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제국 시민들에게, 그날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탐욕스러운 외계의 침략자들은 밤새도록 도시를 돌아다녔으며,

압도적인 숫적 차이 앞에서 제국민들은 단 두 가지 선택만을 강요받았다ㅡ약탈당하고 죽거나, 죽고 약탈당하거나.

밤새도록 이어진 불길은 수천년간 이어진 유구한 역사의 제국 도시조차도 한 하룻밤만에 모든 것을 잃은 폐허로 만들기 충분하였지만,

그럼에도 새벽은 찾아왔다.


새벽과 함께, 폐허 속에 숨어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마침내 황제 폐하가 부름에 응하셨다.

제국의 초인 전사들, 인류의 방패.

아스타르테스들.

그들이 찾아왔다.


오늘 죽는다면, 그대가 오늘 살인한 외계인들의 수로 말미암아 그분께 구원받으리!!


채플린의 복스 그릴망을 타고, 전투 기도문이 전 도시에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퍼져나간다.

블랙 템플러 성전사들 또한 전투 구호를 외친다.


자비 없이, 두려움 없이, 연민 없이! 


오라, 내게로 오라! 누가 감히 우리들에게 맞서리오?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밤새도록 불타버린 도시가 만들어낸 진한 재의 냄새와 유독한 화학 물질의 악취가, 

채플린이 의도적으로 열어놓은 리브레서를 타고 흐르며 그의 코 끝을 간질인다. 악취를 맡은 채플린의 헬멧 아래 얼굴 위로 인상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를 불쾌히 만든 악취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전장의 냄새란 수백년간의 대부분을 그 터전 위에서 살아온 채플린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고 정겨울 나름이다.

다만 전장의 냄새 사이로 흐르는 역한 외계인들의 냄새가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다.

감히 무고한 이들을 침략한 외계인들의 악취와, 밤새도록 흘린 순수한 이들의 피의 냄새가 그를 흥분케 만드는 것이다.


오크들의 첫번째 물결이 쏟아진다.

무시무시한 외계인의 포효성은 마치 어떤 물질적 힘을 지닌 것처럼 느껴져서,

그들의 군홧발 소리와 포효성에 채플린은 자신의 갑주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다. 채플린은 크로지우스로 가장 먼저 달려든 오크의 머리통을 그대로 곤죽을 만들어버린 다음,

놈의 시체를 밟고 도약하여 나머지 한 마리를 강철 군홧발로 짓밟아 으깨버린다.

사방에서 냉병기와 냉병기가 부딛히는 소리가 불협화음의 음악처럼 이어진다. 

체인 소드가 오크들의 머리를 가른다. 조잡한 도끼가 아스타르테스의 강철 아머를 강타한다.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폭발 소리가 터져나온다.

녹색의 물결은 거대한 해일로 쏟아졌으나,

마린들은 그보다 더 위대한 방벽이 되어 쏟아지는 파도를 분쇄해버렸다.

초록의 살덩이들과 새빨간 피가 대지 위를 적신다.

밤새도록 침략자들의 손에 고문받은 도시를 달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라도 되는 듯이,

성전사들은 헌신의 자세로 오크들을 베어넘긴다. 

두번째, 세번째 물결이 쏟아진다. 

이미 대열은 무너져서, 각자 수 마리의 오크들에 맞서 싸우는 각개전투와도 다를 바 없이 변해버렸다.


싸움이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 도시 전체의 오크들이 마치 썩은 고기의 악취를 맡은 스캐빈져 무리들마냥 모여든다.

이제는 일인당 가히 수십마리의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

결국 끝없이 흐르는 녹색의 해일 앞에 하나둘씩 쓰러지며 끔찍한 칼과 도끼의 파도 속에 잔인하게 난자당한다. 


1차, 2차 전선까지 무너진다. 이제 남은 것은 전설의 흑요석 기사와 드레드노트, 일부 마린들 뿐.

날아드는 도끼가 일부 동력 케이블들을 잘라내버리고,

지속적으로 쏟아지는 로킷과 총탄 중 일부가 취약한 후방 열병합 엔진을 타격한다.

석관과 연결된 기계 인터페이스가 점차 흐려지며 조종하는 몸체가 무거워짐을 실시간으로 느낌에도 불구하고,

드레드노트는 조금의 보신조차 없이 오크들을 잡아 으깨고 부셔버린다. 

'모레드, 쓰러지지 않는다.'


과연 드레드노트는 그 말을 지켰다.

수많은 오크들에 둘러싸인 드레드노트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 엔진을 폭파시켜버리며 수십여 오크들을 거대한 폭발 속에 지워버렸다.


전설의 흑요석 기사는 이미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거대한 나이트 슈트를 압도하는 적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수많은 오크들에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 언젠가는 이 나이트 슈트 또한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기사는 달려드는 오크들을 거대한 체인블레이드로 쓸어넘겨버리며, 놈들의 몸뚱아리를 잘개 다져진 고기와 내장덩어리들로 만들어 주변에 한가득 흩뿌려버렸다.

체인 블레이드가 만들어낸 잠깐의 여유 속에, 기사가 전장을 일견 살펴본다. 

남은 것은 단 한 명의 아스타르테스, 채플린 뿐이였고,

그나마도 녹색의 물결에 파묻혀 조잡한 원시 총기들과 도끼들의 거센 해일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스타르테스가 곧 최후를 맞이하리라 예상했다. 


채플린은 말 그대로 맨몸으로 거대한 해일에 맞서고 있었다. 

이미 갑주 이곳 저곳은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뼈와 주요 장기들은 상당 부분이 파열되거나 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회상 속에서

그는 한 기도를 떠올렸다.


'네가 죽인 악의 수로 네가 인정받으리라.'


녹색의 물결 사이로 하나의 별이 피어오른다.

아침의 여명보다도 더 찬란히 빛나는 후광의 채플린이 수많은 오크들을 짓밟으며 다시 일어선다.

그것이 어떤 고대 유물의 축복인지, 황제 폐하의 기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ㅡ

흑요석 기사는 지금 그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채플린은 그대로 거대한 워보스에게 달려든다. 

온 몸을 조악한 기계와 강철로 가린 거대한 오크가 그 도전에 응한다.


수 차례의 치명적인 일격과 잔인한 전투 기술들이 서로간에 오고간다. 그야말로 호각으로, 작은 실수조차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그런 대결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도전을 청한 대담한 인간이 보인 허점을 간파한 워보스가 클라를 내질렀고,

그것으로 승부가 결정난다. 


거대한 클라가 채플린의 흉갑을 그대로 관통하며, 두 심장을 부셔버린다.

워보스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죽인 악의 수로 심판받으리라.'


채플린의 손이, 워보스의 턱 장식을 붙잡으며 놈의 머리통을 자신의 참혹하게 난자당한 품 아래로 당겨버린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들어올린 크로지우스가 워보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사방에 뇌수와 피가 튄다.

몇초 후, 거대한 몸뚱아리는 힘없이 피로 적셔진 대지 위로 떨어진다.

워보스의 죽음과 함께, 오크들은 공포에 주춤거린다.

채플린이 포효한다. '두려움 없이! 연민 없이! 자비 없이!'


공포에 완전히 사로잡힌 오크들이 각자 무기들을 내던지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저 정도라면, 도시의 남은 생존자들이 힘을 합쳐서 충분히 몰아낼 수 있으리라, 채플린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숨이 멎은 이후에도, 그의 시신은 한쪽 무릎을 꿇은 그대로 전장 가운데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다분한 투쟁의 의지가 담긴 최후였노라고, 기사는 생각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적들이 다시 찾아온다면 그가 언제든 다시 일어설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떠오른 찬란한 태양빛이, 채플린의 피로 세례받은 갑주 위에서 반짝거리며 기사의 눈을 간질이고 있었다.

기사는 마지막으로 묵념을 바친 다음, 다시 기사 슈트에 올라 나머지 오크 잔당들을 쫓아갔다.


녹색 살덩어리들의 언덕 위로, 채플린의 시신은 언제까지고 그 자세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