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 무너지던 날, 아린의 세상이 무너지던 날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좌절하고, 변했으며 세상은 아린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버렸다. 빼앗은 걸로 모자라, 그녀를 서서히 말라 죽어가게 내버려뒀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 아무 잘못도 없었다. '무슨 이유일까.' 아무 이유도 없었다.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불과 먼지가 세상을 뒤엎는데 이유는 없었으며 아린도 없었다. 분노는 여기서 터져나오는 걸까? 어쩌면. 그 이래로 그녀를 사실 지탱시켜 준 것은 세상이 무너졌다는 분노였을까? 아린은 옳다고 생각했다. 솟는 힘에 몸을 맡겨 더 춤을 췄다. 볼터 피스톨의 반동은 골 깨지는 소리에 잊혀졌다. 나이프가 엉성하게 뼈에 박혀 다시 빼기 힘들어지는 건 비명소리에 잊혀졌다. 급소를 향한 발길질에 아파오는 통증은 상대의 뼈를 분지르는 걸로 잊혀졌다. 그녀는 분노요, 죽음이자, 응당한 징벌자라고 느꼈다. 이들은 죽어 마땅한 이단이다. 아주 오래 전 부터 아린에게 삶을 빼앗아 온 사악한 자들이다. 그러니 고통스럽게 죽는 건 당연하다. 용서는 용납할 수 없다. 골을 깰 수 있지만, 눈을 찔러 고통스럽게 했다. 피스톨의 탄으로 복부에 큰 구멍을 낼 수 있지만, 허벅지에 쏴버려 안쓰럽게 기어다니게 했다. 나이프로 목만 그어 자기 피에 익사하게 만들었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다. 이 자들은 너에게 벌 받아야한다. '
누군가 아린에게 말을 걸었다. 알 수 없었지만, 아린은 맞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피스톨로 도망가는 적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코에서 피가나고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아린은 나이프로 배를 거칠게 갈랐다. 온기 때문에 증기가 올라오는 속이 쏟아졌다. 아린은 군홧발로 긴 건 차례 차례 밟고 덩어리 지고 팔딱거리는 건 단숨에 밟아버렸다. 이단 하나는 아린의 앞으로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아린은 간악한 손비빔에 더 분노했다. 피스톨과 나이프를 놓고, 전투장갑을 낀 그대로 면상을 갈겼다. 이가 빠져나가고 살이 터져 피가 나도 이단은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단말마의 용서가 아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은 이미 곤죽이 되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린의 옷 끝 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벌인 일들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비릿한 피냄새와 오물냄새가 코를 찔렀고, 바닥에 파인 곳들은 피 웅덩이가 생겼다. 시체가 없었다. 동물이 먹다 남긴 것처럼 온 바닥에 헤진 것들만 남았다. 제삿거리가 될 뻔한 신민들은 아린을 공포스럽게 쳐다봤고, 그녀도 그들을 공포와 함께 마주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폐하의 분노로 싸운 걸까. 폐하가 원하시는 게 이걸까. 바들거리며 안간힘을 쓰던 그 손짓처럼 아린에게 돌아온 제 정신은 자신이 벌인 짓을 보고 답을 찾으려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터이니. 시체 하나가 생겼다. 결국 이단은 버티지 못하고 마지막 안간힘을 아린에게 주고 떠났다. 미하일과 왕이 피웅덩이를 피해 묶여있던 신민들을 풀어줬다. 아린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미하일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린은 나이프와 피투성이가 된 볼터 피스톨을 바라봤다. 왕이 피스톨을 줍고 짜투리 천으로 묻은 피를 닦았다. 나이프도 주워서 손잡이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조심히 다가와 공손하게 아린에게 향했다.
"받으십쇼."
아린은 받기 싫었다. 피스톨의 총구멍은 곧 자기 심장을 잡아 먹을 것 같았다. 나이프는 손바닥을 찔러버릴 것 같았다.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본 무기들은 더 이상 아린의 것이라 느낄 수 없었다. 괴물의 것, 다른 자의 것, 폐하....의....
그녀는 황제 폐하에게 불편함이 느껴졌다. 무서웠으며, 비어보였고, 두려웠다. 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린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니 그녀가 총과 나이프를 다시 받기 주저했고, 폐하의 이름에 거북함을 느꼈으며, 신민들의 두려움에 자신도 공포를 느꼈다. 가느다랗게 정신을 잡고 있는 미약한 마음이 미친듯이 요동쳤고, 혼란이 마음의 실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돌아갈 수 있을까.
"분대장님. 신경쓰지 마십쇼."
미하일이 큰 덩치로 아린을 잡아 들쳐멨다. 아린은 몇 번이고 토 했다. 미하일의 뒷 바지에 토가 묻었지만, 왕과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분대장을 메고 이 빌어먹을 건물에서 걷고 걸었다. 흔들거리는 순간마다 아린은 다시 기억났다. 어떻게 이단들을 죽였고, 또 자신은 무얼 느꼈는지. 아직도 자신을 분대장이라 부르는 이들이 숨 막혔다. 한스가 왜 우리보다 일찍 떠났는 지 이해가 됐다. 그리고 부러워졌다. 반 쯤 미쳐가는 분대장과 그걸 챙긴 분대원들은 출구에 도착했다. 아마 이 밖으로 나가면 피난 구역의 어느 한 쪽이리라. 적들을 만날 지, 아군을 만날 지 모르지만 미친 듯이 싸워 길을 터준 분대장을 위해서라면 길을 가야했다. 미하일은 가볍게 잔해덩어리를 넘어갔고, 왕도 뒤따랐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이리 귀한건 지 처음 알았다.
"분대장님, 이것 좀 보십쇼."
미하일은 아린을 그대로 무너진 기둥 한편에 뉘어 뜨는 해를 보게 해줬다. 해는 만인의 고통, 저주와 상관 없이 만고의 시간과 상관 없이 뉘엿뉘엿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따스한 볕의 자락도 내뿜었다. 아린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미하일과 왕은 충분히 내버려뒀고, 적당할 때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무기를 건넸다.
"미안하다, 정신을 잃었다. 날 당장 의지박약으로 처형시켜도 할 말이 없다. 이 선택은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이럴 거면 뭐하러 저 바닥에서 데려왔겠습니까, 분대장님.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려주시죠."
왕이 성조를 섞어가며 말했다.
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피스톨을 다시 받고, 탄알집을 새로 끼웠다. 나이프는 칼집에 다시 집어넣었다. 방탄모를 고쳐메고 복스 채널을 열어 현 위치를 보고했다. 그리고 미하일과 왕에게 자신이 본 이단 아스타르테스를 설명하고 그들이 나타날 시 어떻게 할 지 논의했다. 복스에서 답이 왔다. 연대는 피난 구역을 봉쇄하고 현재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구역 내로 몇 번 구원군을 보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안전지대를 설명해주며 자력으로 가야한다 했다. 아린은 이단 아스타르테스를 보고 했다. 연대 지휘부는 이미 알고 있으며, 건투를 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교신을 마쳤다. 아린은 팔에 나이프로 선을 그었다. 생채기에 맺힐 피가 흘렀고, 피스톨에 묻혔다. 다시는 미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아버지와 181연대의 선물에 절대 다른 이의 불경한 피를 묻히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분대는 안전지대로 향했다.
해에 비춰진 구름의 색은 좀 더 뚜렷해졌다. 보라색에서 붉은 색으로, 아니 검붉은 색으로.
쟤도 은근 불안불안하네. 타락 떡밥인가.
ㅠ 덧글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이리 오랜 글에 달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