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와 새로운 거인.

뉴욕은 미합중국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항구였다. 1900년 한해에만 100만명이 엘리스섬이라 불리는 가축 우리를 통과했고 아메리카의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오래되고 존중받을 만한 주민들인 본토박이 뉴요커들에게 이 이민들은 경멸스러운 외국인일 뿐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펼친 헨리 제임스조차 그들의 정당한 가치, 다개국어가 통용되는 새로운 아메리카에 대한 그들의 기여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1843년에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는 유럽의 아들이었다. 이미 그는 유럽으로 넘어가 20년 정도를 뉴욕을 떠나 살았기 때문이다. 1904년 몇십년만에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온 그는 '이빨 빠진 빗'처럼 들쭉날쭉한 지평선을 가진 뉴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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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이스트사이드의 '인구 밀도 높은 이디시어(동부 유럽의 유태인이 쓰는, 독일어 방언과 히브리어의 혼합어)동네' 한복판에 살던 그는 그것에 대해 매력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결국 그는 놀랍게도 뉴욕이 점차 히브리어 점령지대로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제임스는 모던한 사람이었지만 한쪽 발은 여전히 19세기에 걸쳐놓고 있었다.


그에게는 선구적인 도시의 징조들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다. 귀족적인 정서에 푹 빠져 있던 그는 서민에 대해서, 심지어는 이민들의 언어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허나 그의 우려와 달리 이민자들은 아메리카의 언어를 풍부하게 해주고 아메리카의 방언에 더 깊이 파고들었을 뿐 그것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상류계급의 멜로디를 대체한 '톱니 모양의 이 거대 도시'가 그는 편하게 여겨지지 않았나보다.


그런 생각을 가진것은 헨리 제임스뿐만이 아니었다. 1905년에 뉴욕 타임즈는 '이민의 위기'가 '조만간 미국인들의 생존과 미국의 진보의 원천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헨리 제임스도 뉴욕 타임즈도 이 외국인들이 뉴욕을 어떤 방향으로 변모시킬지 두려워할 뿐 그들이 행할 진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뉴욕은 개인의 출세 능력이 예의범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그리고 이민자들의 생존에 대한 욕망과 의지가 기존 사회질서를 전복시켜버린 세계 최초의 도시다.


뉴욕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아무 연줄도 없이, 영어 단어 하나 모른 채 배에 타고 엘리스섬에서 내린 남자는 학자나 사기꾼으로 변신할 수 있었고, 먼지구덩이 속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뉴욕은 탐욕스런 사업가와 노점상들, 부자와 가난한 사기꾼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도우보이.

1914년 뉴욕이 아직 자신의 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일 때 유럽은 병사들을 계속 출정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말들이 탱크를 공격하고 조종사들이 서커스와 흡사한 공중전을 벌이는 집단 자살 속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미합중국은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대로 '확고한 민주주의의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이 광란의 극에 뛰어들었다. 독립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에 그랬던 것처럼 뉴욕은 다시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미군들은 뉴욕항에서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탔다. 미합중국도 뉴욕도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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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땅에 당도한 뉴욕 양키들은 엄청난 충격을 경험했다. 도우보이(원래 '삶은 만두'란 뜻으로 제1차 세계대전중 유럽에 있던 미국 병사들을 일컫는 말)들에게 19세기의 중심지였던 유럽은 천국처럼 보였다. 그들은 물론 전투에서도 용맹했지만 가끔 운이 좋을 때는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며 유럽 선진문물들을 마음껏 접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 도우보이에게 위기가 왔다. 이들은 유럽뽕에 취한 나머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파리에는 유령같은 미국 병사들, 이 새로운 백수들이 넘쳐났다. 그들 중 일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도둑질을 하거나 소설을 쓰기도 하는 등 각자의 방식에 맞게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이들을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로 지칭하기까지 했다.







월리단길의 등장.

프랑스와 독일이 붕괴하는 동안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월스트리트는 희망에 부풀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뉴욕 증권거래소가 1972년 버튼 우드 협정을 통해 시작된 이래, 미국 자본시장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투자자들의 돈을 더 많이 유입시켰다.


주식투자로 큰 부를 쌓은 월스트리트의 전설적 영웅들인 J.P. 모건, 제이 굴드, 반더빌트 등의 성공은 월스트리트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1900년대의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무질서한 시장체제를 보였으며, 이러한 무질서는 1929년의 대공황과 함께 미국 전체의 시장에 많은 피해를 끼치게 된다.


남북전쟁이후 불안한 미정세는 보험 산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특히 생명보험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1910년 이전에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의 투기로 인해 미증시에 두번의 공황이 발생했는데, 첫번째 공황은 1903년 US 스틸의 투기결과로 발생했고, 두 번째는 1907년 발생하였다. 두번에 걸친 공황까지 월스트리트의 독보적인 금융가이자, 훌륭한 대변자 였던 JP모건이 많은 일들을 하였고, 1913년 3월 31일 사망함으로써 월스트리트는 당대 최고의 금융인을 잃게 되었다.


JP 모건의 사망한 지 12 시간만에 3천 6백통이 넘는 조문이 세계 각지에서 교황,황제, 수상등 당대 최고의 인물들로부터 답지 했을 만큼, 모건은 월스트리트의 상징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모건은 살아 생전에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요트등 초호화 취미생활을 즐겼지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져있다. 그는 미국 경제와 기업 구조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명예와 영향력을 얻었으며, 이는 금전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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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모건 은행은 모건 사망이후에도 미국 최고의 투자은행으로써 명성을 유지하지만, 모건 히후 현재까지 월스트리트에 JP모건만큼의 엄청난 명성과 영향력을 갖춘 사람은 등장하지 못했다. 아들인 잭 모건이 아버지 JP모건의 비즈니스를 계승했으며, 잭 모건 또한 월스트리트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1912년은 영화로도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였던 해이며, 이시기 월스트리트도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1914년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의 상충으로 발생한 1차 세계 대전은 유럽으로부터 떨어져있던 미국을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전쟁특수를 누렸고, 뉴욕은 국제 금융의 수도가 되었으며, 월스트리트는 세계 경제의 심장부로 우뚝솟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의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적 특수를 누렸으며,이 기간 많은 기업들이 평시보다 수십에서 수백배가 넘는 생산주문을 받아 크게 성공하는데, 데표적인 예가 듀퐁이다. 듀퐁은 조금만 화약 제조 업체였으나, 연합군 군수 납품으로 평시보다 276배나 많은 전쟁물자 주문을 받고 종합 화학 회사로 발돋움했다.


1차 세계 전쟁 당시 영국의 반대편이었던 독일이 베들레헴 철강 회장이었던 찰스 슈왑에게 당시 시세보다 2배 높은 1억달러에 베들레헴을 매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찰스슈왑은 거절 하였고, 이는 월스트리트에 신의를 존중하는 하나의 기념비적 사건이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은 영국과 프랑스가 전비에 허덕이며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을 진정한 승리자로 만들며 초강대국의 위치에 입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울러 뉴욕 증권거래소를 세계 최고의 거래소로 만들었다.


월스트리트는 예로부터 테러의 주요 공격목표에 해당하였는데, 1916년 월스트리트에 독일 간첩에 의한 대형 테러 폭파 사건이 발생하여, 월스트리트의 건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1921년에는 JP 모건 건물이 위치해 있는 월스트리트와 브로드 스트리트 코너에서 폭탄이 터져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범인 체포에 실패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1919년부터,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할 때까지 월스트리트를 호황국면을 맞았으며, 이시기에 미국인들은 새로운 경제 번영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1920년대는 뉴욕 증권거래소가 조직의 내부자들에게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주는 시스템으로 운영했던 시기에 해당하며, 마피아의 대명사이자 보스였던 알카포네가 활동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이며, 1920년에는 찰스 폰지의 등장으로 월스트리트에 투기 바람이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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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는 1920년도 들어 주식과 채권의 거래가 크게 증가하였고, 여러 금융 상품들이 개발되었다. 다우존스 산업 지수는 1928년에 30개의 주식이 거래되었으며, 지수의 종목수인 30개는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제너럴 모터스의 창립자인 빌리 듀렌트는 192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주식 투자가 였는데, 1920년대 초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나와 주식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거래인들의 도움을 받아, 몇 년 안에 그당시 돈으로 1억 달러 이상 벌어들임으로써 월스트리트의 전설이 되었다.


자동차 비즈니스에서 주식투자로 전환하여 부자가 된 빌리 듀렌트의 성공신화는 주식투자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빌리 듀렌트는 인위적으로 주식 시세를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투자모임을 만들어 실제로 주식시세를 조작해 엄청난 부를 일구어냈다.


1920년대식 투자는 투기를 위한 투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주식 시세를 움직여 수익을 내는 방법이 성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