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 배우에서 4년 만에 프리마돈나

미국서 팝페라 가수 데뷔했지만, 빛 못 보고 한국행

4옥타브 음역대 소화하는 실력파 가수…기부천사로



미국서 오페라 공연으로 시간당 2만4000원 받던 조연 배우가 이제는 억대 수입을 올리는 팝페라 퀸이 됐다. 


이사벨은 데뷔 10년 차 팝페라 가수다. 그의 이름 뒤에는 ‘팝페라 퀸·팝페라 디바’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지난해 5월에는 '2016 아시아 모델 어워즈'에서 ‘아시아 특별상 크로스오버 부문’ 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말하자면 국내 최정상급 여자 팝페라 가수다. 


그런 그가 ‘여자 임형주’라는 말에는 손사래쳤다. 임형주씨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팝페라 가수다. 2003년 17세 나이에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로마 시립 예술대학 석좌교수로 있다가 최근 군에 입대했다. 


“제가 그렇게 유명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했을 겁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 출신 여가수는 "쑥스럽다"고 말했다.




CCBB


◇"한국선 성악가 꿈이어도 밤 10시까지 야자 기본"


-팝페라는 어떤 음악입니까


“팝(Pop)과 오페라를 아우르는 장르입니다. 조금 대중적인 오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가요보다는 오페라에 가까워요. 그래서 팝페라 가수는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언제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까


“노래는 7살 때부터 했습니다. KBS, MBC 어린이 합창단에서 노래하면서 조수미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KBS에서 했던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노래 대회에 나가서 3등을 했어요. 심사위원이 제 목소리가 좋다고 어머니께 말해 그때부터 성악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을 때였다. 방학 동안 몇 번의 음악 레슨을 받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교습 방법은 한국과 다른가요


“미국 선생님은 학생 중심으로 레슨을 해주셨어요. 일어서거나 앉아서, 때로는 눕거나 엎드려서 발성을 하도록 시키고 제가 가장 편안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부터 가르쳐 줬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우선 고음을 내는 방법부터 알려줬습니다. 그러면 목이 금방 상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밤 10시까지 국영수 자율학습해야 했습니다. 저는 음악이 하고 싶은데 말이죠.  외우고 답하는 암기식 교육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언제 무대에 처음 섰습니까


“1998년쯤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리릭 오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제 첫 번째 오페라단 활동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대학, 보스턴 음악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페라 가수 활동은 대학원에 다니며 시작한 것이다. 시간당 20달러(약 2만 4000원) 정도의 리허설 페이를 받고 단역을 맡았다.



이사벨 제공



◇2만4000원 단역 배우에서 4년 만에 프리마돈나

대학원 졸업 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이사벨을 가르쳤던 교수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메롤라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디렉터로 옮기면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미국 3대 오페라단 중 하나로 꼽힌다. 메롤라 프로그램은 젊은 예술인을 선발해 오페라 가수로 키우는 과정이다. 

가수로서 인생이 활짝 필 것 같았다. 총괄 디렉터의 제안을 받았으니 주연을 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교수님이 오디션에서 저를 세 번이나 떨어뜨리셨어요. 가수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아직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단역배우 역할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노래만 부르기도 했다. 한 시간짜리 공연에서 단 2분만 노래하기도 했다. 비중이 작다보니 1인 2역도 맡았다. 주연배우를 꿈꾸며 매일 훈련했다. 발성부터 연기까지 차근차근 3년동안 기초를 닦았다. 
 
4번의 도전 끝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 역할을 맡았다. 그리던 주연이었다. 

-뭐가 달라지던가요 

“대기실을 혼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서 같은 개인 스텝이 생깁니다. 페이가 달라지죠. 여러 역할을 혼자서 소화하면서 한 번 공연하는데 160만원을 받던 조연배우는 몸 값이 서너 배로 뛰었다.


이사벨 제공



◇미국서 팝페라 가수 데뷔했지만, 빛 못 보고 한국행

-오페라 대신 팝페라를 시작한 이유는 뭔가요

“유럽 페스티벌 참가 제안을 받고 준비하던 과정에서 모든게 엎어졌습니다. 페스티벌을 기획하던 매니저가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대신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로 교체했습니다. 그 매니저가 지도 교수님 전 남편이었어요. 이때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목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제대로 이유도 듣지 못했다.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말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오페라 노래를 부르려고 하면 발성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페라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다른 노래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오페라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가수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길이 보였다. 그렇게 선택한 게 팝페라였다. 

하지만 팝페라 가수 활동도 순탄치 않았다. 2008년 미국에서 팝페라 혼성그룹 윈(W.I.N)으로 데뷔했지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해체됐다. 당시 리먼브라더스가 윈 소속사의 재정을 지원했는데 금융위기로 파산하면서 지원이 끊겼다. 윈도 동력을 잃었다. 

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사벨을 위한 무대는 많지 않았다. “노래가 하고 싶었습니다.”

구세군에 연락해 거리 자선공연을 하겠다고 했다. “누구십니까. 저희가 이런 요청을 받는 게 처음입니다.” 구세군의 대답이었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 자신을 소개했다. 거리 공연으로 기부문화를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12월, 꽁꽁 얼어 붙은 광화문 사거리 일민 미술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시위 중이던 장애인 단체와 이를 막으려 서있던 경찰들이 관객으로 변했다. “긴장됐던 대치 분위기가 풀리는 것을 보면서 이게 음악의 힘이구나,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사벨 제공



◇4옥타브 음역대 소화하는 실력파 가수…기부천사 활동 

그 뒤 해마다 12월 구세군 공연은 빠뜨리지 않고 있다. 구세군은 그 공로를 인정해 ‘이사벨’ 이름을 새긴 자선냄비를 선물했다. 구세군이 개인 이름을 넣은 자선냄비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자선공연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공연 문의도 늘었다. 2011년에는 폴포츠와 함께 공연 했다. 영국의 휴대전화 판매원 출신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폴 포츠’ 역시 팝페라 가수다. 2013년에는 드라마 ‘구가의서’의 OST 마이 에덴을 엠넷 클래식 차트 1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녀는 한 달 평균 2~3번 공연을 해, 연간 1억원 정도를 번다. 그리고 수익의 20%가량을 기부한다고 했다. 사실 국내에서 팝페라 가수는 설자리가 많지 않다. “대기업 행사나, 국제 행사,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 창립 75주년행사, 아산재단 기념행사 같은 대기업 행사에서 공연했다.

-힘든 일은 없나요

"노래할수 있다면 행복합니다. 아침엔 광교 호수를 걸으며 발성연습을 합니다. 정해진 연습시간은 없지만 시작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노래를 부릅니다. 8~9시간 할때도 있고 컨디션이 좋으면 새벽까지 연습실에 있습니다. 

다만 저를 너무 과대포장하는 기사가 나올때 힘듭니다. 7옥타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아닙니다.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저는 4옥타브 정도 냅니다.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재미교포라고 하셨던 분도 있습니다. 한국사람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비주류 예술인을 위한 단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미국에서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만 해도 리허설비를 따로 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이야기더군요. 

미국에서는 예술인들 단체가 있어서 공연 기획사가 이 단체에 돈을 미리 내도록 하고 배우나 가수들이 돈을 떼이는 일이 없게 합니다. 식비나 차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서 공연을 기획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합니다. 

저도 공연비를 못 받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예술인들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CCBB 에디터 BH
시시비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