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울트라마 군주의 궁정에서

 


“포식자와 그 먹잇감 사이에 서지 마라,

왕과 그의 왕좌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 일리리움(Illyrium) 격언



“여기선 무릎 꿇지 말라.”


길리먼이 알현의 전당으로 들어서며 말했으나 이미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당은 광대했다. 은과 금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기둥 천 개가 꽃잎 모양의 기둥머리를 얹고 천장을 떠받들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모자이크 타일 바닥 위에는 수백 명의 방문객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각 군단의 스페이스 마린들이었다.


“고개를 숙이지 말라.” 길리먼이 다시 말했다. “그대들은 마크라그로 왔고, 이곳은 그대를 환영한다. 내가 직접 그대들을 맞이하겠노라.”


인빅투스 근위대의 위엄 넘치는 카타프락티 터미네이터들 사이에 선 채, 길리먼은 가장 가까운 무리로 다가갔다. 그는 그 무리의 선두에 선 전사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며 일으켰다.


“이름을 말하라.”


“베라노 에브(Verano Ebb), 레이븐 가드 사일런스 분대의 캡틴입니다.”


“그대가 잃은 것이 곧 내가 잃은 것이오, 캡틴.” 길리먼이 말했다.


“그리고 전하의 희망은 곧 제 희망입니다.” 에브가 답했다. “제 병력을 전하께 바칩니다. 오직 울트라마와 함께 살인자들을 처단할 기회만을 구할 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 또한 그 이상은 아니오. 그대의 자리는 여기요, 베라노. 환영하오.”


베라노는 반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옆에 선 무리들을 가리켰다.


“아이언 핸드의 사르돈 카라아시손(Sardon Karaashison), 그가 규합해낸 형제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 옆은 살라맨더의 자이토스(Zytos)와 그의 전우들입니다.”


길리먼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도 베라노처럼 맹세하겠는가?”


카라아시손은 흑백 도색의 아머를 입은, 피 한 방울 없이 말라붙은 자였다. 그는 헬멧을 벗지 않았다. 분명 유기적인 얼굴 부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터였다. 헬멧이 곧 그의 얼굴이었다. 렌즈가 박힌 의안에 붉은빛이 반짝였다.


“맹세합니다, 전하. " 그가 답했다. “호루스에 맞서는 자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자이토스는 초록색 아머의 헬멧을 분리하여 왼팔 아래에 안고 서 있었다. 그의 피부는 카라아시손의 흑색 장비만큼이나 짙었고, 눈동자는 그의 인공 렌즈처럼 붉게 빛났다.


자이토스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특유의 억양을 얹어 말했다. “아이언 핸드와 레이븐 가드 형제들의 상실을 애도합니다. 우리 역시 무너졌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제18군단, 살라맨더는 슬픔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굳세게 버티기로 결의했고, 우리의 프라이마크이자 전하의 형제께서 살아 계시리라 믿기로 했습니다. 증거를 보기 전까진, 애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허망한 희망 아닌가, 자이토스?” 길리먼이 물었다.


“실용적 판단입니다, 전하.”


“오히려 실용적으로 생각한다면, 최악을 받아들이고 전진하는 것이 낫다고도 할 수 있겠지. 희망은 짐이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희망은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살라맨더가 대답했다.


“우리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희는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함께 전장에 나서겠습니다. 우리의 전투 함성은 '불칸은 살아 있다!'가 될 것입니다. 그 구호가 진실임이 증명되는 날까지, 전하의 말씀이 곧 우리의 명령입니다.”


길리먼은 다음 무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임페리얼 피스트 병력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들 앞에는 거구의 전사가 서 있었다. 그는 심하게 상처 입은 채, 기초적인 구급 안정화만을 받고 버틴 모습이었다. 한쪽 팔은 잘려 나갔고, 마치 뜯어 먹힌 듯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알렉시스 폴룩스(Alexis Polux), 제405중대 캡틴이자—”


“알고 있네, 알렉시스.” 길리먼이 말을 끊었다.


“영광입니다, 전하. 기억해주시리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내 형제들이 ‘비범하다’고 인정한 장교는 모두 기억하려 애쓰지. 자네 보고서를 읽었네. 팔(Phall) 성계 전투.”


“핏빛 전투였습니다, 전하.”


“자네는 훌륭한 전략을 발휘했지. 아이언 워리어들은 병력도, 화력도 자네보다 우세했으니.”


폴룩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선 한 척을 탈취해 탈출했지? 콘트라도르(Contrador)?”


“탈출이 아니라 퇴각이었습니다, 전하.” 폴룩스가 말했다. “우리 프라이마크께서 즉시 테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어기지 않습니다.”


“철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을 텐데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폴룩스가 답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놈을 끝장내지 못한 점입니다. 제가 이끈 응징 함대가 그 개자식을 잡았었습니다, 전하. 정말 한끝 차이였습니다.”


전당 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누구든 간에, 황제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그런 말로 표현하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페투라보는 내 형제일세.” 길리먼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런 뜻은 아니었—”


“또한 세 번 저주받을 개자식이기도 하지.” 길리먼이 말을 잘랐다. “내 앞이라 하여 말 가릴 필요는 없네. 알렉시스, 자네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겠네. 첫째, 이곳에서 가능한 의료 지원을 받아 회복하고 재정비할 것. 둘째, 그렇게 회복되면, 나와 함께 서서 팔 성계에서 자네가 시작한 일을 끝내 주게.”


폴룩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테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명령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 테라로 돌아갈 방도는 없네.” 길리먼이 말했다. “테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전하께선 황좌의 세계가 함락됐다고 생각하십니까?” 폴룩스가 물었다.


“워마스터의 최우선 목표가 테라일 것은 확실하니까.”


“그렇다면 더욱이 병력을 집결시켜 재무장하고, 대규모로 테라로 진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폴룩스가 단언했다.


“팔 성계의 일 이후, 얼마나 오래 폭풍 속에 갇혀 있었지, 알렉시스?” 길리먼이 물었다. “테라로 가는 길은 없다고 말했네. 어둠 속엔 단 하나의 등불만이 있을 뿐. 우리는 이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네. 게다가, 나는 자네에게 주어진 명령을 무효화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렇지요?” 폴룩스가 물었다.


“알렉시스," 길리먼이 말했다. “내게는 선임권이 있다. 나보다 상위의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사령관이지. 나는 그 권한을 행사할 걸세. 우리는 제국을 구해야 하네. 지금 이 시점에선 추측이나 망설임이 도움이 되지 않아.”


폴룩스는 울트라마의 군주를 노려보았다. 그는 프라이마크의 신체적 위용을 어렴풋이나마 따라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대한 스페이스 마린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오백 세계를 수호하고 있다, 알렉시스.” 길리먼이 대답했다. “제국의 남은 기반을 마크라그에 모여들게 하고 있지. 우리는 등불을 갖고 있네. 항로의 안전도 일부 확보했고, 체계를 다시 구축할 가능성도 있지. 사실상, 이곳이 곧 제국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선 뭐가 되는 겁니까?” 폴룩스가 물었다. “황제라도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어떤 것도 계승하려는 생각이 없자.” 길리먼은 살짝 몸을 물러서며 말했다. “자이토스처럼, 나 역시 생존여부의 증거가 있기 전까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일세. 하지만 만약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충성스러운 프라이마크라면… 그래, 나는 제국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네.”


“그런 상황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폴룩스가 말했다. “다만 전하, 우리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울트라마린의 '이론과 실천' 개념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알렉시스?” 길리먼이 물었다.


“예, 전하.”


“모든 것은 이론일 뿐이야, 알렉시스. 제국의 나머지도, 테라의 안위도, 아버지의 생존 여부도 모두 이론이지. 마크라그만이 실천일세. 지금 우리가 분명히 갖고 있는 유일한 것. 이 극한의 시대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


알렉시스 폴룩스는 할 말이 아직 많은 듯 보였으나, 길리먼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필요한 건 실천적 해결책이 맞습니다.” 그가 말했다. “저를 치료해주신다면, 전하의 명에 따라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무엇이 실천 가능한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싸우겠습니다.”


“고맙소, 알렉시스.” 길리먼이 말했다. “자네와 자네 형제들이 제공해줄 수 있는 축성 및 방어 강화 전문성은 무엇이든 환영이오. 임페리얼 피스트는 그 방면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그는 말을 멈췄다. 조용하고 일정한 숫돌질 소리, 칼날을 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근처엔 아이언 핸드 장교 한 명이 부하들과 함께 프라이마크를 맞이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엔 화이트 스카 무리도 있었다. 소리의 출처는 바로 그들이었다.


“아이언 핸드의 이론 클리브(Eeron Kleve)입니다.” 클리브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와 그의 병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실재 우주로 돌아온 지금 그들의 애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간툴가(Gantulga)라고 합니다.” 화이트 스카의 대장이 말했다. 그는 절을 하는 대신 고개를 짧게 끄덕일 뿐이었다. 왼손엔 뽑힌 검이 들려 있었고, 그 칼날은 번쩍였다.


“모두 환영하네.” 길리먼이 클리브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폭풍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겠다는 나의 제안을 받아주게. 여러 척이 함께 움직였다고 들었네만, 클리브?”


“화이트 스카 강습대와 제 기함이 함께 했습니다, 전하.” 클리브가 대답했다. “대부분이 혼란을 헤치고 대열을 유지하며 도착했습니다. 두 척은 손실됐습니다.”


“칼을 뽑은 채로 나를 만나러 왔나?”

길리먼이 화이트 스카에게 물었다.


“예, 하지만 다른 손은 비워 두었습니다.” 간툴가가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라는 빛 속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기에, 한 손엔 빈 손바닥, 다른 손엔 검을 들었습니다.”


“지금 그 빛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길리먼이 물었다.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간툴가가 말했다. “제가 우려했던 덫은 아니더군요. 하지만 전하께서 임페리얼 피스트에게 하신 말씀은 새겨 들었습니다. 호루스의 행위…”


그는 그 이름을 마치 뱀의 쉿소리처럼, 입에서 불길한 것을 내뱉듯 말했다.


“호루스의 행위는 반역입니다, 울트라마의 군주여.”


“나는 이단이라 부르고 싶군.” 길리먼이 말했다. “처음엔 반역이었지. 형제에게 등을 돌리고, 권력과 개인의 야망을 위해 살육에 나섰으니.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을 직접 봤다. 그들의 정신과 육체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들의 신념 자체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이제 이건 호루스의 반역이 아니라, 호루스의 이단이다.”


간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요.” 그가 말했다. “지금 별들을 부수고 있는 이처럼 노골적일 수도 있지만, 아주 미묘하고 의도치 않게 일어날 수도 있지요. 가령, 아직 죽었다고 선언되지도 않은 제국을 제쳐두고 새 제국을 세우는 것처럼.”.


길리먼의 미소는 간툴가의 검과 같이 눈부시고 날카로웠다.


“나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는 것이 아닐세, 간툴가. 원래의 제국에서 남은 것을 지키려는 것이지.”


간툴가는 빈 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확실한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울트라마의 군주여.” 그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벌써 검을 꺼내든 걸 보아하니, 자네들은 조급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듯 하군.” 길리먼이 말했다.


그때까지도 숫돌로 무언가를 가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들 뒤편에서 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군주여.” 클리브가 대답했다. "이건 늑대들의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