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 하루종일 디씨위키나 쳐보며 현실닝겐들에 대해서는 이유없는 열폭과 증오심을 느끼는 필자를 비롯한 히키코모리들의 내면을 무려 150년 전에 정확히 간파하여 그려냈다. 다만 읽는 내내 팩트폭행 당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으므로 주의. (출처: 디시위키)












책은 꽤 읽는 편인데, 도서갤에 직접 글 써보긴 처음이네요.



이번에 《지하로부터의 수기》 구입해서 읽으려 하는데, 인터넷에 괜찮은 번역 비교글이 없더군요. 무슨 무슨 출판사가 좋다더라 하는 짧은 코멘트들 뿐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방랑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제가 직접 번역 비교글 하나 써보려 합니다.






1. 원문 비교


 -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 서비스를 이용하여, 각 번역본의 첫 장을 타이핑해 보았습니다.



민음사 / 김연경 번역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하긴 나는 내 병을 통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도 잘 모르겠다. 의학과 의사를 존경하긴 하지만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또 받은 적도 결코 없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극도로 미신적이다. 뭐, 의학을 존경할 정도로는 미신적이란 소리다. (미신적이지 않을 만큼은 교육도 충분히 받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신적이다.) *아니, 나는 심술이 나서라도 치료 따위는 받기 싫다. 이런 심보를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뭐,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물론 이 경우 이렇게 심술을 부려 대체 누구를 골탕 먹이려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재간은 없다.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네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아주 잘 안다. 그런 짓을 해 봐야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내가 제일 잘 안단 말이다.



열린책들 / 계동준 번역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데,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사실 어디가 아픈지조차도 잘 모른다. 의학과 의사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나는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치료를 받은 적도 결코 없다. 게다가 나는 극도로 미신적인 사람이다. 의학을 존경하는 만큼 미신을 믿는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도록 충분히 교육을 받았음에도 미신을 믿는다). *아니다, 내가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아마 당신은 이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물론, 지금 이런 나의 증오심으로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는지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의사들에게 결코 〈해를 입힐〉수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로 인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단지 나 자신만을 해롭게 한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예출판사 / 이동현 번역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간장이 나쁘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기는 나 자신의 병에 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내 몸의 어디가 나쁜지 그것조차 확실히는 모른다.
 나는 의학이나 의사를 존경하고는 있지만 치료라는 걸 받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여태까지 받아본 적도 없다. 더욱이 나는 극단적인 미신가이다. 이를테면 의학 따위를 존경할 만큼 미신가란 말이다(나는 미신가가 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신가이다). *좋다. 오기로라도 의사의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을 작정이다. 이런 심사를 아마 당신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내가 고집을 부려서 도대체 누구한테 화풀이를 하려는 건지, 그건 물론 나 자신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의사의 치료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작자들을 골탕먹일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그런 짓을 해봐야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일 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건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 민음사 번역은 소설가 경력 때문인지 문장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번역본에 비하면 의역이 강하죠. 문예출판사는 거의 완전한 직역에 가깝습니다. 의미를 살렸지만 읽는 데에 조금 거부감이 듭니다. 열린책들은 두 번역본의 중간쯤에 있는데, 문단 중간부터 '증오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른 두 번역본에는 없는 단어가 갑자기 튀어나온 겁니다.





2. 문장 비교


 - 위 원문에서 몇 문장만 따와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세번째 문장


(민음)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열린)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문예)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 민음 → 열린 → 문예 순으로 직역의 정도가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덟번째 문장(들)


(민음) 아니, 나는 심술이 나서라도 치료 따위는 받기 싫다. 이런 심보를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뭐,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열린) 아니다, 내가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아마 당신은 이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문예) 좋다. 오기로라도 의사의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을 작정이다. 이런 심사를 아마 당신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 민음사는 짧은 호흡으로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끝문장에 "뭐,"를 넣어 텍스트가 지닌 수필적 성격을 강조했고요. 하지만 의역의 향기가 짙습니다. 열린책들은 민음사 번역에서 직역을 좀 더 살린 것처럼 보이는데, 문장 중간부터 '증오심'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 후반 문장의 뜻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뒤에 쉼표를 넣은 것도 애매하고요. 문예출판사는 두 번역본에 견주면 가장 직역입니다. 장점도 직역이지만, 단점도 직역입니다. 문체가 딱딱합니다.







각 번역본의 첫 장만 두고서 비교한거라, 책 전체 번역에 대해선 자신있게 따질 처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첫 장이 주는 느낌을 무시할 수도 없죠.


굳이 어떤 번역이 좋냐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직역이 좋은가, 의역이 좋은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분들에게 이 글이 자그마한 도움되길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