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3갤에서 썼던 글 가져옴
“남성적 가치”와 “여성적 가치”라는 구분은 단순히 사회가 구성하는 성별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어떤 특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반영하고 있음. 이를테면 ‘이성’이나 ‘논리’, ‘객관성’이나 ‘주체’ 같은 명제는 문명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반면, ‘감성’이나 ‘공감’, ‘돌봄’이나 ‘관계성’ 같은 명제는 보조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타자화됨
페미니즘이라는 건 단순히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을 의미하지 않음.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성이 인간 존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여성을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담론과 권력관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자 사조라고 할 수 있음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본질은 단순히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신장하고 여성적인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의미 체계 속에서 가치가 위계화되는 현상과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반성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음
예를 들어보겠음. 역사적으로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정의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사고와 분석, 논리에 두었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대표적인데, 이때 ‘생각한다’라는 행위는 감정을 배제하는 순수한 이성의 활동을 의미하고, 인간의 고귀함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가치관을 표방함. 이 때부터 여성성의 배제가 드러남
루소, 칸트, 헤겔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도 여성을 ‘자연’, ‘감성’, ‘가정’, ‘재생산’과 연관 짓고, 남성의 ‘이성’과 ‘공적 활동’에 종속된 존재로 위치시키면서, ‘이성/감정’, ‘문화/자연’, ‘남성/여성’이라는 이원론을 철학의 핵심 주제로 부상시킴
핵심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과 담론 체계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 속에서 형성된 ‘보편화된 특수성’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음. 그렇다면 이를 전복한다는 것은 ‘공감’, ‘배려’, ‘감성’, ‘직관’ 등의 여성적 가치를 남성적 가치와 견주는 위상을 가지도록 재배치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임
하지만 꼭 그래야 할까?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함
첫째로, 남성적 가치가 여전히 사회의 기능적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함. ‘이성적인 판단’, ‘냉철한 결정’, ‘감정의 통제’와 같은 사회적 ‘합리성’은 결코 ‘감정’이나 ‘공감’으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특질을 가지고 있음. ‘규율’, ‘복종’, ‘근면’, ‘명예’와 같은 가치들도 마찬가지임. 서로 다른 층위의 가치가 동일한 위치에서 정량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기 마련이고, 남성적 가치는 문명을 유지하는 기반이자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로써 존중받고 인정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함
둘째로, 위계와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 무조건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함. 만약 모두가 동일한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평준화와 유동화가 일어난다면, 그 자리에는 보편성이 남을뿐 특수성이 사라지게 됨. 그렇다면 인간의 경험과 정체성은 일원화되고, 결국 ‘차이’를 통해 사회를 작동시키는 다양성과 창의성도 사라질 수밖에 없음
그래서 난 페미니즘에 원론적으로 반대하는 것임
성별이 권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 하지만 난 처음부터 ‘평등’과 ‘해체’의 방향성에 동의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불균등한 차이와 위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것임. 알렉산드르 두긴의 말마따나, “극단적인 수평화와 유동화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덕목이 아니고, 제 자리에 제 사람을 반듯하게 배치하는 것, 인물과 역할의 조합을 최적화하는 것이 문명”이기 때문임
모든 가치가 동등하다고 선언하는 순간, 탁월함과 책임의 윤리 또한 무너지짐. 능력과 역할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책임 없는 대중과 방향을 잃은 제도로 귀결됨
글이 좀 불완전해서 보충하자면 (1) '남성적 가치'를 숭상하는 것은 기득권 수호의 차원을 넘어, 인류가 쌓아 올린 지적·사회적 성취의 근간을 보호하려는 의지임 (2) 위계가 사라진 사회는 '탁월함(Arete)'을 지향할 동기를 상실하며, 이는 상향 평준화가 아닌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음 (3) 서구 근대 철학이 '남성성'을 '보편성'으로 둔갑시켰다는 페미니즘의 비판을 수용하되, 그 '남성적 보편성'이 인류 문명을 추동해 온 가장 강력한 엔진이었음을 인정하는 리얼리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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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은 남성성의 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