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II

창백한 말


[이닉스 행성; 현재]

모타리온은 티폰의 누렇게 뜬 얼굴 위로 겹겹이 쌓인 가면을 걷어내어 어린 시절의 옛 친구를 찾으려는 듯, 굳은 눈빛으로 티폰을 노려보았다. 변해가는 세월과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파묻힌다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을테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흐려져서 가늠하기 힘겨워진다.


'티폰을 아직도 믿고있는걸까?' 프라이마크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의문이 기어나왔다. '믿음일까, 아니면 그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랜 연대감일까?'


이 의문에 답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자신이 없는 동안 티폰이 변했다는 것뿐. 무언가가 그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험에 든걸까. 저 초췌한 얼굴이나 번뜩이는 근심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모타리온이 테라를 침공할 날에 곁에 두고 싶은 전사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아버지”라 부르던 존재의 본거지를 습격하려 했던 쓰라린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그 치욕적인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제는 데스 가드가 완전히 단결하고, 현명한 티폰이 자신의 곁에 있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해내리라!' 그는 이 말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자신의 감정의 힘에 순간 놀란 모타리온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감정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흐르고 있었고, 요즘처럼 떠오르는 일은 드문 상황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마치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침묵을 억누르듯이 낫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알아차렸다.


티폰은 다가오며 한 주먹을 가슴에 얹는 옛 경례를 올렸다. “전하, 청을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전하의 벗이자 전우로서 부탁합니다.”


“말해보거라.” 모타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전하의 지휘선 녹심에 관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행성을 떠난다면 전하께서 인내 호로 돌아가서 녹심을 기함과 정박시키고 함대를 이끄시겠죠.”


“그게 내가 하려는 바다.”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대신 녹심을 제 전함으로 데려와서 테라에 군기를 꽂을 영예를 주십시오.” 모타리온이 아까 전부터 꺼리던 행동이었건만, 그럼에도 티폰은 머리를 조아렸다. “제 소함대와 나머지 함대 사이에 생긴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목적을 위한 단결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프라이마크에게 떠오른 첫 본능은 1중대장의 간청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티폰의 테르미누스 에스트처럼 훌륭하고 강력한 함선이라도, 사신이 다른 장교의 함선에서 지휘하는 건 관례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전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소함대가 떠난 사이 모타리온은 전사들 사이서 올라오는 원성을 엿듣고, 분쟁의 씨앗이 심어지는 것을 보았기에. 특히 이 중요한 시점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군단 내부의 분열에 대한 소문을 입에 올리는 자는 거의 없었지만, 널리 퍼져 있었다. 반역파와 충성파를 막론하고 양쪽의 전사들이 지휘관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반대편과 동맹을 맺으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이젠슈타인 호에서 벌어진 7중대의 전투중대장 가로와 그의 부하가 모타리온을 배신했을 때 느꼈던 분노와 후회가 뒤섞인 감정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단결이 필요하고, 티폰의 독특한 제안도 타당했다. '관례야 무시해도 돼.' 모타리온은 생각했다. '일단 의미를 전하는 게 먼저야.'


“좋다.” 사신이 말했다. “나와 함께 테라의 방어선을 부수고 내 아비의 수비대를 굴복시키자꾸나. 황혼이 드리운다면 놈들의 공포도 더욱 커지겠지.”


티폰은 번득이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 될 겁니다.”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행성을 멸하는 작업이 완수되었다고 선언되었다.


이닉스는 황량한 무덤으로 전락했다. 워마스터에게 반기를 든 행성을 파괴하라는 명령은 이렇게 끝이 났다. 


어쩌면, 마지막 평결을 내리기 위해 투입된 마지막 데스 가드 정찰병들이 고궤도에 있는 순양전함과 함대로 돌아가는 경로를 자세히 살펴봤다면 요동치는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생존자는 아니다. 저 밑에는 모두가 죽었으니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는 있었다. 썩어가는 시체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부패한 유해들을 되살리는 무언가가, 생명을 기괴하게 흉내 내며 끊임없이 먹어 치우는 무언가가. 기어 다니며 울어대는 흑철빛 무리가.


이런 것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셀 수 없이 터져 나가는 화산의 불길이 비추는 행성의 희뿌연 밤하늘 위로, 데스 가드의 함선들이 전개 진형을 이루며 나아갔다. 스톰버드와 썬더호크가 모여들고, 이닉스의 위성 방어 포대를 폭격하던 근거리 함선도 돌아오자 하나씩 방향을 틀어 멸망한 세계를 뒤로 하며 떠났다.


거대한 플라즈마 추진기의 배기구가 타오르며, 함선들은 행성계의 질량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워프에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도록 높이 떠올라 가장 가까운 만데빌 지점을 향해 공간을 확보했다.


함대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 녹심은 착륙 날개를 펼친 채 함선 사이를 헤쳐 나갔다. 모타리온에게 이 순간은 프라이마크 형제들의 지휘선을 요란하게 장식한 전투 깃발, 레이저 문양과 고상한 영예심과 그나마 가까운 때였다. 그런 것들은 의미 없고 허황된 사치요, 데스 가드의 엄중한 성격에 걸맞지 않는 것들이다. 함선의 모습과 누가 타고 있는지 아는 것 만으로도 이 군단의 투지를 일으킬 수 있었다.


녹심인내의 뱃전을 지나자, 함선의 조타수가 경례를 하고 양익(陽翼)을 내려 전함의 평소 정박지였던 중앙 관제탑 뒤편으로부터 물러났다. 함선이 계속해서 다가오고, 다른 모든 대함선의 승무원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 불굴의 의지, 죽음의 망령부터, 불멸, 사신의 낫, 기백 모두 포탑의 포를 들어올리고 대형 레이저 포의 렌즈를 드러내며 전쟁 준비를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모타리온의 전투 바지선이 테르미누스 에스트에 접근했다.


프라이마크의 전함의 크기와 전투력도 맞먹는 1중대장의 함선은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독특한 생김새의 주력함은 갈라진 커다란 뱃머리부터 중포탑의 복잡한 구조까지, 압도적인 기운을 발했다. 이 섬뜩한 함선의 갑판이 열리고는, 품에 안듯 녹심을 받아들였다.


프라이마크가 테르미누스 에스트의 거대한 주 착륙장에 첫발을 내딛자, 광활한 공간에 발걸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회답하듯 흉갑에 주먹을 부딪치는 우레와 같은 무수한 군단원들의 경례 소리가 모타리온을 맞이하였다. 티폰의 정예 전사들인 그레이브 워든들도 사신과 1중대장을 맞이하려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신은 티폰의 신임을 받는 부지휘관 하드라불루스 비오스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비오스와 다른 이들도 저들의 지휘관처럼 칙칙하고 초췌해 보였으나, 이곳의 조명때문에 그렇게 보일것이라.


모타리온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함대 전체에 방송 요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승선하는 장면이 모든 함선에 전송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잠시 멈춰 서서 착륙장을 바라본 다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티폰은 테르미누스 에스트의 함교에서 워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최종 명령을 보류했다. 그는 프라이마크에게 손을 내밀며, 머리 위 거대한 방호 유리 너머 시커먼 우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신다면 온 군단이 따르겠습니다.” 티폰이 말했다.


거대한 낫자루가 내리쳐지자 침묵의 쇳소리가 온 갑판에 울려 퍼지고, 모타리온은 빈 손으로 어둠 속을 가리켰다. “출정하라.” 그가 외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이 태어나리라.” 티폰이 읊조렸다. 전함의 현실 왜곡 추진기가 임계 추진력까지 회전하며 통곡 해댔다.


함교를 가로지르는 창문에서 장벽이 펼쳐져 비물체 보호막인 함선의 갤러 필드와 함께 정신을 부수는 비물질계의 광기를 가렸다. 그 어떤 생명체도 다른 영역의 광기를 잠시라도 들여다볼 수 없으며, 그곳에서 본 광경에 정신이 얼어붙는다고 전해져 내려왔었다.


하지만 모타리온은 그곳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악마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고, 자신이 만든 족쇄에 묶인 한 악마도 있기에 이들의 기원에 대한 암담한 공포는 사신을 위협할 수 없었다. 모타리온은 손을 뻗어 제어장치를 만지고는, 경고음이 울리는 시계장치와 공포에 방황하는 티폰의 승무원들을 무시한 채 마지막 차폐막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열었다.


워프가 시공간을 찢어 가르며 눈 앞에서 벌어졌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심연의 아가리가 함선을 집어 삼키고, 테르미누스 에스트는 그렇게 처음으로 경계를 넘어 비현실 세계로 진입했다. 모타리온은 주절대는 인간 노예와, 결례를 저질러 그레이브 워든에게 목이 꺾이는 소리도 무시한 채 차폐막을 열어 두었다. 사신은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들에 대항하듯 천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두가 현실의 얄팍한 막을 뚫자, 사신은 마침내 스위치를 놓아 차폐막을 닫았다. 그의 창백한 입술에 미소에 가까운 무언가가 번져왔다.


하지만 다음 숨을 들이마시자 재가 입 안에 가득 들이찼다.


프라이마크의 거대한 폐가 반사적으로 경련하면서 갈비뼈가 조여지자, 고통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질식하고 있었다.


모타리온은 목을 움켜쥐었다. 통제할 수 없는 근육이 발작을 일으키며, 숨을 쉬는 행위는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렸으니. 숨을 겨우 몰아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말없이 쓰러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지?'


모타리온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초인 중 한 명으로, 경이로운 무용을 뽐내는 전쟁의 반신이다. 그 무엇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자신의 숨통을 조일 수 없다.


프라이마크는 주위를 둘러보니 함교에 있는 모두가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갑주의 목 보호대를 긁어대는 모라그에, 당황해서 굳어버린 데스슈라우드들과, 바로 옆에는 질식으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는 승무원들까지. 1중대장 티폰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공을 보고 있었다.


모타리온은 온 힘을 다해 말을 해보려 했지만, 목구멍과 폐를 가득 메운 잿가루의 거칠고 답답한 감촉만 느껴질 뿐–


그러자 갑자기 한 기억이 터져 들어왔다.


'이 느낌 알아...'


모타리온은 과거에 이런 공포를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과거에 깊이 파묻어 잊으려 했건만, 지금 이 순간에 참혹히 되살아났다.


눈 앞에 멍든 취옥 같은 메스꺼운 색조가 드리워지며 흐려진다. 모타리온은 닫힌 차폐막과 그 너머에 가려진 공포를 노려보았다.


워프다. 부정할 수 없는 본능이, 요술에 대한 뼛속 깊은 증오가 그렇게 말해왔다. 저 밖의 무언가가 이런 짓을 부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그에게 기억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