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의 아픈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는 잿더미로 변했고 남북한과 중공군, 유엔군을 포함해 150만 명이 넘는 군인이 전사했다. 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만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이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많은 우방국들 덕분에 전쟁을 비교적 빨리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형제의 나라’ 터키의 도움이 상당했다. 그런데 터키가 빠른 한국 파병을 결정한 것에는 그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터키가 한국참전을 하게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을 기습하여 공격해왔다. 예상치못했던 북한의 공격으로 크게 당황했던 남한정부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유엔 역사상 최초로 군대 파견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유엔의 결정에 따라 미국,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총 16개 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전투원 파병국뿐만 아니라 의료지원국까지 합치면 총 21개국에서 대한민국을 향해 지원의 손길을 펼쳤었다. 




이 때 한국전쟁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현재까지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터키는 ‘형제의 나라’를 자처하며 대한민국의 든든한 우방국으로 자리매김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측으로 대규모 전투병력을 파병했던 터키이다. 때문에 21세기로 넘어와서도 터키와의 각별한 관계를 지속되고 있다.




터키는 UN이 한반도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정하자마자 빠르게 파병을 진행시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에 병력을 상륙시킨 고마운 나라이다. 병력의 규모도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컸으며 무려 15000명의 청년들이 참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6.25전쟁 당시 터키군은 백병전의 신으로 중공군들이 특히 두려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승천 전투 당시 터키군은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남하하는 공군을 저지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각종 전투에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고아원과 학교를 세워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큰 도움을 주었던 터키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파병은 터키라는 국가에게 있어서도 큰 의의가 있는 선택이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당시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터키는 위치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걸쳐져 있으며 무엇보다 이슬람 국가였기 때문에 NATO 가입이 쉽지 않았다. 




NATO는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결사체이기 때문에 당시 터키는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NATO 가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터키는 한국 전쟁 파병을 통해 국제사회부터 인정 받을 수 있었고 한창 전쟁이 진행중이었던 1951년 9월 20일, 드디어 터키는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전쟁 발발은 국내전을 넘어 자유진영 vs 공산진영의 싸움이기도 했다. 때문에 국제연합(UN)도 한국전에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것이다.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격인 NATO도 한국전쟁에 상당한 위기 의식을 느꼈고 대대적인 나토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아이젠하워를 총 사령관으로 하여 총 96개 사단이 나토군 휘하로 소집되었다.




그리고 동맹국의 존재가 중요해진 NATO였기에 터키의 가입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 터키는 NATO가입을 통해 든든한 동맹국을 얻음과 동시에 미국의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터키였기에 본래의 목적을 제대로 취한 셈이다. 




NATO는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NATO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굳건한 집단안보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에게는 더 없이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다. 타키의 NATO 가입은 원년 멤버 12개 나라를 제외하고 최초로 받아들인 가입국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글 CCBB 오토앤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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