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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는 백돌을 두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꽤 오랫동안 궁리하고 둔 수였다. 해야 될 선택지는 많았고 처리해야할 돌도 많았다. 그것들은 어지러이 판에 늘어져 있었다. 

 상대편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법이지.”

 “그런가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왜 그런지 밝혀지길 기다렸다. 

 “그렇고말고,” 그는 손을 뻗어 넓은 정사각형의 판에다 반격하는 형세의 돌을 두었다. 그녀는 그로인한 결과를 눈에 익혔다. 매우 냉철한 수였다. 판에 낙오된 일리야의 신장 모양의 세를 거의 포위하는 위치에 착점했다. 그녀는 이를 두고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한 교훈은 간단했다. 상대와 맞서 싸우던가, 빈 땅을 찾아 세를 넓이던가. 이 양자택일은 앞으로 익숙해 져야할 선택이었다. 


 “가능한 수를 제때 찾는 게 아직은 좀 어렵습니다.” 그녀는 조금 툴툴거렸다.

 “그게 바로 묘미라네, 하지만 자네도 점점 나이지고 있어.”

 일리아는 혹여나 자신을 비꼬는 건 아닌지 상대편을 흘끗 한 번 바라봤다. 


 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읽기가 어려웠다. 자가타이 칸은 가죽과 털로 만들어진 안락의자에 팔다리를 죽 피고 앉았다. 얼굴의 웅숭깊음은 오래된 수석을 보는 듯 했다. 

 일리아는 울라노르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예수게이가 경고해 주었음에도 거의 까무러칠 뻔 했다. 듣기로는 프라이마크들의 육체에 내재된 영혼의 힘 때문에, 가끔씩 그런 현상이 그들 주위에서 벌어진다고 한다. 또 다른 말로는 그녀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을 받아들이도록 진화할 수 없어서 그렇단 얘기도 들렸다. 이 현상은 이미 문서화되어 있는 증상들이다. 메스꺼움, 가벼운 두통, 공황 상태 등.


 그래도 고비는 어느 정도 지나갔다. 프라이마크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편한 일이 아니었다. 결코 편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견딜 만한 수준까지 왔다. 간간히 느껴지는 복통은 이미 익숙해졌다. 둘 사이에 나누는 대화는 한담을 할 정도로 약간은 가까워졌다. 가끔은 겸상으로 술잔을 기울였고, 같이 놀이를 즐겼다.


 “정말 나아지긴 한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돌을 들어 어디다 둘지 고민했다. “생각해 보건데, 전하께서는 맞상대를 찾고 계신 거 같군요.” 

 “친 사와 자주 뒀네.”

 “전하를 이긴 적이 있던가요?” 그녀가 물어봤다.

 “그는 꽤 잘 두는 편이지.”

 “그러지 못 했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프라이마크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단순히 그 거구뿐만이 아니라, 그녀 보다 거의 두 배는 더 큰 그 남자에겐 피할 수 없는 위화감이 도사렸다.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 장엄했다. 


 칸은 군살 없는 몸에, 팔다리가 훤칠했으며, 사냥새의 발톱처럼 혹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말수가 적었지만, 말할 때면 그 어투는 점잖았으며, 고풍스런 어법이 묻어나왔다. 얼굴은 길쭉했고, 윤기 나는 머리칼은 다른 초고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검고 길었다. 왼쪽 뺨엔 흉터가 눈에 띠었는데 지그재그 모양의 오래된 상처였다. 레기오네스들이 그를 따라 흉터를 낼 때 일부러 칼에 독을 바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초인적인 회복력으로 인해 보통 상처로는 흉터 없이 너무 완벽히 낫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옷매무새에 매우 큰 신경을 기울였다. 그의 망토는 하얀색 털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와 절친한 초고리스인들은 이를 엠예트라 불렀다. 그가 입는 카프탄은 짙은 자홍색의 비단으로 짜낸 것이다. 몸 곳곳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즐비했다. 손가락의 마디엔 황금색 가락지와 목에는 금제 고리가 둘러졌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틀어 올린 상투도 마찬가지로 금으로 만들어졌다. 


 아무리 갑옷을 입지 않았어도 그의 풍채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옷의 주름에도 옷 아래의 훈련 받은 전사의 근육질 몸이 여실 없이 드러났다.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 이를테면 친유아 포도주에 손을 뻗거나, 돌을 두거나 하는 움직임에는 검사 특유의 신중함이 어려 있었다. 


 할자이가 그녀에게 여러 번 얘기한 말이 있었다. “어느 것도 쉬이 내버리지 말라.”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툴와르 검으로 허공을 갈라 그녀 앞에 가져다 대면서 이를 증명했다. “모든 동세엔 그엔 맞는 근육을 움직여야 하오. 여기엔 과장도 없고, 남에게 보일 맵시도 없소. 오직 원칙만이 있을 뿐.”

 칸은 이 원칙을 완벽히 이행하는 듯 했다. 

 “조언이라도 한마디 듣길 원하나?” 그가 물었다.

 일리아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칸은 자신의 커다란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주위의 불빛이 촛불의 잔잔한 움직임에 춤을 췄다. 프로스페로의 은제 하프가 만들어내는 은은한 선율이 연주되었다. 칸은 음악을 좋아했다. 마그누스와 함께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레지사이드 해본 적 있겠지?”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의 정교함 면에선 바둑에는 한참 모자라네,” 칸이 말했다. “레지사이드에선 단 하나의 적과 단 하나의 목표만이 주어지지, 왕을 죽이면 자네의 승리야. 하지만 바둑에선 죽여야 할 왕이 없어, 아니 오히려 온갖 곳에 왕이 널려있단 표현이 좋겠군.”


 일리야는 잠자코 들었다. 속으로 화이트 스카들이 자신들이 속한 문화의 우월성을 설명하느라 혈안이 돼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등한시되었다. 그리고 그런 멸시가 그들의 마음속에 쐐기로 박혔으리라.


 “내 전사들 모두 이 게임으로 전략안을 익힌다네,” 칸이 말을 이었다. “게임 안에서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협에 대해 배우지.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받아칠지도 학습할 수 있어.”

 “잘 알겠습니다,” 일리아가 말했다. ‘젠장 왜 이것들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하지?’

 “자넨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

 “하오나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올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요. 언젠가는 단 하나의 적을 맞닥뜨릴 때가 올 텐데요.”

 “오히려 판세가 단순해지면 정신을 집중하기가 더 쉬워지는 법이지.”

 또다시, 방어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당신 자신이 야만인으로 보인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일리아는 한숨을 쉬곤 돌을 놓았다. 손실을 조금이나마 틀어막는 수였다. 그녀는 이 착점이 상대편에게 조금이나 한 방 먹일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이제 다음 목표는 어딘지요?”

 칸은 판세를 읽고 있었다. “쿤닥스 다음으로?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워마스터로부터 다른 지시는 없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잿빛 세계에서의 마지막 전투 이후로 좀처럼 워마스터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주 입에 담았는데 말이다. 친 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그를 확인해 본 바로는 쿤닥스에 있는 동안 워마스터에게서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스타-스피커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별개로 다른 화제가 그들 사이에 개입한 듯 했다. 


 마치 그들 모두 그늘진 소문에 둘러싸여, 불안의 조각이 병사들 사이의 유언비어처럼 공허 사방으로 퍼진 듯 했다.

 “그럼 전하께선 다른 계획이 있으신지요?” 일리아는 그렇게 물어보면서 자신이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칸은 판의 형세를 골똘히 보면서 다른 곳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수게이와 다시 한 번 상의해봐야겠네. 여차하면 바로 그가 있는 모성으로 돌아갈 참이야.”

 일리아는 웃었다. “정말요? 그 한사람을 만나려고 전군을 움직이겠다고요?”

 칸은 웃지 않았다. 한번 웃음이 터지면 그칠 줄 모르는 군단원들과는 달리 아주 가끔 웃음 지었다. “그럴 생각 이고말고.” 그는 돌을 두었고, 이 착점은 그녀의 줄어드는 형세를 날카롭게 포위한 수였다. “난 예수게이를 수세기를 의지해왔네.”


 일리아는 돌을 잡기 전에 포도주를 한 번 들이켰다. 맛은 그리 좋지 못했다. 초고리스인들은 포도를 재배하는데 그리 소질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우리랑 같이 쿤닥스로 오지 못했습니까?”

 “니케아에 그의 도움이 필요했네.”

 “니케아요?”

 “사실상 정상회담이었지.” 칸의 기민한 눈초리가 그녀를 향했다.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참여했겠지만 예수게이가 내 대변인 자격으로 참석했네. 날 대신해서 발언한 거지. 이제 내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 알 수 있겠나?”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거기서 뭘 하려고 간 거죠?”

 “군단 내에 제드인 아르가를 용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였네. 성과를 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했으면요?”

 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다고 내게 달라질건 없지, 하지만 언제나 제국을 위해 팔 걷어붙이는 노고를 아끼지 않는 내 형제들이 좀 더 편한 결정을 내렸길 바랄 따름이네.” 

 

 일리아는 웃었다. 화이트 스카는 제국의 법도에 분노어린 시선을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존중의 마음을 담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반항아가 아니었다. 그저 더도 덜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외따로 떨어져 무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들은 절대로 스톰시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곳에서 결정된 칙령이 이미 몇 달 전부터 전하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겠군요,”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이미 많은 일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을 거네,” 칸이 말했다. “이런 쾌적한 곳에서 말고는 느낄 수 없는 장점이지.” 하지만 칸은 잠깐 멈칫했다. 마치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더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잡담은 이걸로 끝내지,” 칸은 대답하면서 그녀의 포위된 세력을 공략하기 위한 새로운 공격에 들어갔다. “이제 집중하게. 거의 죽을 뻔 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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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바둑에선 흑이 미세하게 백에 유리해서 하수가 흑을 집고 백을 고수가 집는다고 함

그럼 칸은 바둑 초짜한테 백을 쥐어줬단 얘긴데 카간 당신도 남자였군요..


계속 보면 화스 구성원이 자기들이 야만인이 아니라고 어필하는 장면이 자주 나옴 


대성전 기간동안 많이 억울했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