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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였냐면 아무리 훌륭하고 업적을 세웠어도 모두까기 바빴던 디시위키에서도 조차 함부로 까지못하고 추앙받던 사람이었다. 그나마 고인관련해서 조금까는 내용조차 ”고인에게는 미인하지만 정말로 신이 있었다면 이태석 신부를 빨리 데려갔으면 안됬다“라는 글이었을 정도의 성인이었다.

우선 이태석 신부는 어린시절에 찢어지게 가난한 흙수저셨다. 10남매중 9번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고 홀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자랐다. 그래도 공부는 잘했고 성당에서 풍금을 독학으로 배우거나 아니면 직접 작사나 작곡을 하는 등의 음악적 재능도 매우 뛰어났다. 한마디로 재능충이었다.

그러다가 성당에서 우연히 외국의 한 신부의 일대기를 읽게되고 신부로서의 꿈을 키워가며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군전역 이후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학하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마침내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아 어렸을 때 꿈꿔오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이후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가 얼마안되어 더 위험한 곳이던 남수단으로 향하게 되었고 여기서 병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개독들이 으레 그렇듯 선교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와서는 현지에 도움은 1도 안되는 교회부터 세우고 현지인들에게 종교를 믿을 것을 강요할 것 같았지만 이태석 신부는 그러지 않았다.

이태석 신부는 “요즈음은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라 했을정도의 성인이었다.

잋단 앞서 말했듯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내전에 지쳐있던 아이들에게 스스로 교본을 만들어 가르친 ‘브라스 밴드’라는 악단을 만드는 등 정말로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종교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했다.

이태석 신부가 살고있던 마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세례명인 ”John”과 이태석 신부의 성은 “Lee”를 따와 ”쫀리“라고 부르며 이태석 신부를 따랐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한국으로 건너와 의학공부를 하고 톤즈에서 현지 병원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은 끝을 맞이하게 된다. 휴가차 한국으로 귀국해서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이태석 신부는 대장암 말기를 선고받게 된다. 그럼에도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지만 주변인들의 만류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2010년 1월 14일 영면하게 된다.

이후 고인의 뜻을 이어 여러 기념활동이 현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안타까운 점은 남수단에서 이태석 신부의 이름을 빌어 사기행각을 벌이거나 한국인 사제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는 등 살아생전 성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던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꼭 이런 새끼들은 어딜가나 있다.

이태석 신부가 어느정도로 남수단의 톤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냐하면, 톤즈에 사는 딩카족들은 오래전부터 남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을 수치러 생각했는데 이태석 신부 얘기만 나오면 눈에서 수도꼭지 튼 것처럼 콸콸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얼마나 톤즈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그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오늘은 한국 종교인 G.O.A.T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실 본인도 무신론자고 당연히 종교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이분은 정말 논외로 쳐야할 정도로 성인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시는 분이었다. 할 것 없는 싱붕이들은 꼭 한번 감상하길 바란다. 필히 눈물을 흘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