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길을 막는 고블린들을 모두 먹어치운 그것은 방앗간 외벽에 달라붙은 다음 간단히 기어올라 앞을 막는 여장 위의 병사들을 집게발로 휩쓸어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외벽을 넘은 놈은 곧 안뜰에 발을 디뎠다. 병사들의 보잘 것 없는 공격은 놈에게 가벼운 타격조차 주지 못하는 듯했다. 위에 올라탄 고블린 추장이 이리저리 열심히 몸을 웅크리는 사이, 놈은 집게발과 꼬리를 이용해 적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그동안 전갈이 호흘란트인들의 방어선을 뚫고 지나간 자리에 고블린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파구의 양 옆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던 병사들이 침략자들의 물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전력을 다한 그들의 노력으로도 전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피와 땀으로 흥건한 절망적인 싸움의 와중에 마침내 방앗간의 방어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기적이라도 바라야겠구만, 또 다른 고블린을 향해 검을 내리치던 홀스트는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원래 앞일 같은 건 그다지 머리에 담아두지 않는 이였음에도, 불현 듯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이라는 깨달음이 가슴을 미어왔다.
살아왔던 그대로 죽음 또한 맞으리라. 싸워왔던 대로. 마지막 순간 그에게 일격을 먹일 고블린의 면상에 침을 뱉으며 그렇게 가리라.
조금이라도 그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수많은 오랜 친구들이 바로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르하르트, 리거 심지어 보엔 중사까지도. : 수년을 함께한 전우들. 그들 하나하나가 그에겐 왕이자 군주들이었다. 최후까지도 함께할 이들.
화약과 포탄을 가득 실은 무거운 짐마차가 진흙탕 길을 헤치며 굴러가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마차꾼과 몰이꾼들이 자꾸만 진창에 빠져 주저앉는 마차를 밀고나갔다. 열을 지어 포진하고 있는 중포들 사이로 제국 포병학교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고지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사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포수들 사이로 화롯불이 일렁이고, 중포 대열의 뒤쪽에선 청색과 적색의 알트도르프 문장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기술자들이 흉벽으로 보강한 포진지 속에서 박격포의 사각을 조정하고 있었다.
카스파르는 할버드와 빌훅, 장창을 가득 실은 마차를 피해 그의 흑색과 금색 깃발이 판터 기사단의 보라색 곤팔론 깃대 옆에서 휘날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군마가 기사단의 군마들 곁에서 보살핌 받고 있는 곳. 군마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는 쿠르트 브레멘의 종자가 보였다. 쿠르트와 기사들은 멀지 않은 곳에 둘러 모여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들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 카스파르는 가까운 불가에서 김을 내뿜고 있던 주전자를 따라 따뜻한 차 한 잔을 들었다.
털가죽으로 육중한 몸을 감싸 안고 있는 파벨이 불가에서 코를 골았다. 지난 수개월간 있었던 일들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카스파르의 마음속에선 애틋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키자 달달한 꿀이라도 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졸음이 가시면서 이 마당에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에게 저도 모르게 미소 짓는 카스파르였다. 시선을 든 그는 멀리 북쪽,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계곡 입구로 향했다. 대족장 엘프릭 시엔울프의 지휘 하에 4만 명에 이르는 북방 부족민들이 전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꼭 옛날 같구만, 안 그런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 독한 크바스가 담긴 가죽 수통에 손을 가져다 댄 파벨이 말했다. 한 모큼 길게 들이킨 그가 술푸대를 카스파르에게 권했다.
‘그래,’ 카스파르는 독주를 요량껏 들이켰다. ‘우리 둘 다 스무 살이나 더 먹은 것 빼고는 말이지.’
‘나이야 먹었지 그래. 더 지혜로워졌는지는 이 파벨도 모르겠네.’
‘자네 말에 반박하지는 못하겠군.’
‘놈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은 건가?’
‘아직.’ 카스파르가 말했다. ‘아직은. 허나 곧 시작될 걸세.’
‘놈들의 불알을 다 떼버리고선 다시 북으로 쫓아 보내세나!’
카스파르는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러길 바라네, 파벨.’
침묵이 두 오랜 친우 곁에 머물렀다. 입을 연 것은 파벨이었다. ‘우리가 놈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침묵을 지키던 카스파르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가 이길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 적들이 너무나 많네.’
‘얼음여왕께선 우리가 이길 거라고 하셨네.’ 파벨이 말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애잔한 뿔나팔 소리와 함께 카스파르는 양쪽으로 솟은 계곡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얼음여왕의 말이 맞기를 바라며. 군영에서 피어오르는 연무와 안개 속에서는 정상부에 우뚝 솟아있는 거석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계곡 전체의 이름을 지어준 바로 그 바위.
우르스제브야. 우르순의 이빨.
계곡 입구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듯한 함성소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대족장의 전사들이 검과 도끼로 철 테 씌운 방패를 두들겨대면서 내는 잔뜩 쉰 듯한 구호가 반복해서 메아리쳤다.
얼음여왕은 이 돌무더기가 싸워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 말했다.
카스파르는 이곳이 죽기에 모자람 없는 곳이길 바랐다.
처음부터 침묵에 잠긴 적의 군영 아래를 더듬어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선두를 이끄는 바니르의 경고에 따라 때때로 일행은 움직임을 멈추었고, 때로는 군영 사이를 오가는 소수의 전령이나 정찰대를 소리 없이 침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라익스그라드에 가까워질수록 적의 경계망은 더욱 더 조밀해져만 갔다. 포위선에 가까워졌을 즈음에는 공성병기를 조립하는 망치질 소리와 거친 음성으로 오가는 명령들이 사방을 메울 지경이었다. 일행의 이동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고 걸음을 멈추고 숨죽이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활로가 닫혀가고 있었다. 마침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바니르의 입에서 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보고가 흘러나왔다.
“하나도 없다고?”
“싸우지 않으면 없다.” 북방인의 무뚝뚝한 답변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드브레통은 멈춰 섰다. 이내 그는 반 헤르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씨와 제가 작별인사를 드릴 때인 것 같습니다. 강으로 내려가 요새까지 이를 길을 찾겠습니다. 싸워서 길을 뚫으시거나 차라리 우리가 넘어왔던 구릉지로 후퇴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해가 뜰 때까진 아직 여유가 좀 있으니까요.”
반 헤르츠가 답을 하기도 전에 일세가 앞으로 나섰다. “함께 말을 달리겠어요, 삼촌.”
“그래, 너라면 물론 그렇겠지 아가.” 노병은 웃음 지었다. 그의 시선이 바니르에게로 향했다. “뚫고 나갈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입을 다문 북방인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 “드브레통과 함께 가거라, 아가.”
일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산으로 몸을 피하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삼촌.”
반 헤르츠는 드브레통을 바라보았다. “말해보게, 양동이 도움이 되겠나?”
답변을 망설이던 드브래통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제 계획대로라면... 그렇습니다.”
“그럼 정해졌군.” 입술을 지긋이 누르는 반 헤르츠의 손가락이 터져 나오려는 일세의 절규를 막았다. “이 녀석아, 네 가문을 위해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이 늙은이가 보이지 않느냐? 이게 널 안전하게 보내줄 수 있는 마지막 임무라면 부디 날 막지 마려무나. 그래주지 않겠니. 이제는 배 속의 아이도 생각해야지.”
고개를 내저으며 반 헤르츠의 두 손을 맞잡은 일세의 두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거기다, 라이크 강 이동에서 제일가는 전사들이 머저리 같은 오크 몇 놈 휩쓸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 안 그런가, 제군들.” 근위병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지그마께서 함께하시길, 삼촌. 여러분 모두에게도. 라익스그라드에서 꼭 뵐게요.” 눈물로 얼룩진 미소와 함께 일세는 근위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저마다 고개를 숙인 병사들은 모시던 아씨의 안전한 여정을 빌었다. 억지로 눈가를 닦아낸 일세는 드브레통을 향해 몸을 돌렸다. “준비됐어요.”
“좋습니다. 오 분만 주십시오, 대장님. 그런 다음엔 전력으로 성문을 향해 달리시는 겁니다.” 드브레통과 반 헤르츠는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바니르, 자네는 어쩔 텐가?”
답 대신 말에 오른 바니르는 그의 도끼를 집어 들었다. “너는 숨고, 나는 싸운다.”
햄붕이들을 위한 또 다른 신세계를 기념하믄서~
농노는 상상도 못할 - dc App
포 앀마!!
포 앀마!
뽀 씍마, 예쓰!
ㄹㅇ 토갤에서 봤을때도 그랬지만 아련하고 뽕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