기서는 나쁜 징조였다.”


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가장 위대한 늑대 왕들의 울부짖음보다도 더 크고 끔찍한 소리였지. 두 번째 울부짖음이 첫 울부짖음에 합세해서 합창을 내지르더구나. 도전이자, 죽음의 징조였다.”


“검은 재로 빚어진 눈보라 속에서, 내가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제국의 나이트만큼이나 거대했다. 머리는 두 개였고, 불타는 것 같은 붉은 눈과 붉은 입을 가졌지. 놈이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놈이 나를 죽이러 왔음도 알았다. 모르카이가 아니면 그게 무엇이었겠느냐? 세상을 끝장내는 거대한 늑대 그 자체였지. 나는 창을 들고 전투를 준비했고, 놈은 나를 결코 실망하게 두지 않았다.”


“나는 모르카이와 길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천둥처럼 숨을 내쉬고, 벼락처럼 이빨이 빛나더군. 그 싸움에서의 나는 진노하는 폭풍우에 비길 수 있었다. 우리가 벌이는 전투 속에 대지가 뒤흔들리고, 하늘이 들끓었다. 내가 일격을 날릴 때마다 화염이 내리꽂혔다. 놈의 눈은 타오르고, 입은 쩍 벌린 채였지만, 놈은 나를 전혀 맞히지 못했다. 나는 그런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크바. 창, 그리고 죽음과 함께 춤을 추었단 말이다!”

“늑대에게 상처를 입히셨습니까, 주군?”


러스는 술병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텅 비어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러스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병을 내려둔 러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놈을 여러 번 때렸다. 하지만 이 창 앞에서 그 몸뚱이가 마치 연기처럼 갈라지더구나. 그래, 나는 놈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한번은, 창날을 휘둘러 놈의 머리 사이를 쪼개버렸지.”


러스는 한 손을 마치 창날처럼 다른 손에 부딪혀 보였다.


“하지만 놈은 다시 형체를 빚어내고서 나를 다시금 공격하더구나. 나는 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육신이 아니기에 그러했겠지요. 그 늑대는 죽음의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결코 죽일 수 없겠지요.”


크바가 대꾸했다.


“그래서,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내가 이겼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만.”

“모르카이와 맞서서 살아남을 길은 오직 하나, 그를 이기는 것뿐입니다.”

“나는 놈을 이기지 않았다. 내가 깨어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놈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고, 깨어나 보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더구나. 망칫골(Hammerhold)의 대장간만큼이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지. 깨고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호루스가 다음 원정에 관해 이야기하러 왔으니까. 아마 그가 와서, 내가 깬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죽어 있을지도 모르지. 호루스는 내가 잠든 꼴을 찾은 것을 재미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해할 법한 말을 늘어놓았지. 하지만 꿈이 다 깨고 나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어라 하였습니까?”

“호루스는 황제께서 하사한 선물을 보고 ‘좋은 창이군.’이라고 했다.”

“그렇군요.”

“솔직히 그는 나를 좋아한 적이 없다.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러스가 대꾸했다.


“물론 나를 항상 존중했고, 나에게서 최선을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질투했지. 나는 두 번째로 발견된 아들이었으니까. 내가 돌아온 순간, 아버지의 빛을 나에게 빼앗겼다고 여겼을 거다.”

“장남들이 가지는 문제지요.”

“그렇지. 우리가 셋째 형제를 찾았을 때-”


흐라픈켈이 파멸풍이 소멸하며 남긴 또 다른 돌풍을 타고 넘었다. 흔들림 속에서, 드문드문 놓여 있던 가구들이 돌 위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술병이 탁자 끄트머리까지 춤을 추었다. 러스의 말이 묻혀버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버렸지. 그리고 나서, 페러스가 돌아왔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지. 아마 호루스는 나를 돌보며 제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익힌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을 대할 때는, 내가 돌아오고 처음 몇 달 동안 보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기이한 일이지. 사실, 호루스와 나 사이의 관계에만 있는 일종의 기이한 유대감이라는 게 있다. 내가 그의 세상을 바꿔버렸으니까.”


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너무 자부심이 넘쳤지.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스무 명 중의 한 명이었고, 다른 형제들도 돌아오리라고 항상 생각했으니까.”


러스의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내가 그처럼 처음 발견된 이였다면, 그런 종류의 질투를 했을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나는 가장 총애받는 아들이라는 그의 지위를 부러워한 적이 없다. 그가 워마스터 자리에 올랐을 때, 나는 한 마디도 불평한 바 없다. 나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저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지. 솔직히, 그가 질투하는 꼴이 좀스러워 보일 때도 있었다.”

“주군께서는 호루스가 아니시지요.”


크바가 말했고, 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흐라픈켈이 공감하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슨 뜻이냐, 크바? 그 꿈이 의미하는 바는?”

“주군께서는 황제의 창을 휘두르며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크바는 주저함 없이 내뱉었다. 소화하기 어려운 진실을 모호하게 둘러대거나, 거짓을 보태 알랑거릴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블카 펜리카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러스 역시, 같은 정신으로 크바의 선언을 받아들였다.


“내 생각이 맞았군.”


러스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창을 직시했다.


“아무래도 기밀실 밖으로 던져버려야겠다. 저걸 없애버리면, 내 한살매를 바꿀 수도 있겠지.”

“정말 그러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크바가 대꾸했다.


“누구도 자신의 한살매를 바꿀 수 없습니다. 주군조차도 말입니다.”

“네 말이 맞다.”


러스가 대답했다.


“내가 이 창을, 그리고 이 창이 보여준 운명을 아주 싫어하는 데는 변함이 없지. 하지만 이 창은 중요하다. 절대 없애버릴 수도 없지. 이미 시도했다. 뭐, 아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무기를 잃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더냐? 나는 이미 많은 무기를 잃어버렸지 않더냐! 하지만 이 창을 어딘가에 둘 때마다, 항상 나에게 돌아온다. 아마 별의 심장에 던져도 마찬가지로 돌아올 것 같다만, 그러다 정말 잃을까봐 시도도 못 할 뿐이다. 아마, 여기서 모순이 보이겠지.”


러스가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내 삶의 타래를 끊을 물건이라 해도, 나는 이 창을 지켜야 할 운명이다.”


러스는 크바의 눈을 직시했다.


“어쩌면 불길한 한살매가 아니라, 거짓 한살매일지도 모르지.”


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신할 수가 없다. 룬은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더군. 지금 나는 다른 형제를 죽이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데, 그게 옳은 행동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크바, 두 세계에 속한 이가, 제 한살매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더냐?”

“누구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크바가 대답했다.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러스가 옥좌에 깊이 눌러앉았다.


“그렇게 말할 것이 두려웠다.”



어제 잘린 거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