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모토로라·퀄컴 등 10개 회사 거쳐
구글 수석 디자이너로 활약하기까지 25년의 여정

이름은 김은주, 현재 구글 수석 디자이너다. 이화여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지틀조선일보, CJ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다. 스물일곱살에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리노이공대 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모토로라, 퀄컴, 삼성전자에서 UX 디자이너로 일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턴 등을 포함하면 총 10번의 이직을 했다. 구글은 11번째 직장이다. 화려한 이력서처럼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은 그녀지만 미국 유학 전까진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던 토종 한국인이다. 손짓, 발짓과 생존 영어로 시작한 미국 생활은 유수의 글로벌 기업을 거쳐 실리콘밸리 구글 본사로 이어졌다. 성공한 프로이직러의 삶은 어떨까. 구글에서 활약 중인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가 말하는 지난 25년의 여정과 삶의 방식

김은주 구글 수석 디자이너. /김은주 제공


◇구글이라는 신세계
“첫째, 재미있는 일인가. 둘째,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셋째 지금 내가 멈춰있다고 생각하는가. 제가 이직을 결정하는 순간은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예요. 세상에 하루 종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어딨어요. 한달 내내 지겨운 일도 있어요. 그러나 적어도 일년에 한두 번은 미치도록 일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머리에 불꽃이 튀거나 가슴이 뛴 기억이 없다면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2018년 9월 구글에 입사했다. 세계 최대 IT 기업, 꿈의 직장이라는 구글에서도 핵심 부서인 검색과 인공지능팀에서 일했다. 그런데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구글에서 김은주 수석디자이너는 직장 생활 2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세계 최고 인재들 사이에서 가면증후군(자신의 능력을 보잘 것 없다고 느끼며 무기력해지고 불안해지는 심리 현상)에 시달리며 슬럼프를 겪었다. 구글 입사 전 삼성전자에서 세계 최초 원형 스마트워치 개발을 주도하며 ‘웨어러블 산업을 이끌 글로벌 18인의 여성 리더’ ‘웨어러블 게임 체인저 50선’ 선정, ‘IDEA 디자인 브론즈상’을 받은 그녀였다. 1년 가까이 힘든 시간을 보내다 전문 상담사를 만나고 글쓰기와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했다.

-프로이직러도 구글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나 봅니다. 지금까지 일했던 회사들과 구글은 어떤 점이 달랐나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는 건 매번 어려워요. 그래도 6개월이면 일과 조직에 적응했어요. 구글도 6개월이면 충분히 가능할 줄 알았습니다. 1년 가까이 헤맬 줄 몰랐어요. 왜 구글에선 유난히 헤맸을까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일했던 회사들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어요. 저는 구글에 오기 전까지 삼성전자, 퀄컴, 모토로라 같은 하드웨어 회사에서 일했어요. 하드웨어는 제품 출시일이 정해지면 거기에 맞춰 업무 프로세스가 이뤄집니다. 제품 출시를 위해 각 부서가 유기적으로 일을 하죠. 구글은 데이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테스트와 업무가 동시에 이뤄져요. 부서 간 경계가 없고 책임과 역할이 모호합니다. 업무가 필요한 사람끼리 협의하고 조율하며 결과물을 만들어야 해요. 저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게 처음이었고 이런 문화와 업무 방식이 낯설었어요. 게다가 제가 맡은 인공지능 기술도 초기 단계였던 때라 다들 새로운 기술을 익히느라 우왕좌왕 했죠.”

-구글에서 일해보니 좋은 점과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은 뭔가요?
“구글의 자율성이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뭐든 할 수 있지만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것도 있어요. 구글에선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는 테스트를 서슴없이 합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나요. 심지어 한 팀에서 이미 먹어본 똥을 다른 팀이 가져가서 먹어요. 보다 못해 그건 똥이라고, 먹지 말라고 알려주기도 했어요. 그러면 화를 냅니다. ‘그게 뭐 어때서’. 구글의 방식인 거죠. 제눈엔 똥으로 보인다고 똥이라고 할 수 없어요. 똥을 먹어본다한들 그것대로 배우는 게 있습니다. 구글은 누구든, 뭐든 성이 풀릴 때까지 해보길 권장해요. 실패하더라도 그게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뭘 배웠는지 물어요. 기회 비용이나 업무 효율 면에서 어마어마한 손해일 수 있지만 이게 구글 혁신의 핵심이에요. 혁신은 똥밭에서 자라더라고요.”

-구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 1통이 큰 화제였다면서요.
“2020년 하반기 업무 평가를 앞두고 ‘우물 안 개구리’라는 글을 직원들에게 메일로 보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정작 내가 어떤 개구린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냐고요. 내가 개구린데 개구리가 아닌 무언가로 살 필요는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업무 능력이나 평가가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동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누군가 저처럼 자신을 괴롭히며 지독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보낸 이메일이 회사 내 여러 그룹으로 퍼져나갔어요. 수많은 사람이 자신도 개구리라며 개구리 커밍아웃을 해오더라고요. 다들 똑똑해 보이고 잘나 보이던 그들도 남몰래 자신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서로를 응원하며 힘을 얻었어요. 무엇보다 제 보잘 것 없는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큰 용기가 됐어요. 지금도 회사 내에 있는 개구리를 찾고 응원하는 개구리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슬럼프를 이겨내고 순조롭게 구글에 적응한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는 지난해 600명이 넘는 부서 디자인팀에서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받았다. 올해의 디자이너상은 동료들의 추천을 받아 매니저들이 심사해 선정한다. 올해 6월엔 지난 25년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모은 자기계발서이자 위로서인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를 펴냈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지난해 3월부터 재택근무를 하면서 온라인 강연 기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과 미국, 캐나다, 중국의 대학생에게 강연을 하고 진로 상담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뭘 해보기도 전에 미리 좌절하고 포기하거나 난 안 될거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이 친구들에겐 취업을 위한 조언보다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위로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블로그에 대학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하나둘씩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남긴 글에 서른살 즈음 사람들이 더 뜨겁게 반응했어요. 서른살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도전이나 시작을 망설이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응원과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블로그에 쓴 글에다 제 경험담을 더해서 책을 냈어요.


자신의 실패담과 성공담을 담은 책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를 들고 서 있는 김은주 구글 수석 디자이너. /김은주 제공


◇오지랖이 넓은 디자이너
제품을 선보일 때 실제 사용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제품을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누구보다 제품을 잘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UX디자이너(User Experience)다. UX 디자이너는 사용자가 경험하는 모든 과정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김은주 수석 디자이너는 업계에서 알아주는 UX디자이너다.

-UX 디자이너는 무슨 일을 하나요?
“제품이나 기능을 소비자가 쉽고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디자인하는 일을 해요. 단순히 시각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기능과 사람의 마음까지 연결하는 디자인을 하는 거죠. 고객이 제품을 사서 쓰고 수리하는 모든 과정을 설계하고요. 버튼의 색이나 모양, 버튼에 쓰인 글씨, 버튼을 누르는 순서 등도요. 사실 제품이나 서비스 영역에서 사용자의 경험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요. 그래서 UX 디자이너를 세상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어야 하는 직업이라고 해요. 소비자의 심리부터 디자인, 기술까지 모든 걸 관여하고 고민하니까요.

-수석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나요?
“저는 현재 구글 어시스턴트(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비서)의 음성대화 디자인을 맡고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하면 기계가 음성이나 화면으로 답을 찾아주는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음성에 반응하는 방식, 거리, 화면 모든 과정을 설계해요. 사람의 말이란 게 나이, 국적, 문화마다 다르기 때문에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고민해야 해요. 수석 디자이너는 세부적으로 나뉘어진 디자인 업무를 지켜보고 지휘합니다. 구글 어시스턴트 팀에만 디자이너가 수백 명이에요.”

-UX디자인의 핵심은요?
“사람입니다. 사용자의 심리를 파악해 가장 편리한 디자인을 찾는 게 중요해요. 그러려면 사람을 잘 관찰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UX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요?
“UX 디자이너 중엔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영화 시나리오를 쓰거나 작가, 감독 출신도 있어요. 전공이 중요한 분야는 아니에요. UX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자격이나 시험도 없고요. 다만 UX디자인을 하고 싶다면 직접 해보는 게 중요해요. 자주 쓰는 제품이나 서비스부터 불편한 점을 개선해 보는 거예요. 문제를 해결한 뒤엔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UX 디자인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코딩은 알면 좋지만 몰라도 됩니다. 코딩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문제 해결 능력을 꼭 코딩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스토리보드나 글로 표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김은주 수석디자이너가 2015년 UX를 디자인한 삼성 기어 S2./삼성전자


-UX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자리잡기까지 25년간 시대와 기술의 변화를 경험했어요. 어떤 점이 바뀌었나요?
“웹디자이너, 인터페이스 디자이너, UX디자이너… 시대가 바뀌면서 제 타이틀도 계속 바뀌었어요. 이름은 달라졌지만 역할은 바뀐 게 없어요. UX디자이너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에요. 다만 과거에는 기술과 시스템을 만들고 사람이 적응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기술을 사람에게 맞추는 시대예요. 앞으로는 한사람 한사람 개인화된 UX 디자인을 해야 할 겁니다. 훨씬 정교하고 타겟화된 서비스가 많아질 테니까요. 기술의 발전은 앞으로 더 빨라질 겁니다. 사회 제도나 안전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에요. UX 디자이너도 책임감을 느끼고 기술을 제어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어 실력보다 중요한 것
스물일곱 살, 영어 한마디 못한 채로 떠난 미국 유학이었지만 어느덧 세계적인 기업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여전히 영어는 그녀에게 어려운 숙제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며 깨달은 건 영어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영어가 어려우신가요?
“영어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채워지지 않는 갈증도 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건 말과 글이 다가 아니었어요. 업무에서 내 실력,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얻으면 상대방의 귀가 열립니다. 화려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제 말에 귀를 귀울여요. 요리사가 요리를 잘하면 설명을 잘 못해도 그 과정을 설득할 필요가 없어요. 연주자도 연주를 잘하면 그것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나의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해요. 부족한 영어 때문에 그 외의 것을 놓쳐선 안 됩니다. 저는 애초부터 원어민이 아니잖아요. 미국인처럼 영어를 할 수 없어요. 그걸 깨달았습니다.”


김은주 구글 수석 디자이너. /김은주 제공


-어느새 전문성을 인정받고 리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좋은 리더란?
“좋은 리더는 팀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인력을 유치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유지하는 게 중요하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주려고 합니다. 리더는 뒤에서 서포트만 해주면 돼요. 팀원이라면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회사가 망하진 않습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는 직접 책임지도록 해요 그래야 나중에 더 큰 책임을 지려고 했을 때 무섭지 않아요. 저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게 됐어요. 무엇보다 리더가 실무자에 빙의에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라떼’는 그랬는데 하며 조바심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끊임없이 도전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도전! 성취! 성공! 저는 이런 거창한 꿈을 꾸지 않아요. 뭔가 대단할 걸 해내려고 하니까 도전이 무서운 겁니다. 큰 꿈보다 잔잔바리가 모이면 더 큰 꿈을 이룰 수 있어요. 천천히 작은 목표를 이루다보니 구글까지 왔어요. 23년이 걸렸네요. 제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천천히 포스팅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했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뭔가요?
“요즘은 나의 50대를 어떻게 살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20~40대는 내가 성장하고 살아내기 위해 집중했다면 앞으로의 시간은 함께사는 세상에 기여해보고 싶어요. 개구리 캠페인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미국에 살면서 아시아 사람들이 받는 인종 차별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고 있고 앞으로 더 할 예정이에요. 현직 디자이너 중에도 아시안 여성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고요. 디자인 커뮤니티에도 목소리를 내고 강연도 하고 싶어요. 제 경험을 글로벌 독자분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해외 여러 나라로 번역되어 나가길 희망해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해도 된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어요. 자식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지만 직접 경험해보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닐까요. 실패해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어요.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뭐든 해도 되니까 일단 시작해보세요.”



글 시시비비 키코에루
시시비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