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로 쓸모없고 유치한 유희왕조차도 삶의 의미인 변화의 의지가 될수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결과가 어떤지보다 그 행위를 대하는 태도가 나의 의지를 가치롭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나를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생각했다. 그건 선천적인 멍청함과 주변환경의 스트레스로 인한 깊은 정신병 때문일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정신의 혼란에 기인한 거식증을 연상시키는 극심한 거부와 방황이 내게 이상한 종류의 선명한 시야를 제공했다. 지나친 오염에 반응해 무의식중에 작동한 일종의 정화라고 볼수도 있겠다. 오염되지 않은 나만의 종이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있던 것이다. 이 방어기제는 나만의 작은 안전한 집이자 감옥의 역할을 했다. 나는 이 약한 상자의 절대적인 안전성을 믿기 위해 내 인생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방법으로 낭비하기로 했다. 즉 유희왕 카드놀이로, 그 극단적인 유치함과 보잘것없음이 내 정체성을 깔끔하게 표현할 좋은 수단이 되었다. 이건 의식적으로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결정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 안전한 감옥 안에서 죽은듯이 있고싶어도 살아있는 이상엔 보잘것없는 중독증세라도 만들지 않으면 버틸수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무의식 밑바닥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와 증거를 찾고 싶어싶어했다. 상자를 사랑함과 동시에 갈기갈기 찢고싶은 욕망이 안전한 감옥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났다. 성장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변화의 의지가 관속 시체를 거름삼아 피어난것이다. 이건 정말로 나답지 않아서 상자가 찢어진걸 한참후에 인지함과 동시에 내 정체성도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거부하기 위해 만든 내 상자조차도 거부해야한다면 내게는 무엇이남는가? 내가 찾고싶었던 삶의 이유는 무엇인지 충성스러운 상자를 내 손으로 찢은 순간에 나는 그 행동에 대한 명확한 정당성을 입증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신할것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상자 안에 들어가는 선택지는 없기에 나는 알몸으로 떠돌아다니는 처지가 된다. 이미 알몸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럼 종교가 필요한가? 수면제를 먹어야하나? 자살을 해야하나? 모두 상자의 한심한 모조품이었고 자살은 가장 마지막 선택이어야 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일생간 정말 보기 두려웠던것으로 나 자신을 믿는거였다. 내가 선택한 나의 변화와 움직임이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완전히 불확실하고 위험하다는것을 알면서도 불안을 뚫고 장님처럼 믿고 변화해야만 살아갈수있다. 내 불안장애는 콘돔과 같다. 현재와 미래 사이를 가로막는 콘돔을 찢고 변화한 나를 탄생시켜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상자를 찢었을 때처럼 무지하고 격렬하게.
세계 제일로 쓸모없고 유치한 유희왕조차도 삶의 의미인 변화의 의지가 될수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결과가 어떤지보다 그 행위를 대하는 태도가 나의 의지를 가치롭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나를 걸어다니는 시체라고 생각했다. 그건 선천적인 멍청함과 주변환경의 스트레스로 인한 깊은 정신병 때문일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정신의 혼란에 기인한 거식증을 연상시키는 극심한 거부와 방황이 내게 이상한 종류의 선명한 시야를 제공했다. 지나친 오염에 반응해 무의식중에 작동한 일종의 정화라고 볼수도 있겠다. 오염되지 않은 나만의 종이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있던 것이다. 이 방어기제는 나만의 작은 안전한 집이자 감옥의 역할을 했다. 나는 이 약한 상자의 절대적인 안전성을 믿기 위해 내 인생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방법으로 낭비하기로 했다. 즉 유희왕 카드놀이로, 그 극단적인 유치함과 보잘것없음이 내 정체성을 깔끔하게 표현할 좋은 수단이 되었다. 이건 의식적으로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결정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 안전한 감옥 안에서 죽은듯이 있고싶어도 살아있는 이상엔 보잘것없는 중독증세라도 만들지 않으면 버틸수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무의식 밑바닥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와 증거를 찾고 싶어싶어했다. 상자를 사랑함과 동시에 갈기갈기 찢고싶은 욕망이 안전한 감옥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났다. 성장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변화의 의지가 관속 시체를 거름삼아 피어난것이다. 이건 정말로 나답지 않아서 상자가 찢어진걸 한참후에 인지함과 동시에 내 정체성도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거부하기 위해 만든 내 상자조차도 거부해야한다면 내게는 무엇이남는가? 내가 찾고싶었던 삶의 이유는 무엇인지 충성스러운 상자를 내 손으로 찢은 순간에 나는 그 행동에 대한 명확한 정당성을 입증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신할것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상자 안에 들어가는 선택지는 없기에 나는 알몸으로 떠돌아다니는 처지가 된다. 이미 알몸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럼 종교가 필요한가? 수면제를 먹어야하나? 자살을 해야하나? 모두 상자의 한심한 모조품이었고 자살은 가장 마지막 선택이어야 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일생간 정말 보기 두려웠던것으로 나 자신을 믿는거였다. 내가 선택한 나의 변화와 움직임이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완전히 불확실하고 위험하다는것을 알면서도 불안을 뚫고 장님처럼 믿고 변화해야만 살아갈수있다. 내 불안장애는 콘돔과 같다. 현재와 미래 사이를 가로막는 콘돔을 찢고 변화한 나를 탄생시켜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상자를 찢었을 때처럼 무지하고 격렬하게.
살아있었구나
게이
개인적으로 감정 그 자체가 정체성이자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함.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지금 너를 정체성을 찾는 여정으로 나아가게 했듯이 네가 상자에 머물고플 때는 머무는 것이, 찢고 싶을 때는 찢는 것이 네 삶의 목표인 거임.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진 너도 나도 모르지만 잘 헤쳐나갔으면 좋겠음 화이팅
그래서 자네는 망치로 다리를 찍고 자살감정을 없애고 약을먹고 감정을 조절하는가
맞지 나는 오랫동안 행복하고싶은거라 자살같은건 못하겠고 우울할땐 약먹는것뿐임(안먹은지좀됐음 ㅎ)
행복하고 싶은가ㅋㅋ
자네는 상자에 들어간적도 찢은적도 없으니 이해하는 척을 하지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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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men
안녕하세요! 요약해드릴게요: 유희왕 카드놀이 같은 사소한 것조차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태도와 의지가 중요하며, 변화와 성장은 불안과 위험을 뚫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변화하는 것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dc App
어떤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도 못 찾거나 수없이 많은 철학 이론들을 접한 후에 얻는 깨달음을 경험을 통해 얻었으니, 이는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마지막 말처럼, 인간(현존재 Dasein)은 현존재 자신이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재 자신이 세계에 내던져져-있는(Geworfenheit) 존재임을 깨닫고 현존재 자신의 궁극목적(Worumwillen)을 기투함으로써 본래적인 이해(Verstehen)를 한다면 현존재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써 현존재 자신을 궁극목적을 향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궁극목적은 세상사람(das Man)으로부터 세속적인 가치로서의 것도 아니며 불안으로부터의 퇴락으로서의 궁극목적도 아니다.
여기서의 궁극목적은 오직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얻은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2가지의 상황을 모두 겪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세상사람으로서의 정의된 궁극목적을 기투하여 살아가는 비본래적 이해를 통한 삶에서 불안을 통해 자신이 무기력하게 세계에 단지 내던져져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퇴락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즉 상자 속에서의 삶이었다. 이러한 상자 속에서의 삶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다. 퇴락은 세계로부터만 도망치는 것이 아닌 현존재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여기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입증 책임을 불안을 통해 서서히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망이 최대에 달했을 때 당신은 바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옥죄고 있는 상자를 찢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상자를 찢어버림으로써 당신은 궁극목적을 새로이 기투할 필요, 즉 쉽게 말하자면 찢는 그 행위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입증 책임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임을 이제 더 이상 세상사람에게(종교 또는 세속적인 가치를 숭배하며), 퇴락에게(약이나 자살에 기대며) 전가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현존재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신은 현존재가 자신을 선택하고 포착하는 자유를 향해 열려 있다(Freisein fur die Freiheit des Sichselbstwahlens und
-ergreifens)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바로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대한 극히 위대한 성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존재를 '단독적인 자기(solus ipse)'로서 단독자화하고 개시하겠다는 당신의 마지막 말은 한 철학자의 등장 이전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현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이를 경험을 통해 깨달은 당신의 고찰에 찬사를 보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 님이 글을 썼을 때가 몇 년 전인지 기억이 안 남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실존에 대해 고민했다는 걸 이번 글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는...
연말에 과거 회상 좀 해볼 겸 왔는데 많은 걸 깨닫고 가네. 성괴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