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말하면서 ‘무적의 요새’를 ‘심장의 군주’ 위로 움직였다. 계시가 고개를 끄덕여 다음 카드를 말카도르에게 재촉했다. 은빛이 드리워진 카드를 뒤집자 카드의 얼굴은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청록색으로 물들었고, 곧 히드라의 모양으로 변화했다. 다음 순간, 두 개로 나뉘었던 ‘쌍둥이’는 모두 붉은색으로 변해 워마스터에게 합류했다. 그러자마자 말카도르의 눈에 훤히 보였다. 지금 당장 ‘쌍둥이’ 중 하나를 움직여 ‘무적의 요새’가 점하고 있던 위치로 보낸다면, 항복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 저를 대신하여 부정을 범하시나이까?”
말카도르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수치심은 계시에게 짧디짧은 미소를 이끌어 냈다.
“왜 히드라 카드가 단 한 장 뿐이라고 생각했더냐?”
다음 넷을 집은 계시는 바로 그의 섭정을 부추기듯이 말을 움직였다. 네 말은 모두 수많은 머리를 가진 용의 형체를 취했다.
말카도르가 움직이기 전, 계시는 빠르게 게임판의 형체를 바로 이전으로 뒤엎었다.
“하지만 이것은 짐의 방식이 아니다.”
계시는 ‘그림자’를 포위된 지점에서 미끄러뜨려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모루’를 버리셨나이다.”
말카도르가 가리킨 끝에는 수많은 말카도르의 말 사이에 갇힌 채 홀로 서 있는 형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 순간을 이미 알고 있지 않더냐.”
말카도르는 한숨을 내쉬며 유일하게 가능한 수를 뒀다. ‘눈먼 어둠’이 움직여 ‘모루’를 제거했다. 말카도르가 조각을 테이블에서 치우자, 계시는 다음 크리스탈 카드를 꺼냈다. 귀환 카드였다. 계시는 말카도르가 비어 있다고 생각한 게임 상자에서 새로운 ‘모루’를 꺼내 판 위에 올렸다. 시길라이트에 시선이 고정된 채, 계시는 귀환 카드를 덱의 끄트머리에 밀어 넣고 셔플했다. 아까 말카도르에게 했던 말과는 반대되게.
다시 한숨을 내쉰 말카도르가 다음 수를 생각했다. 마치 계시가 선택의 여지를 주기라도 할 거라는 듯이.
게임은 지난 수백여 판과 똑같은 양상으로 계속되었다. 말카도르는 다른 움직임으로 계시의 말을 취하려 했지만 계시는 카드와 말을 교묘하게 활용해 계속 원래 위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계시는 ‘도서관’을 말카도르의 본진에 밀어 넣어 ‘잘못된 방향’과 ‘떨어지는 검’을 움직일 것을 강요하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굶주린 늑대’를 통제해 기동을 가로채려 했다. 게임판의 반대편에는 ‘천사’, ‘왕관 없는 군주’, ‘양날의 검’이 ‘선택받은 자’와 ‘무의 왕’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계시는‘눈먼 어둠’이 초래한 혼란 속에서도 지연시키기 위한 기동을 성사시켰고, ‘눈먼 어둠’이 포획되며 혼란은 잠시에 그쳤다.
그동안 게임판은 수많은 카드와 놀이말로 점철되었지만, 오직 ‘그림자’만이 자유롭게 움직임을 이어갔다. 하지만 공세 초기에 탈출하는 동안 붙은 의심 카드가 ‘그림자’의 힘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때로 계시는 패배를 향해 플레이하듯 움직였다. 계시의 포진은 잠시 동안은 취약해 보였다. 하지만 움직임이 거듭될수록 말카도르는 점차 자신이 포위되고 있음을 느꼈다. 워마스터 진영에 남은 선택지는 오직 직접 공세를 통해 게임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이제 공격적인 행동 외에 옵션은 없었다. 워마스터는 수적으로도 우세했고, 포진의 위치에서도 이점을 가져갔다. 하지만 계시는 아직 펼치지 않은 카드를 쥐고 있었다. 말카도르의 덱은 이미 단 한 장을 제외하고 모두 사용된 채였다. 말카도르는 마지막 카드를 ‘구름의 군주’에게 사용했다. 다음 순간 말카도르가 눈을 깜빡이며 다시 카드를 확인했다. 달랐다, 지난 게임들과는. 장벽과의 정면 충돌이 아닌, 양식화된 심장을 파먹으며 기어나오는 구더기였다.
“부패.”
자기도 모르게 말카도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생각이 길을 잃었다. 말카도르는 고개를 든 채 온 신경을 게임판에 집중했다.
계시는 거의 우연처럼 투박하게 펼쳐진 조각들을 깊이 연구했다. 말카도르는 동작을 취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나를 만족시키소서. 거의 황홀경에 빠진 채 말카도로의 눈이 조각 하나하나를 향했다. 테이블에 거의 못박힌 그의 손끝 너머에서 티없는 창백한 손톱 너머 옻칠한 나무가 비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니이까?”
말카도르가 물었다.
“계속 두어라.”
계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게임이 변했사옵니다. 어째서니이까?”
말카도르의 눈 앞에서 하품의 기색이 느껴졌다. 답을 찾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그 답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경계심이 치밀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게임은 그가 정확히 예상한 대로 움직였다. 어쩌면 그저 전쟁의 혼란에 빠지기 전의 상태를 다시 살피며, 익숙한 교류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무슨 뜻이니이까?”
계시는 집중을 풀었다. 말카도르의 눈에 계시의 슬픔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계시의 얼굴은 무표정한 노려봄으로 채워졌다. 계시는 거의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이를 가는 듯이 말했다. 지루함으로 가득한 눈이 테라의 하이 로드를 응시했다. 날카로운 두 마디가 똑똑히 떨어졌다.
“계속, 하라.”
하지만 말카도르의 다음 수는 산만했다. 그가 지금 본 사건들을 삭여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제대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는도다, 워마스터.”
계시가 분노로 가득한 눈길로 말카도르를 쏘아보았다.
“네가 이기지 못하면 영영 저주받을 것이리로다.”
섭정은 창백해졌다. 지금 주군은 말카도르에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카도르가 맡은 역, 워마스터에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말카도르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의 주군이 호루스가 충성의 길을 떠나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소용돌이 전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는가? 그는 모든 것을 알지만, 모든 것을 감추는 광기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 순간 계시의 연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는 말카도르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지금 계시는 앞으로의 결과를 내다볼 수 없는 미지의 바다 속에 놓여 있는 것인가?
말카도르는 이 게임을 통해 궁지에 몰려가는 것으로 보이는 황제가 테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궁극적으로 호루스를 어떻게 패퇴시킬 것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황제가 황금 옥좌를 지키는 동안 그의 카드를 통해 말카도르가 인도받은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섭정은 이제야 깨달았다. 불멸하실 인류의 통치자께서 이번 게임의 움직임으로부터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워마스터로서, 말카도르는 계시의 생각을 시험해야만 했다. 호루스가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할 것처럼.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나이다.”
말카도르가 판 위에서 손을 치웠다.
“짐을 위해 네가 무엇을 줄 수 있더냐?”
무릎에 손을 얹은 계시가 시길라이트를 응시했다.
“제 삶을 바쳤나이다.”
“이미 짐에게 준 것이 아니더냐.”
“현학적으로는, 저의 죽음까지 주군께 바쳤나이다.”
“너의 영혼은 어떠하더냐.”
“존재치 아니한다 하셨나이다.”
“시간이 촉박하도다.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겠노라. 너의 영혼은 너에게 얼마만한 가치가 있겠더냐?”
“물으신 바를 미욱하여 알지 못하나이다.”
주군의 시선 아래 불편함을 느낀 말카도르가 다시 게임판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는 호루스와 같이 시행할 수 없나이다. 역적의 마음과 뜻을 제가 알지 못하옵니다.”
“그럼 짐이 너를 돕겠노라.”
계시가 상자 안에 손을 넣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말과 함께 손이 빠져나왔다. 우둔한 표정을 한 고대의 광대와도 같은 형체였다. 계시가 말을 흔들자 모자에 달린 털공이 튕겼다.
“이것이 너이노라, 말카도르. 광대. 짐은 너를 수천 년 동안 내 목적에 맞게 써 왔으며, 내 책무가 끝나기 전 너를 다시 생각조차 않고 버릴 것이노라.”
“주군의 뜻하심을 알겠나이다. 제가 호루스와 같이 분노함을 원하시나이까?”
“너는 내 야심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냉엄한 역사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을 것이다.”
계시는 말카도르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짐의 불멸의 영광이 될 제국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기반암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짐은 너를 만난 순간부터 거짓으로 임했으며, 네가 품은 짐에 대한 믿음은 모두 거짓이다. 우주와 인류의 생존에 대한 너의 모든 믿음이 허구이다. 짐은 너를 조종했고, 마음대로 남용할 것이며, 너는 짐의 관심을 끌지조차 못한 채 버림받을 것이다. 내 군단원 한 명이 자신의 볼터탄에 기울이는 정성이 짐이 너에 기울이는 것보다 더 클 것이로다.”
역시 도발도 황가놈답게 하네ㅋㅋㅋㅋㅋ
풀버전으로 읽고 느낀건 저 황제의 도발은 말카도르가 아니라 호루스를 겨냥하고 말하는것 같음 혹은 중의적이거나 - dc App
호루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 그런가봄
모루=불칸이고 구름의 군주=모타리온이고 굶주린 늑대=러스인데 도서관이랑 떨어지는 검이랑 잘못된 방향은 뭐지
번역자인데 나도 그게 좀 애매해서. Library/misdirection/falling sword인데 이게 카드의 내용인지 아니면 놀이말을 가리키는 건지 모르겠더라. 원문 다시 살펴보겠음.
다시 보니까 내가 카드 내용을 오역한 게 맞는 것 같음.
황가놈 도발ㅋㅋㅋ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