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0일 방문했던 바쉐 가브리엘센 후기입니다.


1903년 토마스 바쉐 가브리엘센은 가업을 잇기 위해 장교 자리를 그만두고 노르웨이를 떠나 샤랑트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평생의 동반자가 될 오데트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후손들에게 가업으로 물려줄 코냑이었습니다.


1905년 토마스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1852년에 설립된 A. Edmond Dupuy를 인수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바쉐 가브리엘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중간에 미국에서 금주법이 생기고 그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 내 일부 지역에서도 금주 운동이 생기는 등 위기도 있었지만, 의료용 브랜디(당시에는 브랜디를 약으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특히 기절했을 때 많이 먹였다 하는데 따라하지 마세요.)로 홍보해 약국에 납품하는 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합니다. 그 흔적을 트레코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3개의 별로 되어 있는 쓰리스타와는 달리 십자가 3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바쉐 가브리엘센은 그의 아들 르네, 손자 크리스티앙, 증손자 에르베로 이어졌습니다. 바쉐 가브리엘센은 코냑 지방의 수많은 생산자들과 컨택해 오드비를 사온 후 본인들 방향에 맞게 숙성 및 블렌딩을 진행하는 네고시앙으로, 현재는 스페이스컴퍼니를 통해 한국에도 수출하고 있으며 위스키 등 타 주종에도 손을 대는 등 사업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쉐 가브리엘센은 코냑 마을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마을의 중심지인 프랑수아 1세 동상에서 동쪽으로 10~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환대해 모나리자를 프랑스의 재산으로 만드는 등 프랑스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왕인데, 이 왕의 고향이 바로 코냑 마을이고 거처로 쓰던 성은 현재 바롱 오타드가 셀러로 사용하고 있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방문해 보고 싶네요.


하우스의 아담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프런트에서 환영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날 블렌딩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50유로), 투어는 단체로 온 손님들과 같이 진행하고 블렌딩 코스는 투어 이후에 진행하기로 해서 단체 손님들이 올 때까지 잠깐 기다렸습니다.


코냑의 기초, 하우스의 역사 등 기본적인 부분을 설명해 주신 뒤, 작은 규모의 셀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더 큰 셀러가 있는데, 오피스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이번에는 이 곳만 볼 수 있었습니다. 셀러에서 여섯 크뤼의 원액을 모두 볼 수 있었고 데미종 중 가장 오래된 원액은 1842년에 증류한 것이었는데, 이를 보면서 네고시앙이 가지고 있는 원액의 다양성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블렌딩 체험을 하러 2층에 올라갔을 때, 눈 앞에 보인 건 팡 부아, 보더리, 그랑상파뉴 3가지 원액이었습니다. 각각 12년, 19년, 39년 숙성한 원액이었는데, 테이스팅을 했을 때 팡 부아는 처음에 팍 하고 튀어오르는 느낌과 함께 고소함과 진한 단 맛 사이에 있는 맛이 느껴졌고, 보더리는 부드럽게 올라오는 바닐라? 향 사이에 살짝 날카로운 제비꽃 뉘앙스가 있었으며 그랑상파뉴는 꽃 향, 민트 향에 중간부터 올라오는 은은한 단 맛이 느껴졌습니다.


이후 셀러 마스터의 블렌딩 결과물을 테이스팅했는데, 처음 마실 때 초반에 팍 튀어오르는 인상 뒤에 제비꽃 향이 다가오다 중간부터는 그랑상파뉴로 추정되는 단 맛이 올라오며 다른 꽃 향이 섞여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맛을 보고 팡 부아 중심 블렌딩에 보더리가 비중 있게 들어가고 그랑상파뉴가 중간 맛을 잡아 주는 것으로 보고 팡부아 : 보더리 : 그랑상파뉴를 50 : 35 : 15로 블렌딩해서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맛도 뭔가 조화롭지 않은 거 같고 처음보다 팍 튀는듯한 느낌이 줄어서 팡 부아 비율을 줄이고 그랑상파뉴 비율을 올렸는데(50/35/15 > 46/33/21 > 24/34/42), 맛은 좀 부드러워지는 게 맞는 방향 같으면서도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보면 글씨는 개발괴발인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과연 어떻게 블렌딩했을지 궁금해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셀러 마스터가 나와서 한 잔 하지 않겠냐며 그랑상파뉴 1928년 원액을 주셨습니다. 한 번 마셔봤는데 이게 진짜 백년 가까이 숙성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프루티가 강하면서도 나무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는지 나무 신맛? 뉘앙스? 도 강하게 나서 맛있지만 싱캐로 내면 찾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블렌딩 비율을 말씀해 주셨는데, 처음에 느꼈던 팡부아 50%보다 팡부아가 더 들어간 60 : 20 : 20이 답이었다고 합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데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한 게 부끄러웠고, 향과 맛을 찾아가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며 술을 마시면서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 느끼는 향이 얼마나 정확할까에 대해 고민해 보면서 술에 대한 평가를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감각을 항상 곤두세워야 하고, 감각이 둔해진 상황에서도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향을 찾아나가야 하는 셀러 마스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투어는 직접 블렌딩한 보틀을 담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짜낸 과실의 달달한 뉘앙스를 원해서 팡부아를 메인으로 하면서도 지나치게 너티해지는 걸 막고자 그랑상파뉴와 보더리도 적지 않게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가져가는 거다 보니 셀러 마스터에게 한번 검수를 받고자 했는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즐기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쉐 가브리엘센 제품들을 시음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아메리칸 오크, 토마스 XO, 세레니티, 오다쥬 4잔을 시음해 봤습니다. 아메리칸 오크는 버번 뉘앙스가 강했는데, 제가 버번을 별로 안 좋아하다 보니 완성도와는 별개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토마스 XO는 처음에 한약재 느낌의 향과 산미가 나는 게 좋았고 오다쥬도 버터쿠키 + 청포도 뉘앙스가 너무 좋았습니다. 세레니티는 토마스 XO와 오다쥬 사이에서 애매하단 느낌이 있긴 했는데 그래도 못 만든 술은 아닌 거 같단 인상이 있었습니다.


오다쥬가 마음에 들어서 한 병 사고 나왔는데, 바쉐 하우스에서는 자사 제품을 할인가에 팔고 있으니 구매의사가 있으시다면 오다쥬 한 병 사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블렌딩 체험 자체가 재미도 있는데 배워가는 게 워낙 많아서 기회 되시면 한 번 체험해 보셨으면 할 정도로 유익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바쉐 가브리엘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P.S.한 가지 슬픈 건 이날 오후 5시부터 비가 왔는데, 하필 블렌딩한 병을 담았던 종이봉투가 비에 녹아서 블렌딩 보틀이 깨졌네요... 블렌딩한 병은 꼭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가져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