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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그론."


갑주의 여인이 붉은 피투성이의 사내에게 소리쳤다. 사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피주검이 된 시체를 밟아 으깨고 있었다.


"앙그론!"


알파리아는 다시 소리질렀다. 그제서야 앙그론은 뒤를 돌아봤다. 맏이었다. 황제의 개자식.



"난 충실히 임무를 수행중이다." 앙그론은 조소하며 그의 손에 남은 살덩이를 악력으로 으깼다. "위대한 '황제 폐하'의 개로써 충실하게. 뭐가 문제지?"



알파리아는 조금 찡그렸다. "앙그론, 테라로 복귀해. 아버지의 명령이야. 학살은 네 일이 아니잖아."


"황제의 이름으로 온갖 공작질에 도가 튼 년이 할 말은 아니지."


앙그론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증오를 토해내듯이. 그의 말은 차가웠지만,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분노는 그 무엇보다도 뜨거웠다. 손에 묻은 살점과 피를 떨어내며 그는 알파리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넌 말이지, 황제의 첫째 개. 언제나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칼날을 숨긴 채 움직이는 걸 즐기지. 황제의 충실한 도구로, 난 그런 등신같은 연극 따위 필요 없어. 꺼져."



알파리아는 조용히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차분한 태도로 말을 받아치면서.



"누구도 이걸 즐기지 않아, 책임이 있을 뿐이지, 앙그론. 내 귀여운 동생아. 아니면 개자식이라고 불러줄까?"



앙그론은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고통과 분노를 한껏 내놓은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너와 똑같지. 고작 말장난으로 뭔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개자식아. 가장 먼저 책임을 저버린 자는 네 주인이야."


"알아,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야. 누군간 너와 이야기를 해 줘야 하니까."


"이야기?" 앙그론은 다시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의 머리에서 뭔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날 상담사나 필요한 애새끼로 보지 마."



알파리아는 조금 측은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앙그론의 피가 솟는 모습은 가려지지 않았다. 저 대못 아래에도 사람이 있었겠지.



"네 분노는 고귀했어.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 피를 토할 때는." 알파리아는 무심하게 말했다. "지금 너를 봐."

앙그론은 알파리아의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 뒤로, 가려졌던 눈 앞의 형체들이 그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날 이렇게 만들었지."

"고작 네 머리에 박힌 이상한 것 따위에 굴복하지 않았었지. 지금은?"

"닥쳐."

"아직 돌아갈 수 있어. 그 '황제'라는 작자에게 짐승으로 취급받으며 살지 말라고. 네 머리에 대못이 있어도 넌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었잖아.

...넌 그보다 더 고귀한 존재야."



앙그론은 알파리아의 말을 듣고 잠깐 눈을 감았지만, 금세 그 표정에 분노와 고통이 뒤섞였다. 앙그론의 가슴은 분노로 거칠게 오르내렸고, 손에 쥔 도끼는 미세하게 떨렸다. 아팠다. 아파. 그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고귀하다고? 너도 황제도 나를 장난감으로 만들었으면서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터질 듯한 분노와 슬픔으로 갈라졌다. "난 죽었어. 누세리아에서. 이건 그의 유령일 뿐이야. 더러운..."



알파리아는 천천히 다가섰다. 그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차분했지만, 앙그론은 그 안에서 개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필요없어. 필요없어.

필요없어야 하는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알파리아는 그의 눈 앞에 가까이 서서, 차분하게 앙그론을 달랬다. "아직 돌아올 수 있어. 난 널 기다릴거니까. 내 귀여운 동생아."



앙그론은 찢어지는 고통 속에 멈춰 있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그러다, 다시 눈 앞에 선 자를 보았다. 황제의 개자식. 개자식...

앙그론은 그녀를 제치고 걸어가다 천천히 멈춰 섰다. 알파리아를 돌아보진 않은 채,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기다리는 테라로. 정말로 이번 한번만.







알파리아는 그의 등 뒤에서 미소지으며 떠나는 앙그론을 바라봤다.

"달래기 쉽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