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깨어나려 해 봐도 사방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깨트릴 수 없는 완전한 어둠뿐이었다. 사실, 방향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 공간은 그저 무한한 것만 같았으니. 위아래가 어딘지에 대한 감각도,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도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걸까?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안개 낀 듯 흐릿했다. 한때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것과, 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이고, 태어나게 하고, 또 꺼트릴 수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났지만 지금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영원한 죽음의 어둠뿐이었다.
아니, 죽음이 아니군. 잠인가? 아니면 감금인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곤 오직, 만약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기억일까 아니면 환각일까?
스스로를 여성이라 인식하고 있기는 했지만, 별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순전한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에게 성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정신은 어둠 속을 배회했지만, 이것이 이 은하계의 너비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겨우 수 밀리미터 밖에는 움직이지 못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여행한 시간은 겨우 한 순간일 뿐일까, 아니면 이 우주의 수명 정도였을까?
생각에 떠오른 차원들은 대부분 의미를 갖지 못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그조차도 모두 평등하게 우스꽝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이곳에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할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무 것도.
하지만 그건 늘 진실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던가?
이따금씩 그곳에는 빛이 있었다. 눈치채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어둠 속의 작은 불씨들이. 자신의 존재 요소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무언가가, 별만한 크기의 생명을 깎아 나온 존재의 원자들로부터 이따금씩 빛의 구멍들이 어둠 속에 나타나곤 했지만, 그것들이 불러 온 어둠 너머의 세상에 대한 징조 외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빛 하나에 집중하려 해 보았지만, 그 빛은 존재를 눈치채기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오직 그 빛이 다시 되돌아오리라는 감질나는 희망만이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닌, 잊혀진 옛 과학의 기술들 덕분에 소멸의 위기에서 버티고 있는 순수한 존재였다.
달리아.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간신히 들리는 그 작은 속삭임은 어쩌면 그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다.
달리아.
그 단어가 의미에 형상을 주고, 소리를 통해 무게가 실린 개념들을 통해 규모 감각과 공간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변 세상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자아에 대한 감각이 재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리아.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었다.
자신은 인간이었다... 시간과 물질 우주를 거스르는 힘을 지닌, 상상조차 불가능한 크기의 괴물이 아니라. 사실, 괴물이라는 단어가 이 존재의 거대함을 내포할 정도로 큼직한 단어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자신은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무장한 간수에게 붙들려 황금 사슬에 묶인, 빛 한 점 없는 세상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진 죄수가 아니었다.
자신은 달리아 시세라였다.
그것을 떠올림과 동시에, 달리아는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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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정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달됐다. 수조 킬로미터 길이의 전선을 통해서도, 광섬유를 통해서도, 지직대는 전기장 구름을 통해서도, 또는 무선 네트워크나 홀로리스 전선관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공장들이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고대의 기술들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불명이어서, 그것들을 이용하는 마고스들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보 전송 수단들 중 거의 대부분은, 화성의 고요한 밤 사이 올림푸스산 깊숙한 심연으로부터 끓어 넘쳐 나온 스크랩코드의 오염적 영향력에 취약한 것들이었다.
스크랩코드는 정보의 냄새와 흐름에 이끌려,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맹금처럼 뛰쳐나갔다. 그것이 닿는 것마다 오염되어, 우아하게 제작된 코드들이 무언가 불결하고도 천박한 것으로 뒤틀려 버렸다. 순수한 기계어로 깜빡이며 재잘대던 경이로운 성가들과, 쏴 하고 흐르던 액체성 정보들, 정보로 가득했던 환한 빛들이, 무언가 일그러지고 사악한 것이 내지르는 혐오스런 탄생의 비명소리로 변모했다.
스크랩코드는 생각의 속도로 행성 지표면을 따라 퍼져 나가, 화성 공장들의 네트워크에 암살자처럼 침투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지스 방화벽들이 막아내려 시도했지만, 곧 그 맹렬함과 악마적 창의력에 순식간에 압도되어 무너져 내렸다.
소수의, 아주 소수의 포지마스터들만이 위험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스스로를 네트워크에서 차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화성의 정보 교환 시스템들에 너무도 깊이 얽혀 있던 탓에, 스크랩코드에 노출되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가 복제한 스크랩코드가 각 공장의 약점을 찾아낼 때마다 재앙적인 시스템 장애를 일으켰다.
시누스 사바이우스에서는 대륙 규모의 리만 러스 전차 조립 라인들이 정지해 버렸고, 한 세기가 넘도록 중단 없이 작동하던 기계들이 정지해 두 번 다시 작동시킬 수 없게 되었다.
티코 브라헤 탄약저장시설-Tycho Brahe ammunition storage facility에서는 일련의 명령어들이 침입해 들어와 프로메슘 탱크들 내부의 온도를 상승시킨 탓에, 대폭발이 일어나 저장시설 하층부를 날려 버렸다. 액체성 화염이 크레이터에서부터 뿜어져 올라와 시설 전체를 집어삼키는 대화재를 일으켰고, 그 여파로 수십억 톤의 군수품이 유폭을 일으킨 것은 물론, 이아이고 하이 아뎁트-High Adept Iaigo의 자산들까지도 소멸시켜 버렸다.
아키달리아 평원-Acidalia Planitia의 거대한 스키아파렐리 저장소-Schiaparelli Repository 역시 스크랩코드에 감염됐다. 인류가 과학을 정복한 그 초창기까지도 유래하는 잠금 해제된 데이터들과, 수 세기에 걸쳐 수집된 지혜들이 저장된 드높은 피라미드가 감염되고, 자그마치 2만년 분량의 지식이 그저 울부짖기만 할 뿐인 헛소리들로 바뀌었다.
스크랩코드가 명령을 내리고 순식간에 철회하기를 반복하면서 비상벨과 정정 뿔나팔이 시끄럽게 울렸으며, 화성의 공장들은 그 경이로운 구조에 가해진 피해에 비명을 질렀다. 기계들도 내부 구조를 따라 흐르는 악성 전류에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악성 전류에 터져 나간 회로들과 바싹 튀겨진 섬세한 메커니즘들은 두 번 다시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화성에서 스크랩코드로부터 안전한 곳은 거의 없었다. 스크랩코드는 점차 조여드는 악의의 그물을 당겨 전 행성을 포위하며, 점점 더 힘과 가속도를 붙여 갔다.
바스티타스 보레알리스-Vastitas Borealis의 화학물질 정제소들에서는 압력 밸브들이 열린 탓에, 메틸 이소시아네이트*와 포스겐**, 그리고 염화수소*** 혼합물이 북극 유역에 존재하는 노동자 하이브 빈민가로 밀려 들었다. 치사성 구름이 천천히 빈민가로 스며들어, 지나가는 자리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침 동이 틀 무렵, 사망자의 수는 9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역주: Methyl isocyanate. 농약의 원료로 쓰인다.
**역주: Phosgene. 수포작용제 등의 화학 무기에 쓰인다.
***역주: Hydrogen chloride. 이걸 물에 녹이면 염산이 된다.
마치 이 살해법을 즐기기라도 한 듯, 스크랩코드는 곧바로 메두사 수로-Medusa Fossae의 아스트로패스들을 살육했다. 생명 유지 장치의 호흡 물질 혼합물을 바꿔치기해, 모든 사이커들이 시안화수소* 가스를 들이마시게 한 것이다. 단 몇 분만에 6천명이 넘는 아스트로패스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단 한 번, 구슬픈 단말마 소리가 테라 지하에 있는 황제의 지하고에까지 닿은 이후로, 화성은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
*역주: Hydrogen cyanide. 이걸 물에 녹이면 청산가리 할 때의 그 청산.
지나치게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끊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행운아들 중에는 이플루비엔 맥시멀 역시 끼어 있었지만, 율리시스 수로를 따라 위치한 맥시멀의 핵융합로들 중 세 대는 치명적인 노심 융용 현상을 일으켰고, 융용된 핵융합로들이 폭발하면서 일은 버섯 구름은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며, 화성의 대지 수천 평방 킬로미터를 영구적인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버렸다.
화성의 대지 전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모순되는 명령들로 내부 기능이 과부하된 기계들이 고장을 일으켰다. 공장들이 폭발하고, 독성 화학물질들이 제조소들과 대량 저장시설들로 퍼지면서, 사망자의 수는 단 몇 분만에 수백만 대로 치솟았다. 저장시설의 폭발 물질들이 과열되며 엄청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수 년이 지난 뒤 이날 밤은 순결의 죽음-Death of Innocence라 일컬어지게 되리라.
오직 코리엘 제스 아뎁트의 공장만이 피해를 받지 않고 넘어갔다. 지직거리는 스크랩코드의 노도도, 최근에 황제의 빛이 따라 흘렀던 번쩍이는 황금 전선을 따라서는 이동하고자 하지 않았고, 또 이동할 수도 없었다. 마치 쇳가루가 동일한 극성을 지닌 자석 주위를 피해가듯, 스크랩코드는 마그마 시티를 우회해 지나갔다.
칠흑같이 암울했을 밤에 비친 단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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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코드의 악명높은 순간을 보게되다니.. 이런거 보면 만년 후에 어떻게든 화성 복구한게 대단함
티코 브라헤도 이름 남아있네, 이순신도 언급되고 40k에도 테슬라 이름 나오고 깨알같네
타이코가 아니라 티코였구만. ㄳㄳ
이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Magma City에서 City는 '~시'라는 행정구역상 명칭이라기보단 Kansas City나 City of London처럼 그냥 특정 지명인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봄. 서울시 = Seoul이지 Seoul City가 아닌 것처럼 훌륭한 번역 항상 잘 보고 있음. 메카니쿰도 자기만의 매력이 충분한데 헤러시 소설에서 살짝 겉도는 모습을 보면 참 아쉽다
안 그래도 처음에 그냥 마그마 시티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그마시로 한 거였는데, 계속 써 보다가 좀 어색하다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싹 갈아 엎으려고 함 ㅇㅇ. 좋은 어드바이스에 감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