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의 섭정, 인장관 말카도르는 장식 없이 수수한 테라 행정관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말카도르는 자신이 겉모습과 다를 바 없는 늙은 조언가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려는 마냥, 꼭대기에 독수리 장식이 달린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로 전시 회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발도르 일행은 인장관의 개인실에 집합하였다. 말카도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탑은,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이 벌이고 있는 대규모 개축 작업을 지금까지는 잘 회피해오고 있었다. 고리가 둘러진 탑의 발코니는 테라의 밤하늘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었고, 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구체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첨탑 꼭대기의 방 주위로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구체들의 그림자는 높은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실내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알비아의 백석(白石, whitestone)으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제 1 구체들은 묵직한 반중력 현수대 위에 매달린 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제 2 구체들은 제 1 구체들 주위로 공생하듯 떠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이 탑의 가장 높은 방이 태양계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태양을 상징하고,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제 2 구체들이 태양계의 위성들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 구조였다.


말카도르는 그 구조물이 자신의 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말카도르는 이곳, 3차원 천문의(astorlabe)의 중심부에서 만남을 가지는 것을 선호하곤 하였다. 이곳에서는 황궁 깊숙한 곳에서는 잊어버리기 쉬운 관점을 떠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말카도르는 자신이 혼자 있을 때 생각에 잠길 만한, 덜 군사적이고 덜 우울한 공간이 필요하다면 이 탑을 개축하는 데에 반대하고 있었다. 테라의 근위장-Praetorian of Terra라는 돈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말카도르는 이 탑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내었다. 이제 요새로 재탄생한 황궁 내부에서, 이 탑은 유일하게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로 남아 있었다.


탑 높이의 서재 중심부에 놓인 홀로리튬 원탁 주위로, 제국에 충성하는 가장 강력한 남녀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이 귀중한 두루마리들과 유물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 유물들은 고대 지구의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부터 기술의 암흑기 동안 그 존재가 사라져 간 문명들에 이르기까지, 일백 개의 사라진 문명들로부터 입수한 것들이었다. 조각이 새겨진 목재로부터, 하얀 돌과 검은 바위로 만들어진 조각상의 파편들, 스테이시스 필드 안에 담긴 두루마리들에, 자비로운 시간 속에서 이미 오래 전에 붉고 푸른 녹이 슬어버린 권총과 소총과 검까지. 그것들은 다방면에 걸친 수집품들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여섯 영혼들이 각자 서로의 반대편에 서있었다.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여섯 영혼들이. 바로 이곳에서 결정되는 사항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제국의 지배계급 전체로 전파되거나, 제재를 받고 봉인되어 영원히 비밀 속에 감추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원탁은 그곳에 모인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상석이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디오클레티안은 원탁 주위로 모여 있는 제국의 지배자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화성의 패브리케이터 로쿰-Fabricator Locum, 트리메지아-Trimejia. 제국의 섭정, 말카도르.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의 프라이마크, 로갈 돈. 침묵의 자매단의 망각의 기사, 카에리아. 만인대의 캡틴-제너럴, 콘스탄틴 발도르. 그리고 디오클레티안, 그 자신까지.


디오클레티안은 기계교의 새로운 대사제를 아직 본 적이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유령 같은 모습의 트리메지아는 화성의 붉은색으로 물들인 후드 달린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 쓰고 있었다. 로브로 덮인 그녀의 몸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소매 끝자락에서 드러난 앙상한 은빛 손가락들과, 후드의 그늘에 가리워진 무표정한 안면 덮개뿐이었다. 트리메지아는 그녀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세 개의 서보-스컬들의 복스-그릴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는데, 서보-스컬들은 노랑색과 검정색의 공사장 무늬로 칠해진 전선들에 묶여 있었다. 세 서보-스컬들은 모두 인공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세 목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제조 장관님께서는 위대한 작업-the Great Work 현장의 수호자들로부터 전언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전언이라면 가져 왔소.” 디오클레티안이 대답하며, 원탁 위에 놓인 월드 이터 군단의 헬멧을 가리켜 손짓하였다. “그리고 증거도.”

“아드넥토르 프라이무스는 더 이상 제조 장관님께 보고를 송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트리메지아가 강조하여 말했다. “그 이름이 축복 있으실 자그레우스 케인-Zagreun Kane 님께서는 위대한 작업 현장에 파견된 본교측 대표가 옴니시아를 섬기는 과정에서 그 종말을 맞이하였으리라 믿고 계십니다.”


“케인 공의 예상이 옳소.” 디오클레티안이 대답하였다. “웹웨이 내부에 있는 기계교 병력은 이제 사단(師團) 감독관들-Divisional overseers의 지휘를 받고 있소. 아드넥토르 프라이무스 멘델은 며칠 전, 터널의 연결점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소.”


“불편하군요.” 트리메지아의 세 서보-스컬들이 말했다.


“엔디미온 천부장께서는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반격 작전을 이끄셨소. 바로 그분께서 멘델의 시신을 수습하시었지요.”


“부적절한 행위입니다.” 테크 프리스트가 불쑥 대답하였다. “아드넥토르 프라이무스의 육신의 잔해는 기계교에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유기물질들을 수거하여 서비터의 생명유지액 팩을 만드는 정도겠지요.”

디오클레티안은 저 화성 마녀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며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 반격 작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남녀들이 죽어갔던가.


스페이스 마린 군단의 전사왕, 돈은 갑주를 입지 않은 채였다.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돈의 모습은 마치 금욕적인 수도승과도 같았고, 그 주위로는 그가 느끼고 있는 조바심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었다. 로갈 돈은 계획을 세워 전투를 치뤄야만 하였다. 자신의 상처를 달래야만 했다.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의 근엄한 군주는 그 싸늘한 눈동자에 단호한 성실성을 가득 담고 있었다. 로갈 돈은 나란히 서있는 커스토디안과 침묵의 자매로부터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빠짐 없이 보고하도록 하게.” 로갈 돈이 명령하였다.


디오클레티안은 그 명령에 발끈하였고, 그의 시야에 카에리아가 미세하게 자세를 바꾸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양팔을 흉갑 앞에 교차시켜 팔짱을 끼고 서있던 카에리아 자매는 손가락 하나를 미세하게 움직여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박을 덮는 갑옷 위에 새겨진 번개 줄기 문양 위에 자신의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그대들의 경고 암호에 대해 모를 거라고 생각하였나, 망각의 기사여?” 돈이 카에리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카에리아는 돈의 질문에 답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안은 카에리아를 대신해 대답하였다. “카에리아 자매는 그저 제가 전하의 외람된 행동에 분노를 드러내려 하는 데에 주의를 주었을 뿐입니다, 돈 전하.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단 한 분뿐이십니다. 전하께서 ‘아버지’라 부르시는 바로 그분 말씀입니다.”


프라이마크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야 돈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천 가지의 문제들이 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네. 자네의 지적은 확실히 알아들었네. 부디 계속해주게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습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말했다. “터널망을 공격한 적들의 마지막 제파에 저희는 큰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마그누스의 어리석은 행동 이전까지 저희가 점령하였던 모든 지역들에 에테르의 침략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불가능의 도시의 성벽 뒤편으로 패퇴했지요. 외곽 터널들에 대한 장악권을 유지하고 있느니, 차라리 칼라스타를 사수하는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현재로서는 웹웨이와 황궁 지하실 사이의 연결은 공고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도시의 묘지 사이로 기계교가 만든 경로들은 황제 폐하의 보호 아래 지켜지고 있으며, 해당 지역들에서 에테르의 활동은 정화되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돈이 물었다.


디오클레티안은 대답하기에 앞서 마음을 굳게 하였다. 디오클레티안은 원탁 위에 올려 놓은 헬멧을 가리켜 보였다. 그것을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나은 설명이 될 터였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반역파 군단들이 웹웨이로 진입했습니다. 반역한 군단들의 후방에서는 타이탄들의 실루엣이 행군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지요. 이미 크게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적들은 이제 그 수가 늘어나기까지 하였습니다. 마그누스의 우행으로 인해, 저희는 이전의 그 어느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터널망에 대한 제어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보다 넓은 터널망들은 이미 저희의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저희의 수는 더 이상 진격을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불가능의 도시의 묘지들은 현재로서는 안전합니다. 칼라스타의 재건된 성벽들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수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말카도르가 후드를 뒤집어 쓴 머리를 푹 숙였다. “엔디미온 천부장은 어디에 있나?”

이미 알고 있는 주제에. 디오클레티안이 생각하였다. 카다이와 야삭이 죽은 것도 당신은 이미 알고 있겠지. 라가 마지막 남은 천부장이라는 것도. 아, 이것도 당신의 첩자들 중 하나를 잡아내기 위함인가? 이 교활한 괴물 같으니. “라 님께서는 교전 중에 계십니다.” 커스토디안이 말했다. “저는 그분을 대신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안이 각색을 섞어 짧은 설명을 하는 동안, 돈은 넓은 창문을 향해 걸어가 커다란 금속 구체들이 타원형 궤도를 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낮의 하늘은 테라의 궤도판들 중 하나가 지나가며 드리운 그림자에 가리워 어두워져 있었다. 프라이마크의 얼굴 표정 또한 그 그림자에 가리워졌다. 돈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였고, 그 어떤 감정의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발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트리메지아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서보-스컬들마저도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을 멈추고, 그녀의 어깨 위로 둥둥 떠다니며 감각침 다발들로 가득 찬 눈구멍으로 디오클레티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장관은 지팡이에 몸을 더 바짝 기대었다. 디오클레티안의 고백이 끝난 뒤로도 말카도르는 작전 브리핑의 통제권을 되찾을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돈이 창문으로부터 뒤돌아 섰다. 디오클레티안은 프라이마크의 얼굴 위에 돌연히 떠오른 감정에 반감을 느꼈다. 돈의 눈은 그 갑작스러운 감정으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만일 전사들이 필요하다면.” 돈이 말문을 떼었다. “내 군단을….”


“아닙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말했다. 그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카에리아 역시 단호하게 거절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라고?” 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의지에 따라,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은 황궁 지하실 외부에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의지는 내 아버지께서 만인대와 자매단이 전력을 온존한 상태로 보유하고 있을 때 품으신 것이었지.” 돈이 응수하였다. “폐하께서 추가 병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시고, 반역자들 역시 웹웨이 내부로 몰려들고 있는 이 판국에, 어떻게 그분의 명령이 변함 없이 같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전하의 군단원들 중 얼마나 많은 병력이 테라에 남아 있습니까?” 이번엔 디오클레티안이 응수하였다. “4개 중대입니까? 아니면 5개 중대입니까?”


“반역에 대비해 주둔시켜 둔 여러 개 중대들이 정복된 지역들에 남아 있다네.”


“그래서 전하의 군단에서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로갈 전하?”


“세 개 세그멘툼에 나뉘어 있지. 주력은 태양계 전쟁의 교전 지역들에 배치되어 있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제공할 수 있는 만큼의 병력은 제공하겠네.”


“한 마디로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씀이시로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황제 폐하의 뜻이십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반복해 말했다.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은 황궁 지하실 외부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어디 이유를 말해보게.”


“저로서는 오직 짐작 밖에는 할 도리가 없을 뿐입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말했다. 디오클레티안의 시선은 그가 전리품으로서 가져온, 기능이 정지된 헬멧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그대는 내 부하들이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돈은 완벽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로 대꾸하였다. “내 아들들이 앙그론의 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신뢰라 하셨습니까?” 디오클레티안은 돈이 언급한 그 한 단어를 나무라듯 말하였다. “근래에 있어 저는 함부로 누군가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로갈 돈 전하. 만일 저희가 군단의 전사들을 신뢰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이 은하계는 한 프라이마크의 야망에 의해 반으로 쪼개져 불타오르고 있지 않았겠지요. 저는 당신과 왈가왈부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근위장이시여. 저는 그저 이 지상에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돈은 양 주먹을 원탁 위에 올리고는,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숨을 내뿜었다. 모든 이들은 로갈 돈을 경이로운 평정심의 소유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디오클레티안과 만인대의 비밀스러움에 대한 돈의 혐오는 그의 존재감 위로 깊이 새겨져 드러나고 있었다. 말카도르의 날숨은 돈의 것보다 미세하고 느렸지만, 거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돈의 것보다도 더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직 트리메지아만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없는 안면부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낼 수 없었기에. 트리메지아가 뒤집어쓴 후드가 조금이지만 숙여졌다. 무언가가 그녀의 얼굴을 가린 금속판 뒤편에서 딸깍거리고 있었다. 세 개의 서보-스컬들은 방향을 바꾸어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하였다.


“옴니시아께서는 어떠하십니까?” 트리메지아의 세 서보-스컬들이 단조로운 화음으로 물었다.


“변함 없으시오. 옥좌에 앉으신 채, 그 어떤 자극에도 아무런 미동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시지요. 황금 옥좌에 앉으신 이후로 폐하께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소. 마그누스의 무지로 인해 그분께서 맞서 싸우시고 계시는 권능들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 바깥에 있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소.”


“만일 폐하께서 말없이 그저 앉아 계시기만 한다면.” 돈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분께서 증원 병력을 요청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만인대는 황제 폐하를 대변합니다.” 디오클레티안이 즉각 대꾸하였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트리메지아의 주위를 떠다니는 서보-스컬들이 말했다. “옴니시아의 뜻에 대해 보다 정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말. 진술. 해명을.”

“만인대는 황제 폐하를 대변합니다. 저희가 요청하는 것은 곧 저희의 주군께서 직접 요청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돈은 뒤돌아 서서 흐려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돈의 목소리는 그 광대한 침묵의 순간으로 인해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의 형제, 마그누스여, 자네가 저지른 모든 실수들 중에서도, 이번 것이 가장 끔찍한 실수로군.” 다시 한 번, 돈은 어깨 너머로 디오클레티안과 카에리아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어째서 그대들이 직접 찾아왔는지를 알겠군.”


디오클레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반역자들이 테라까지 당도한다면─”


“그것은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네, 지휘관-Prefect. 만일이란 말은 필요가 없지.”


“그 말씀대로입니다. 반역자들이 테라에 당도하면, 돈 전하,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인도 없이도 황궁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으셔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돈이 그 지적에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결코 뒤흔들 수 없는 이였고, 돌과도 같은 자이자, 다른 형제들 모두가 화염과 악의, 명예를 쫓는다 하더라도 금욕적으로 자리를 지킬 단 한 명의 아들이었다.


“나는 폐하의 비밀 전쟁이 잘 되어가고 있기를 감히 바랐었네. 이제 뒤늦게나마 그 결과를 알고 나니, 그처럼 뻔뻔한 낙관론은 참으로 어리석게만 보이는군. 그렇지 않은가? 마지막 날이 오면 우리가 테라 상공으로부터만 멸망이 찾아오고, 저 지하로부터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감히 상상했던 것이 말일세. 호루스와 그의 병력은 이미 세그멘툼 솔라 안에 들어와 있네. 그리고 이젠 황궁 지하도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군. 말해보게, 디오클레티안. 우리가 호루스가 테라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이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대번에 대답하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는가?”


“만일 현재 상황이 똑같이 지속된다면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저희는 패배할 것입니다. 만일 병력 증원에 대한 저희의 요구가 기각된다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패배할 것입니다. 만일 적들이 더 많은 병력을 증원받는다면요? 예, 패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계획은 무엇인가? 그대가 필요로 하는 그 증원 병력을 어디에서 찾아낼 생각인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지원하도록 하지.” 말카도르가 말했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도 있기 마련이지.”


로갈 돈은 침착한 중에서도 끈질기게 물음을 던졌다. “황제 폐하의 비밀 칙령은 계속해서 지킬 예정이오?”


카에리아는 긍정을 의미하는 짧은 수화를 보내었고, 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자원자들은 전부 사지로 몰아넣겠다 이 말이군.” 프라이마크가 말했다. “기계교의 서비터들을 희생하겠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소.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서비터들을 도태시키는 것은 여전히 손실이기는 하나 비도덕적이라고 하기는 힘든 일이지. 하지만 당신들이 웹웨이 안쪽으로 밀어 넣었던 인간 생존자들을 안락사시키겠다는 것은, 서비터를 희생시키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음침한 제안이오.”


로갈 돈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카에리아는 그저 한 손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디오클레티안에게 시선을 보내기만 할 뿐이었다. 커스토디안은 카에리아의 수화를 통역하여 주었다. “카에리아 양의 제안이 이 장소에서는 우선권을 차지합니다, 돈 근위장.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점령지를 잃는다면, 생존자들을 걸러낼 필요도 없겠지요. 적들은 저희 모두를 죽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덕성에 대한 전하의 걱정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돈의 턱이 꽉 다물어졌다. “스스로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보게, 디오클레티안.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대체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 똑똑히 들어 보란 말일세.”

필요성은 도덕성에 우선합니다. 카에리아가 흉갑 앞으로 손을 가져와 수화하였다. 후회하지 않지는 않겠지요.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도덕적인 승리가 도덕적인 패배보다는 낫습니다. 승리한 자는 만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면 속죄할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패배한 자는 그럴 기회조차 잃게 되겠지요.


“감히 내 형제의 말을 내 앞에서 인용하겠다는 것인가?” 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로부테는 이 자리에 없네, 망각의 기사여. 만일 로부테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그리 했겠지. 하지만 로부테는 여기에 없고, 제국의 로드 커맨더는 바로 나일세.”


디오클레티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바보짓에 성질이 끓어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것은 그저 저열한 위선일 뿐입니다, 돈 전하. 전하의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은 다른 군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가며 교착상태에 있을 때에 자신들이 그 전투를 견뎌내는 데에 얼마나 자주 자랑스러워 했었습니까? 그러시더니 이제는 황제 폐하의 가장 위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저…. 하찮은 쓰레기들을 처형하는 데에는 반대를 하시는군요. 이것이 논의할 가치나 있는 주제입니까?”


건틀렛에 싸인 돈의 주먹이 원탁을 내리치고, 태양계를 그린 홀로리튬 영상이 펄쩍 뛰어 오르더니 깜빡거렸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저 내 아들들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이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 소모할 수 있는 동전과도 같은 것일지는 모르지. 허나 너희들은 저 지하에 5년, 장장 5년 동안이나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피를 흘린 것은 만인대뿐만이 아니야. 이것은 대성전이 아니다, 커스토디안. 네가 저 충성스러운 영혼들을 그저 변덕 한 번으로 멸하여버릴 수는 없단 말이다. 이제 이 전쟁의 마지막 날들이 다가오고 있고, ‘필요성’이란 단어의 의미도 그와 함께 바뀌었다, 디오클레티안.”

돈의 말은 그 자리에 모인 지배자들 사이로 메아리쳐 울렸고, 그 목소리는 죄를 고백하는 참회의 목소리만큼이나 엄숙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쟁을 벌이지 말도록 하지요. 카에리아가 수화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도 이제는 주저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저희는 필요한 군대를 소집할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안이 말했다. “만일 인장관 각하께서 그것을 인가하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신다면, 각하의 원조를 받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황제 폐하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면 되었네.” 돈은 음울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계획을 묵인하였다.


트리메지아는 왼손을 쥐어 서보-스컬들을 불러내었다. 서보-스컬들은 그녀의 굽은 등골로 둥둥 떠가, 거기에 접속하였다. 말카도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안은 저 인장관이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 의문을 가졌다.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말카도르가 말했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트리메지아는 짜증 섞인 코드를 빠르게 내뱉었다.


“그것은 반대의 표시인가, 대사제여?”

트리메지아의 등골에 접속되어 있는 서보-스컬들이 웅웅거렸다. 거죽 없는 세 얼굴들이, 다급히 말을 하고자 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화성을.” 세 개의 서보-스컬들이 동시에 말했다. “기계교는 옴니시아께서 성지 화성의 탈환을 윤허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안 된다.” 돈은 무뚝뚝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제조 장관님께서는 당신의 거부에 대해 이미 인지하고 계십니다, 근위장이시여. 그분께서는 제게 옴니시아의 바로 곁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 요청을 직접 전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트리메지아는 카에리아와 디오클레티안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비인간적일 정도로 가냘픈 그녀의 몸은, 그녀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몸이라기에는 너무도 연약했다. “화성은 반드시 탈환되어야만 합니다.”


말카도르의 지팡이가 바닥을 쿵, 하고 내리찍었다. “화성은 우리의 수중에 그에 필요한 자원이 있을 때에 재정복될 것이다.”


디오클레티안과 카에리아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 원탁 주위로 내려앉은 팽팽한 긴장감은 눈치 채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것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다. 말카도르의 행동은, 그들에게 이곳에서 떠나라는 의미를 분명히 담고 있었다.


“이 회담은 종료되었다.” 테라의 섭정이 말했다. “참석해준 데에 감사를 표하노라, 자매여, 그리고 커스토디안이여.”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지배자들이 뭐라고 따져보기도 전에, 디오클레티안과 카에리아는 탑 꼭대기 방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황궁 지하실로 돌아가기 전에, 아직 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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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도덕론 따지던 돈이 나중에 칸한테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막아세우는 건 좀 의외네. 내로남불인가?

그리고 디오클레티안은 진짜 진성 힙스터인건가, 아니면 커가들 사이에서 저런 인식이 공통적으로 자리잡은 건가, 말카도르도 속으로 겁나 씹어대네;; 


p.s. 프리펙트는 그냥 지휘관이라고 의역하기로 했음. 많은 조언들에 매우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