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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의 요새 안에는 일순간 죽음의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의 자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나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은 없다. 카스텔란의 상징으로 하사받았던 그 검이 내게 붙어있었다는 점은 여전히 익숙한 감각은 아니었으나 저기 스스로 낯선 손님이라고 자칭한 엘다 녀석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오히려 이 검이 더 나을 것이다. 수많은 세월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검은 슬레이어 공에게 귀속되어있으며 이 자리엔 황제 폐하의 발톱이라 불리는 아뎁투스 쿠스토데스도 있기에 걱정 삼을 건 없겠지.

조금이라도 걱정 삼을 것이 있다면 저기 손님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저들도 역시 무장은 갖췄으나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경계만 할 뿐 무기를 직접적으로 겨누지는 않았다. 아주 약간은 이 파멸의 요새 내부를 곁눈질로 훑어보는 듯 하다가 자신들을 이끌어 서있는 자와 대면중인 슬레이어 공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대공은 저 손님들을 경계하긴 했으나 인니드의 사도라 밝힌 자가 조용히 제안을 하자 '말 해볼테면 해 봐라' 하는 식으로 고요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악마에게 파멸을 전하는 학살자(Slayer)여, 그대에게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여성 엘다는 자신을 낮추거나 높히지도 않았다. 특유의 붕 뜬 어조를 유지하면서도 제국의 하이 고딕어를 발음한 그녀는 슬레이어 공과 대등한 시선에 서 있으나, 조금은 불리한 위치에서 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말했으며 엘다가 하고자 한 말은 이러했다. 워프 속 카오스 세력의 멸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목마른 그녀라고 칭해지는 슬라네쉬의 파멸을 원하는 자들이라고. 대공의 손을 빌리고 싶다는 의사 표명을 하다가 온전히 모든 도움을 받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로 가는 길목을 트는 것을 조금만 손 대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과연 저들이 말하는 대로 될지는 미지수. 저 엘다도 온전히 신뢰를 얻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는지 슬레이어 공에게 말을 덧붙였다.


"죽음의 신의 사도로써, 그대가 잃은 것을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학살자 그대에게 드리는 답례입니다."


 그리 덧붙이며, 슬레이어 공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알고 있다. 저 엘다가 보고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대공께서는 푸르스름하고 투명한 영체의 형상을 취한 존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으며, 미동 없이 서있는 듯 했던 저 영체 또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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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레이어 공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다섯의 푸른 영체를 엘다에게 소개시키듯, 고개를 돌려 그 여성 엘다를 쳐다보았다. 대공이 장착하고 계신 갑주, 그리고 헬멧의 불투명한 녹색 렌즈 너머로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그 여느 유리수정보다 깨끗하며 작은 탐조등을 연상케하는 눈빛만은 선명히 드러나며 이렇게 물어보는 듯 했다. '정말로 가능한가?' 하고. 반신반의함과 경계심이 섞인 그 눈빛을 받던 엘다는 믿음을 달라고 말하듯 눈을 지긋하게 천천히 내리감으며 작게 고개를 숙이더니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먼저 슬레이어 공께서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서는걸 보고서야 우리도 그를 따라 물러섰고, 여전히 경계하는 시선을 쏘아보내던 -저 사도를 제외한- 엘다들도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무기를 수납했다.


 그리고 요새 내부 공기를 무겁게 채운 것은 죽음과 생명의 바람이었으니.


 푸른 연막과 같은 에너지에는 미세한 사이킥이 담겨있었다. 그 에너지에 휩싸인 영체들이 작은 소용돌이 속에 삼켜졌으나 그것도 잠시 뿐,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다섯 명의 건장한 남성, 인간 남성들이다. 에너지가 걷히자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근육은 섬세히 조각된 듯 완벽한 밀도를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몸을 처음 보는 것 처럼 두리번 거리는 그 당혹감 섞인 눈빛 깊숙한 곳에서는 깊은 심도를 지닌 전사로서의 결의가 엿보였다. 다섯 명은 확장된 동공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물기 없는 감격에 찬 표정을 짓다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하였듯이 일제히 슬레이어 공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는 것을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전사로서 맹세를 하는 행위.


'그렇군, 슬레이어 공은 저 자들의...'


 오점 하나 없는 육체와 깊은 곳에서 용광로처럼 맥동하는 용기를 지닌 전사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온 왕에게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맹세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무릎꿇은 다섯 전사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대공께선 여전히 그 조용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셨으나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되는 나, 침묵의 자매, 커스토디안 가드는 슬레이어 공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감정이 그의 몸 표면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알고는 그가 지금 하고 있듯, 침묵으로써 그를 존중했다.

 대공은 앞의 다섯 전사들이 조용히 감격하며 기뻐하고 있듯이 어깨를 미세하게 떠는 모습으로 자신은 엄청난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나 우리가 대공을 존중하듯, 대공께서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맹세를 하고 있는 전사들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중해줄 뿐이었다. -잠깐이나마 기분이 풀리셨는지- 떨림을 멈추고 자신의 문양이 새겨진 메달을 소환해 전사들을 향해 내밀자 메달이 승화하듯 바스라졌고 그의 손에서 메달이 사라져감과 동시에 전사들에게 붉은 색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르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퍼즐 조각을 끼워맞추듯 청백색의 금속빛을 띈 갑주가 되어 전사들의 육체를 가려주었다.


 본연된 전사로서의 모습을 갖춘 다섯 전사들이 무릎을 꿇어 맹세를 하던 순간처럼 동시에 일어나 오른쪽 손으로 무언가를 쥐는 흉내를 내며 위로 손을 치켜들자, 슬레이어 공 역시 그들에게 화답하듯 -붉은 날의- 애검을 꺼내들어 그들의 손과 높이를 맞추었다. 그 순간 전사들의 손에는 대공의 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에너지 날을 지닌 매끈한 금속 색의 창이 생성되었고 에너지 날들이 금속의 충돌음을 내자 다섯 전사들, 그리고 슬레이어 공도 함께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Rip and Tear!"


 전사왕, 슬레이어 공은 전사들을 이끄는 왕이었고, 불멸하여 지속될 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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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 끝났어도 될 일이었으나, 저 엘다가 사적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면서 외계 행성의 토착종과 -새끼 고양이 같은- 제노 짐승들을 꺼내보이자 그 짧은 구호 한마디 빼고는 일관된 침묵을 유지하던 슬레이어 공이 가볍게 전율하듯 몸을 떨고는 저 짐승들을 향해 손을 뻗어보려다 저것들 중 한마리가 구슬같은 눈망울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자 순간 심장 부위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며 주춤했다.


"슬레이어 공?!"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는 갑작스런 행동에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커스토디안 가드가 놀란 듯 높아진 어조로 대공을 불렀다.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 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긴 했는지 슬레이어 공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잡으려다가 순간 제자리로 돌아오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과 침묵의 자매가 목을 가다듬으며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광경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대공께 했던 침묵의 맹세가 깨질 일은 없다는 것 덕분에, 여기 있던 자들만이 기억할 수 있는 한 순간 찰나의 해프닝 중 하나로 남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는게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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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재밌는 소재가 나왔는데 어떻게 참냐고! 도저히 안쓰고는 못 배기겠더라... 그래서 써왔음!


이번에는 가란 크로의 시점으로 써봤음, 왜? 그림에 나오는 저 스페이스 마린이 가란 크로 아니면 누구겠어 하는 직감이 팍 하고 오더라. 저 상황 속에서 말 한마디는 없지만 잡다한 생각은 많았던 크로...하긴 오랫동안 말을 못했으니 속으로 생각하는게 많아지는 건 당연하지.


마지막 구간 쓰면서 맘 편하게 썼음, 아 ㅋㅋ 우주 떼껄룩은 못 참지


이번 글도 읽어줘서 고맙고 댓글도 써주면 정말 고마울것 같아! 창작자들에겐 감상평 한마디가 정말 도움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