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나이다."

"비록 형편이 좋지 않지만 제일 상태가 좋은 것들로
추렸으니 부디 받아주시지요."

덜커덕. 마린의 발 앞에 묵직한 군용 상자가 놓여졌다.
마린이 상자를 여니 수통과 밀폐용기, 레이션이 보였다.

수통과 용기는 곳곳에 흠집과 패인 흔적이 가득했고,
레이션은 유통기한이 임박했다. 몇개는 포장이 손상되
곰팡이가 슬기까지 했다.

수통과 용기의 마개 틈새로부터 느껴지는 정화용 약품
의 냄새. 마린은 약품을 써야만 정수 공급이 가능한 이곳
의 형편을 떠올리며 병사를 내려봤다.

군복은 기운 흔적과 얼룩으로 넝마가 되기 직전이었다.
장비한 방호장구도 플랙 아머와 카라페이스 아머로 중구
난방이었으며, 라스건의 패턴도 제각각이었다.

마린의 앞에 선 병사를 필두로 한 저들의 눈빛이 시체
황제를 향한 충성심과 수호의 사명감으로 불타지 않았
노라면 잘 무장한 네크로문다 갱이라 생각할 터였다.

위이잉-! 위이잉-! 위이잉-!

사방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시야 구석에선 남루한 차림의
행성방위군 병사들이 낡은 상자나 구닥다리 포와 트랙터
엔진으로 만든 조잡한 전차와 분주히 움직였다.

마린과 그의 일행,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련의
PSF 병사들이 서 있는 비행장만이 정적을 유지했다.
마린은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마린의 눈 앞에 선 병사도 어떠한 기류를 읽었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마린은 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 상황이 됐는지
찬찬이 떠올렸다.

마린과 그의 일행은 적대 워밴드의 포위를 피해 EoT
밖으로 도망쳤다. 워프 균열을 지나는 함선 잔해에 몸을
싣고 줄행랑을 쳤다.

죽음의 위험을 피한 그들을 맞이한 건 함선 잔해에서
고철을 뜯어 생계를 유지하는 제국 행정지의 최외곽 행성.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방치되어 자력갱생만이 답이었다.

마린과 그 일행은 조용히 우주선을 노획하고 살 길을 찾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볼터탄을 아끼기 위해 칼을 든 탓이었을까.
어처구니 없게도 은신을 들켜 죽음의 천사로 추앙받은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우릴 가여이 여기시어 천사를 내려주셨다!"
라고.

그들은 행성에 내려진 희망으로서 여겨졌다. 천사의 헬멧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고, 마린은 적당히
교관과 성직자 행세를 하며 거주민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게 우주선과 식량을 받아 생존을 위한 여정길에
오르기 직전에 다다랐다. 마침 오크들의 침공도 확인되어
더욱 조용히 빠져갈수 있다.

"...이번에도 오크인가?"

"그렇습니다, 천사님."

마린의 앞에 선 병사가 대답했다. 그의 두 다리는 굳건했고
두 눈은 사명감으로 불타올랐지만 현실은 의지만으로 되진
않는 법이다.

PDF와 부대끼며 오크의 공세를 한번 막아낸 마린은 이번
공세가 행성의 운명을 좌우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
들에게 이 행성은 금싸라기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린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비행장 주변엔 어느새 피난민
행렬과 그들을 태우려는 우주선들이 들어차 있었다. 행성을
잃을지언정 사람은 살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들은 오크를 막아낼 수 없다.
고철이 가득해 군침도는 행성이 쌈박질까지
좀 친다고 소문이 났을 것이다.

마린과 병사 모두 비루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마린은 파워 아머를 갖추고 있었지만 병사는 그렇지 않았다.
마린에겐 볼터가 있지만 병사에겐 불법 복제한 라스건 뿐이다.
마린은 초인이지만 병사는 일개 필멸자였다.

하지만, 병사는 그곳에 있었다.

마린이 도망치려할때 병사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지켰다.
마린은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병사는 의연히 죽음과 마주했다.

마린은 충성심을 버렸지만 병사는 그렇지 않았다.


눈 앞의 병사와 동료들은 "더 중요한 곳으로의 부름을 받았다."
라는 마린의 허울좋은 거짓말에도 성호를 그으며 방문에 감사했고,
또 앞날의 여정에 무탈함을 기원했다.

마린은 줄곧 도망쳤었다.
제국에서 EoT로. EoT에서 다시 제국으로. 그 다음은 어디로
갈지 마린의 일행은 물론이요, 그 자신도 몰랐다.

마린이 주먹을 꽈악 쥐고, 어금니가 금이 갈 정도로 씹었다.
아주 오랜만에 이목구비가 박힌 살덩이에서 치아가 부서지는
감각을 느꼈다.

인류를 위한답시고 궐기했던 그 기억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네놈들은 아둔하다."

"여기는 제국의 최외곽이다. 네놈들의 가족을 받아줄 만큼
인심이 넘치고 형편이 좋은 행성은 없단 말이다."

"네놈들이 걸친 보호구와 어깨에 멘 총기가 얼마나 조잡하든,
그것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시간을 번다는 미사어구로 포장된, 진흙탕처럼 끈적하지
마다 않는 죽음을 향한 배를 젓는 노가 아니다."

"네놈들은 가족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얼굴도 모르는
이웃에게 맡길 셈인가?"

마린이 그의 일행을 되돌아보고, 허리춤에 메두었던 볼터를
들었다. 줄곧 중요한 일을 위해 아껴야 한다고 쓰지 않았던
무기를 들자 눈 앞에 선 병사의 눈에 활기가 어렸다.

마린의 일행들도 저마다의 무기를 빼들었다. 조잡하게 엮은
콤비 볼터, 날이 다 빠진 체인 액스 등 PDF 병사들의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것과 같은 목적을 방금 지녔다.

마린은 좌중을 둘러봤다. 결연한 사명감으로 애써 감춰둔
두려움과 막연한 절망감이 병사들의 눈으로부터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개중 몇몇은 총을 부여잡고 허리를 곧게 폈다.

"...천사님들께선 부름을 받았다 하지 않으셨나이까?"

눈 앞에 선 병사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지금 상황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아스타르테스가 함께한다는 막연한 기대함
을 억누르고 있었다.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나 자신으로부터의."

마린은 침인지 산성액인지 모를 액체를 살덩이 속에 뚫린
식도 역할의 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침을 삼키는 행동을
따라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각오를 다지고 싶었다.


"총원, 무기를 들고 태세를 갖춰라. 전투 위치로."


마린이 조용히, 하지만 굳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