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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뒷골목을 서성대는 무노동의 환상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人紋) / (16) 송능한 <넘버3>(1997): 건달은 누구인가 1. 본문 속에서 논급한 베블런의 주장을 다시 옮기면 종교, 정치, 스포츠, 그리고 전쟁은 근본적으로 유한계급의 특권적 생활방식으로 배치됩니다. 가령 (스쳐 넘기기 아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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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노동하지 않고 먹던 계급, 즉 불한당은 워낙 특권층이었고, 그들의 지위와 행세(行勢)는 현대의 조폭과 달리 당대의 권력체계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박제가의 <북학의>(1778) 등에서 잘 보이듯이 계급구조 변동의 시기에는 노동의 새로운 질서가 사회의 화두가 되는 법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다수의 양반/귀족들에게는 실속 없이 기승을 떠는 자유주의자들이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범절과 위의(威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지금은 멋모르고 주워섬기곤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태도도 그런 엄절한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본제적 도시화 이후의 현상으로 쳐야 하는 조폭 현상은 당연히 중세적 계급이나 신분질서에 근거한 불한당의 전통과는 갈라진다. 이들을 계승하는 직업은 조폭이 아니라 차라리 성직자들이나 정치인들, 혹은 직업군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의 사회학자들은 성직자, 정치인, 스포츠맨 그리고 직업군인들은 그 직업의 체질구성상 조폭적 속성을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특별히 베블런(T. Veblen)에 따르면 ‘유한계급’은 야만문화의 초기 분업 형태인 남녀 구별에서 기원했으며 “유한계급제도는 초기의 소유권자들이 생산에 따라붙는 불명예를 피할 목적으로 조장한 결과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글의 논의에서 고동이 될 만한 베블런의 명제는 “유한계급은 평화에서 호전적 생활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출현”했다는 것이다. ‘호전적 생활습관’의 함의를 넉넉하게 풀고 근현대의 사회적 변동들을 적실하게 적용해보면, 조폭과 더불어 성직자, 정치인, 스포츠맨, 그리고 직업군인들을 한 꿰미에 엮을 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전방위적으로 솟구치는 짜증과 냉소 속에서 남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지닌 채 쓰고 만들었다는 송능한의 이 작품은 조폭에 대한 이야기가라기보다 차라리 그 자체가 곧 조폭적이다.


태주 같은 건달들은 자본주의적 도시화 속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직업분화의 네트워크에 끌밋하게 포획되지 못한 무리들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이 문자 그대로 중세적 존재일 수는 없지만, 무노동의 환상을 도착적(倒錯的)으로 현실화하려는 욕망을 이어간다는 점에서만큼은 중세적이다. 이 환상은 사치와 낭비의 삶에 대한 귀족적 욕망의 한 특별한 변용인데, 이들의 존재가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 각별하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자본제적 삶의 피로와 권태에 찌든 대중들에게 호전적 생활습관에 대한 관념론적 향수와 노동이 부재하는 도시의 삶이라는 판타지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건달은 노동의 시간표 속에 갇힌 도시 속에서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면서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인 것이다.

공동체의 왈짜, 체계 속의 건달

그러므로 조폭은 철저하게 근현대적 현상이며 도시적 삶의 이면(裏面)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왈짜들이 아니라 체계 속의 건달들인 것이다. 가령 임꺽정이나 홍길동이나 장길산의 패거리들은 비록 조직적인 폭력으로 당대의 법체계와 대치하지만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조폭’일 수는 없다. 전통사회의 왈짜들이나 화적(火賊) 패거리를 조폭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앞엣것이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개별적 행위들의 묶음이라면 뒤엣것은 체계의 질서에 기생하면서 그 체계의 그늘진 곳을 역시 ‘체계적으로’ 역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비근한 사례로 1930년대 후반 이후 김두한 패거리가 정치적으로 진화해간 모습을 일람하면 한편 전통사회의 왈짜들과 체계 속에서 암약하는 조폭을 잇는 과도기적 형태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조폭이 당대의 체계적 권력과 유착하거나 그 부스러기 이윤을 챙기면서 부침하고 명멸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건달도 조직적 존재이지만 그 조직 역시 철저히 체계적 현상인 것이다. 역사를 이야기로 각색한 작품 속에서는 ‘협객’이니 뭐니 하는 일견 흥미로운 인물상(charater)들이 기껏 소비자로 졸아든 잔약한 현대인의 눈길을 끌지만, 그것은 건달을 특정한 스타일을 지닌 개인으로만 묘사한 채 전통사회의 왈짜/의적 이미지와 체계 속의 조폭 이미지를 편리하게 섞바꾸며 임의로 윤색한 것에 불과하다. 누구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이야기이지 역사가 아니며, 풍경의 환상이지 상처의 기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넘버3> 속의 마동팔 검사(최민식)는 직업적 전문성 때문인지 혹은 제 자신의 ‘좆 같은’ 성정과 체질 때문인지 조폭에 대한 환상을 가로질러 그 실제에 단도직입한다. 태주가 “제발 건달로 불러 달라”고 해도 마동팔의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그저 ‘깡패새끼’뿐이다.

인류의 대표적인 환상이라면 종교와 사랑과 자기애(나르시시즘)지만, 각양각색의 환상들은 인생의 욕망과 상처에 얹혀 명멸하며 때론 악지를 부려 앎이 주는 실재를 밀어내면서 밑질기게 자신의 존재를 고집하는 법이다. 조폭과 그 건달들은 근본적으로 근현대의 도시사회적 체계에 기생하는 현상이며,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조폭과 건달 역시 도시사회적 체계의 피로와 권태에 찌든 잔약하고 이기적인 소비자들이 낭만적으로 재현하는 환상이다. 예를 들어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2005)이 묘사한 선우(이병헌)의 비극적인 최후조차 자본주의적 체계 속에서 관료인간-기업인간-가족인간으로 아등바등, 진동한동 살아가는 우리네의 지질한 일상을 단숨에 폭력적·낭만적으로 초월케 하는 판타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넘버3>를 만든 동기가 “깡패투성이의 어처구니없는 남한 사회에 대한 분노”라고 밝힌 송능한의 작업에서는 그런 환상의 잉여가 개입할 틈이 없다. 그는 바로 그 분노의 힘으로써 그 환상의 불을 끄고, ‘삼류 인생’들이 들끓는 이 사회의 벽화를 과장스럽고 우스꽝스레 점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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