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이킥 훈련장으로 들어온 엘다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여성 엘다에게 다가갔다.
엘다의 인사에 그녀는 하던 청소를 멈추고 미소지으며 답인사를 했다.

"안녕."
"오늘도 혼자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넌 너무 열심이야."
"이게 내 길인걸."

엘다는 길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여성은 그런 엘다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괜찮아.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래."

그녀는 멈췄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다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옆으로 다가갔다.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며 엘다가 손을 뻗자, 여성이 그 손을 쳐냈다.

"안 돼."
"가끔은 괜찮잖아."
"제발,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

여성은 단호하게 말했으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다를 바라봤다.

"이건 내 길이야. 하지만 너의 길은 아니지."
"그야 그렇지만..."
"명심해. 길에서 벗어나지 마.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난 아직 명확하게 정한 길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다른 길을 마음껏 기웃거려도 된다는 건 아니야. 알지?"

그렇게 말한 여성은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엘다에게 청소도구를 내밀었다.

"이번 만이야."
"물론이지."

엘다는 살짝 미소지으면서 청소도구를 받았다.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그럼 그 웃음은 뭔데."
"글쎄? 그냥... 좋아서? 어쩌면 내 길이 너와 같을지도 모르겠네."
"신중하게 정하라고 했잖아."
"그냥 그렇다는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친우가 하는 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엘다는 하던 걸 멈추고 여성을 바라봤다.

"맹세코, 가볍게 생각한 적 없어."
"알아. 하지만... 하지만, 난 네가 너무 걱정돼."
"미안해."

엘다가 진지하게 사과하자,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아."
"그러지마. 내가 잘못한 거 맞아."
"솔직히, 난 널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어."

여성의 말에 엘다는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머니-물론, 엘다에게도 아버지가 있긴 했지만, 엘다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가 안치된 스피릿 스톤을 보고 온 엘다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하여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한참을 걸어 다니던 엘다는 문득 다리가 피곤해졌음을 느끼고 아무 계단에나 걸터앉았다.
다른 동족들이 그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지만, 그 누구도 엘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슬픔의 감정을 내비치는 엘다는 일종의 위험물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엘다는 고개를 양다리 사이로 파묻었다.

"저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엘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지금 청소를 하는 중인데요..."

크래프트월드의 상징이 그려진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성 동족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죄송해요. 조금... 지쳐서 그래요. 금방 비킬게요."

엘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다에게 여성이 말을 걸었다.

"아래쪽은 청소가 다 끝났거든요. 저기에 앉으셔도 돼요."
"아뇨, 저는..."
"괜찮으니까. 앉아 계세요."

여성의 말에 엘다는 잠시 서 있다가 그녀가 가리킨 의자로 걸어갔다.
계단의 아래쪽에서 엘다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족들이 계단을 오고가는 가운데, 여성 엘다는 그들의 이동 경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끊김 없이 계단을 청소해나갔다.
부드럽게 걸어 다니는 여성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등허리 부근에서 백금발의 머리가 흔들렸다.
엘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생각을 비워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를 마친 여성은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그동안에도 엘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기 직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네요."

여성이 엘다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이쪽은 그렇게 유동인구가 많진 않으니까 금방 끝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일찍 끝나니 기분이 좋아요. 알죠?"

엘다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동족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했으나 그녀는 엘다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신기한 일이죠. 이곳의 모든 것들은 선조들의 지혜와 재능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누군가 관리해 주지 않으면 조금씩 빛을 잃어가요."
"그걸 보통 신기하다고 하나요?"
"대다수는 그렇게 말하진 않겠지만, 전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낀 엘다는 고개를 돌렸다.
엘다가 고개를 돌리기 전부터 여성이 엘다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백금발에 어울리는 밝은 파란색의 눈동자가 엘다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라며 재촉했다.

"왜요?"
"그렇게 함으로써, 선조들과 제가 이어진 느낌을 받거든요."
"이 길을 만든 선조들과?"
"그리고 이 길을 걸은 모두와."

엘다의 물음에 여성은 한 마디 덧붙였다.

"스피릿 스톤에 선조들이 계시긴 하지만, 그곳에만 선조들이 있는 건 아니에요. 비록 우리가 서로 언어로써 대화할 수는 없지만, 모든 장소에는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흔적을 통해서 우리는 선조들을 만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선조가 우리를 미리 만나봤다는 건가요?"
"네. 그들은 분명 자신의 자손들이 자기와 똑같은 길을 걸으리라 믿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의 말과 표정에서는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그리고 당신과 저도 오늘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만났고요."
"무척... 시적이네요."

엘다의 말에 여성은 미소지으며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물어봤고, 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이 거리를 청소하시나요?"
"지금은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장소로 옮겨가겠지만요."
"다른 장소요? 그럼 이 크레프트월드를 전부 청소하시는 거예요?"
"저 혼자서 다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요."
"세상에, 어쩌면 당신 말대로 우린 예전에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엘다의 말에 여성은 재밌다고 느꼈는지 소리 내서 웃었다.

"어... 제 말이 그렇게 웃겼나요?"
"아뇨, 말이 웃겼다기보단... 음... 다른 이들은 모두 '대단하다, 고생한다.' 이런 감상만 말했는데, 당신처럼 말한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신선한 대답이에요."

이후로도 둘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엘다는 상대에 대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를 엘다에게 들려주었고 엘다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녀가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엘다는 분명 그녀가 깨어남의 길이나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자라고 착각했을 터였다.
그만큼 여성은 방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면, 저는 또 다른 선조들을 만나러 가봐야겠네요."
"오늘 일은 다 끝나신 게 아니었나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여성이 일어나면서 말하자 엘다가 의문과 아쉬움이 담긴 질문을 했다.

"오늘 일은 끝났지만, 내일은 또 다른 일이 있을 테니까요. 알죠?"

그렇게 말한 여성은 잘 가라는 인사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멀어져 가는 여성을 바라보던 엘다는 문득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슬픔이 남긴 작은 흔적이 엘다의 마음에 작은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에 선동된 엘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계단의 제일 윗단을 밟고 올라가려던 여성의 고개가 돌아가며 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그 자리에 밝고 파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여성은 반쯤 몸을 돌려서 아래쪽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다는 초조, 불안, 기대, 설렘이 섞인 눈으로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우리의 운명이 닿아있다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기억해.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어?"
"그날 넌 너무나도 불안정해 보였어."
"알아. 그리고 그런 날 구해준 건 너였지."

엘다는 손을 들어 천천히 여성의 볼을 어루만졌다.
여성은 그런 엘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내가 보기엔-"

엘다의 손길을 느끼던 여성이 그 손을 조심스럽게 떼내면서 말했다.

"-넌 아직도 그날의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았어."

여성의 말에 엘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 난 널 만난 그날에 깊은 슬픔을 떨쳐냈는걸."
"알아.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여성은 잠깐의 휴지를 둔 후에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것을 고백하듯 말했다.

"넌 너무 불안정해."
"난..."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말하려던 엘다는 자신의 손을 잡은 여성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살짝 휘어진 눈썹 아래 파란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걸 보고 나니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엘다는 입을 다물고 여전히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 '미안해.' '걱정하지 마.' '아니란 거 알잖아.' '아무렇지 않아.'
엘다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말들이 떠올랐으나, 그중에 어떤 말도 닫힌 입을 벌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 말들은 속에서 서로 뒤엉킨 채, 다른 말이 호흡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을 방해하며 엘다의 마음을 흔들었다.
엘다를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여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말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다양한 말들이 얽힌 덩어리가 전해진 감정과 함께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엘다의 마음 한구석으로 떨어지자, 하나의 말이 그 틈을 타고 재빨리 목구멍을 기어 나왔다.

"난 괜찮아."

엘다는 그렇게 말하며 여성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엘다의 손이 빠져나가자 여성의 손이 허리춤으로 되돌아가며 자연스럽게 말아졌다.

"난 괜찮아. 아직 나아갈 길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고작 백사십 년 인걸."

엘다는 정확히는 백사십 년 하고도 이 년이긴 하다고 덧붙이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먹혀든 건지 여성의 눈썹도 약간 펴졌다.
그런 변화에 안도감을 느끼며 엘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만간 길을 정할 수 있게 될 것 같아. 두고 봐."

엘다가 자신 있게 말하자 여성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골칫거리 하나가 사라진 표정인데?"
"음흠."

여성은 대답 대신 콧소리를 내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뭐야, 진짜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글쎄?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두고 봐."

둘 사이를 누르고 있던 공기가 가벼워짐을 느끼며 엘다는 장난기 담긴 목소리로 강조했다.
여성은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지금은 청소시간이라고 말을 돌렸다.
엘다는 말없이 여전히 자기 손에 들려있었던 청소도구를 들어 올렸고, 여성 역시 다른 청소도구를 꺼내 들었다.
청소를 하는 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엘다는 여성과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사이킥 훈련장은 꽤 넓은 데다가 그 특성 탓에 여기저기 상한 부분이 많았지만 둘은 금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얼추 다 끝난 거 같은데?"
"도와줘서 고마워."

엘다는 약간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했다.
여성을 그런 엘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짓했다.

"일로 좀 와봐."
"왜?"

엘다는 여성의 말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다가갔다.
여성은 엘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엘다의 얼굴을 잡고는 잡아당겼다.
쪽.

"히익?"

엘다는 자신의 볼에 갑자기 느껴진 말랑한 감촉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엘다의 반응에 여성 역시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며 엘다를 바라봤지만, 엘다는 그런 시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기 위해 엘다의 뇌가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심장은 펌프질과 함께 생각의 조각이 모일 때마다 흩어버렸다.

"미안해, 괜찮아?"

정신을 못 차리는 엘다에게 여성이 다가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했다.

"어... 응."

그 목소리에 어느 정도 진정된 엘다는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다는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혔고, 이 장소가 보호되고 있지 않았더라면 생각조차 해선 안 될 그것의 관심을 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엘다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걸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몬-카이들은 동성끼리 이렇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한다고 들어서... 미안해."
"아니, 아냐. 괜찮아. 응. 그냥 놀라서 그래. 응, 미안해할 것 없어."

엘다는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사과하는 엘다에게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괜찮다는 말을 연발했다.

"너도 그냥, 어... 고마워서 그런 거잖아. 그치? 다른 의도는 없고."
"응. 맞아."
"아하하, 혹시라도 네가 날 좋아하나 했어."
"아냐,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엘다의 말에 여성은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친구로서 좋아하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 둘 다 여자잖아. 다른 의미는 없었어. 알지?"
"그래, 우리 둘 다 여자지. 하하하."

엘다는 여성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난 널 좋아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생각을 하던 엘다는 두 눈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윽?"
"아이고, 깼나?"

엘다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통증에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렸지만, 엘다는 어지러움과 두통을 느끼며 몸을 옆으로 굴렀다.

"어이쿠, 조심해!"

엘다가 굴러떨어지기 전에 받아낸 인간이 말했다.
인간의 팔에 안겨 머리를 누르던 엘다는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방에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뭐가 들어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합성소재 상자들이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스위치 아래에 쌓여있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작은 문을 통해 아마도 우주선의 조타실로 보이는 장소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엘다의 눈에 인간의 맨어깨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에 고개를 살짝 들자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엘다는 그 즉시 인간을 밀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간은 뒤로 물러나려다가 바닥에 놓인 물건에 걸려 억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바지만 입은 체 상의를 오른손에 쥐고 바닥을 구르는 인간을 보던 엘다는 그제야 자신이 이 인간과 같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도망쳤다는 걸 기억해냈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엘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목 부분을 더듬자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그 감촉에 솟아오르는 짜증을 억누른 엘다는 옷으로 몸을 가리며 엉거주춤 일어나는 인간에게 물어봤다.

"몬-카이, 여긴 어디지?"
"내 우주선. 잘 주무시더만, 잠자리가 몸에 맞긴 했나 보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냐?"
"언제를 기준으로?"
"...내가 정신을 잃은 뒤."
"아마 30시간 정도."

인간은 아니면 31시간이라고 덧붙였다.

"걱정 마. 바이크에서 널 옮길 때 빼고는 네 몸에 손 안 댔으니까. 아, 방금 전은 그냥 실수였어."
"방금 전?"

엘다가 무슨 소리인지 되묻자 인간은 괜히 말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거기에 걸어둔 내 옷 꺼내려다가 실수로 네 얼굴을 때리긴 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엘다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인간에게 머저리라는 속성을 새로 부여했다.
뭔가 계속 중얼거리며 변명하는 미치광이-머저리에게 엘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
"사람이 모이는 장소면 언제나 생기는 곳으로."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다, 몬-카이."

그렇게 말하며 엘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인간은 재빨리 자신의 목을 감쌌다.

"암시장! 암시장에 가는 거야."
"왜지?"
"왜긴, 너 때문이지."

인간은 그렇게 말하며 목을 감싼 자신의 손을 다른 손 검지로 툭툭 찔렀다.

"그 폭탄 목걸이 사 온 장소거든. 그러니 거기에 가면 그걸 풀 방법도 알 수 있을 거야."
"폭탄?"
"어. 폭탄."

인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다는 즉시 눈앞에 있는 인간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인간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널린 물건들과 부딪혔다.
엘다는 곧바로 넘어진 인간의 옷 위로 가슴을 밟고 서서 으르렁거렸다.

"그런 걸 나한테 채워? 분명 안전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으으... 안전 때문에 채운 건 맞어... 내 안전... 아아악!"

인간이 변명하듯 말하자 엘다는 인간을 밟은 발을 좌우로 비틀었다.
살이 비틀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인간은 엘다의 발을 붙잡았다.

"그래, 날 죽일 생각이었군, 몬-카이? 그럼 네가 죽어도 별로 할 말은 없겠지."
"아악! 내가악!! 너도옥!!!"

엘다가 인간을 짓밟은 발에 힘을 주어 누르자 인간은 비명인지 말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그 비명에 효과가 있긴 했는지, 엘다의 발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 죽으면 엘다도 죽는다는 말을 기억해낸 엘다가 입을 열었다.

"왜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거지?"
"내가 죽으면 그 목걸이가 터지게 되어있어."

인간은 아직 가시지 않은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했다.

"네가 죽은 걸 어떻게 알지?"
"네가 밟고 있는 센서로."

그 말에 엘다가 발로 인간의 위에 덮인 옷을 치우자 명치보다 약간 왼쪽에 심겨 있는 작은 센서가 보였다.

"너!"

하지만 엘다는 그 센서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인퀴지터였나?"

인간의 가슴부터 배까지 그려진 가운데에 해골이 박힌 붉은 기둥 문신을 본 엘다가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높으신 분으로 보였나?"
"제대로 대답해라, 몬-카이!"

엘다는 다시 인간을 밟으려 했으나 이번엔 인간이 재빨리 자신의 손을 끼워 넣었다.

"아뇨! 인퀴지터가 아닙니다!"
"정말이냐?"
"네! 봐요! 문신도 좀 다르다고요!"

그 말에 엘다는 다시 문신을 잘 살펴봤다.
붉은 대문자 I 모양의 기둥 정 가운데에 그려진 해골문신이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인퀴지션의 문양과는 달리 가로로 그어진 세 줄이 없었다.
그걸 확인한 엘다가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자 인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멋있지? 아아아!"
"넌 학습 능력이 없나?"
"아파! 아파!"

엘다가 자신의 신세를 망각하고 헛소리를 하는 미치광이의 손을 짓밟자 머저리는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 네 심장이 멈추면 터진다고?"

잠시 후,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하면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게 해주겠다고 인간을 교육한 엘다의 질문에 인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진부하군. 그럼 그 센서를 뽑으면 되나?"
"아니, 그래도 터질 거야."
"그럼 이 목걸이를 힘으로 제거하면?"
"그래도 터지지."
"사이킥 에너지로도?"
"물론."

인간의 말에 엘다가 인상을 쓰자 인간이 재빨리 말했다.

"좀만 참으라고. 어차피 곧 풀 수 있을 테니까."
"이걸 풀어준다고 어떻게 믿지?"
"아직까지도 안 터졌잖아?"
"뭐?"
"그거, 내가 원하면 터뜨릴 수 있어."

엘다가 생각지 못한-아니면 생각하지 않은-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살짝 벌리고 인간을 내려다봤다.
인간은 엘다가 놀란 틈을 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다는 인간이 일어나자 경계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간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옷을 주워든 다음 몇 번 털어내고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푸하,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옷 구멍으로 머리를 빼낸 인간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엘다를 향해 말헀다.

"아니,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는데..."

엘다는 대답 대신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워, 워. 진정해. 난 너랑 싸울 생각 없으니까."
"...그럴 가치도 없다는 건가?"
"왜케 사람이 부정적이야? 아니, 사람은 아닌가? 아무튼, 여기서 너랑 싸워봤자 내 우주선만 터져나가지. 그러니까 잠시 휴전하자고."
"휴전이라 함은, 나중에 다시 싸우잔 말이군?"
"아니라고! 좀!"

엘다의 말에 인간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널 풀어주면 내가 맞아 죽을 게 뻔한데 그때 가서 너랑 싸우려 들겠냐?"
"자기 분수는 아는군, 몬-카이."

엘다의 말에 인간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상자를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엘다도 팔을 내리면서 조금 전까지 누워있었던 침대에 걸터앉아 인간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인간은 상자에서 꺼낸 걸 엘다에게 던져주었다.

"받아."
"이게 뭐지, 몬-카이?"
"밥. 일단 먹자고."

엘다는 인간이 자신에게 던져준,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녹색 직사각형 모양의 물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봤다.
그사이 인간은 다시 상자를 뒤져 엘다에게 준 것과 똑같은 것을 꺼낸 다음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자, 아가씨. 이건..."

인간이 엘다를 부르면서 어떻게 먹는지 알려주려 했으나 엘다는 인간의 말을 무시한 채 손톱을 찔러넣어 포장지를 찢었다.
찢어낸 포장지를 아무 데나 집어 던진 엘다는 연갈색 블록을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뭔지 모를 고기 맛이 약하게 나는 블록은 살짝 촉촉했으나 쉽게 바스러져서 입안을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음식을 씹어 삼킨 엘다는 남은 포장지를 더 벗겨내서 베어 물기 시작했다.

"...잘 먹네."

인간은 작게 중얼거리고는 자신도 포장지를 뜯어 한 입 먹으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블록을 반쯤 먹은 엘다는 인간이 말을 하자 입안의 음식을 씹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엘다도 똥오줌을 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