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이하게 전자공학과에서 약대로 편입했는데
덕분에 전자공학에서 배우는 각종 수학, 코딩, 약간의 양자역학, 약대입시랑 약대에서 배우는 대학생물을 어느정도 배울 수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생각해낸 최선의 철학관, 생명관은 이럼.
먼저 생명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모든 인간은 중요하다고 함.
하지만 생물학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없음.
예를 들어 바이러스의 경우, 바이러스는 생물의 특성과 무생물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음.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소중한 생명일까?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일까?
나는 아니라고 봄. 내가 봤을 때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함. 마포구에 사는 김모씨와 횡성에서 자라는 한우와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돌멩이는 모두 원소로 이루어졌고, 어느 존재가 더 가치있다, 어느 존재가 더 특별하다고 결정할 수 없다고 봄.
엥? 소는 살아있고 보고 듣고 느끼잖아요. 라고 하는데 내가 전자공학과에서 코딩을 하면서 카메라, 스피커, 압전센서 등을 연결한 보드에 정해진 코딩을 업로드시키면 센서를 통해 input이 들어오고 코딩이라는 알고리즘을 따라서 어떤 행위를 할 지가 달라짐. 그렇다면 이 보드도 돌멩이보다 더 가치있을까? 살아있는걸까? 난 아니라고 봄.
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드와 똑같이 센서를 통해 input을 받아들이고 대뇌의 복잡한 신경망을 거쳐서 전달된 신호로 output을 뱉어내는 기계와 똑같다고 봄.
기계와의 차이는 금속으로 이루어졌냐 유기분자로 이루어졌냐지.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컴퓨터의 본체전원을 켰다가 끄면, 그 컴퓨터의 자아는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는걸까?
컴퓨터의 자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 그냥 on에서 off로 바뀌는 것이지.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래 off였다가 on이었다가 다시 off로 변하고, 우리 몸의 원소가 흙으로 가서, 다시 다른 생명을 이뤄서 on, off, on, off, ...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임. 불교에서 윤회와 비슷하다고도 생각되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함. 우리가 원래 있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유물론자야 불교는 유물론을 정면반박한다. 생명엔 의지가 있고 의지는 업을 형성하고 형성된 업은 결과를 낳는다. 의지로써 결정된다. 생명은 무생물로 돌아가는 것 곧 죽음에 두려움을 느낄수밖에 없다. 어떤 생명이든 영원히 행복하고싶지 죽어 흙이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죽음의 두려움은 못피한다.
일견 불교의 맥락과 비슷한 부분이 있음.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임. 세상 모든 이름과 개념이 이와 같음. 그러므로 불교는 이름들을 분별하는 것은 허망하다고 가르침.
이러한 개념분별에 관한 설명방식을 삶과 죽음에까지 확장한 것도 맥락 자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 삶과 죽음은 개념분별일 뿐이라, 종이를 반으로 접으면 왼쪽과 오른쪽이 동시에 발생하듯, 삶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며 죽음이란 개념도 동시에 생겨난 것에 불과함. 실상에서는 이러한 분별이 없음.
따라서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두고 '불생불멸', 즉 '태어남이란 개념이 없으므로 죽음이란 개념도 없다'라고 설함. '무시무종'이라는 말 또한 '시작이 없으므로 끝이 없다'라는 말임. 예컨대 '강'의 시작을 분별하는 것은 내 마음이 하는 일일 뿐, 대체 어디부터를 시작이라 할지 누가 어떻게 정의한단 말인가.
강을 분별하는 자는 "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한다." 라고 말할테지만 이것은 '강이 죽고 바다가 태어난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음 윤회란 이와같이 관찰하는 자에게 발생한다. 그들은 시작과 끝, 죽고 태어남을 분별하여 보기 때문이다..
작과 끝을 분별하지 않는 자는 태어남과 죽음 또한 분별된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물줄기를 관찰하듯 실상을 꿰뚫어본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자에게는 윤회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회를 벗어났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반야부경전과 중관학의 [무위]에 관한 설명임.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 글쓴이도 대강 여기까지 생각이 닿아서 이런 글을 쓴걸거임. 그런데 불교는 여기서 한발을 더 나감. 그것은 [유위]와 [무위]의 분별또한 허망하다는 것임. 여기서 다 풀어쓸 수는 없지만, 이 유위/무위의 분별을 그만두라는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애초부터 없었다' 라는 주장 또한 치우쳤다는 결론이 나옴.
중관학의 깊은 가르침에서는 '애초부터 없었다' 가 아니라 '있다/없다 라는 양극단의 주장이 모두 옳지 않다.' 라는 결론이 나옴. 이걸 양 극단읠 여의었다 해서 '중도'라 함. 중도의 개념을 확장시키면 대립하는 모든 견해가 적멸한다는 결론이 얻어지는데, 이를 통해 육사외도의 '유물론 또한 치우쳤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거임. 그래서 윗댓글에 불교는 '유물론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 거.
유위/무위를 말하는 부분부터 불교용어가 나오고, 너무 심하게 압축시켜 말했기 때문에 이해가 잘 안갈 수도 있는데 이건 뭐 댓글로 쓸 수 있는 분량의 논리개진이 아니니 어쩔 수가 없음. 다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님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중관학'에 상당한 소질을 보이는 것이니 불교의 계파가운데에서도 중관학을 한번 접해보길 권함. 참고로 나도 대학시절 초반엔 생물학 전공이었고, 교재 젤 처음 등장하는 '생명의 정의'에서 이미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었음 ...중간에 경영학으로 튀었지만 ㅎㅎ.. 아무튼 그래서 얼핏 나 보는 것 같아 중관학을 추천하느라 댓글을 길게 써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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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의 공관은 애초에 유위와 무위의 경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에만 치중할 수가 없음. 댓글 내용 중 이에 관해서 적어놨고, 또 이게 어떻게 유물론 비판까지 이어지는지도 언급해놓았으니 확인해주셈
뭐 크게 다른 말 하고 있진 않은 것 같지만, 아마 내가 댓글로 너무 압축해서 말하니 그렇게 느꼇나봄 이 글쓴이는 지금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보듯 이미 단멸공이나 무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의 맥락이 불교에 등장하지 않는건 아니다, 그런데 중관학은 거기서 커다란 한 발자국을 더 나가니 한번 들춰 보아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음 ㅎㅎ
하나가 빠졌네 원자들의 단순한 이합집산이라면 마음은 왜 생겼나?어디를 원인으로 생겨났나? 이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