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서초동에서 빵 돌리는 30대 여성의 직업은?



속기사 방지원씨


국회에서 본회의를 하거나 법정에서 재판을 할 때 한켠에서 귀를 쫑긋하며 열심히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양측의 공방이 오가는 뉴스 기사를 보면 녹취록이 자주 등장한다. 누군가 대화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문서다. 모두 속기사가 하는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계를 위해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방지원(33)씨는 28세가 되던 해에 뒤늦게 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5명의 속기사를 둔 속기법인의 대표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의 한 건물 꼭대기 층 ‘속기법인 지원(G1)’을 찾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속기법인 G1 방지원 대표 / jobsN


- 속기사라는 직업에 대해 소개해 달라. 정확히 무엇을 하는 직업인가.

"사람이 말하는 음성과 주변 소리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속기사 시험에 합격해서 국가공인 한글속기사 자격증을 받으면 속기사로 일할 수 있어요."


- 속기사가 되면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자격증을 바탕으로 일부는 법원이나, 국회, 정부기관에 기술직 공무원으로 취업해요. 속기 사무실을 개업하기도 합니다. 속기사무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재판용 녹취록을 작성하는 일이에요. 재판을 받는 사람이 직접 작성하는 것보다 속기사의 공인이 찍힌 녹취록만 재판장이 인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관련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공공기관의 회의나 기업의 주주총회 등 공식적인 문서를 남겨야 하는 회의 속기를 의뢰받기도 해요. 자막방송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 실시간 속기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 게임 중계방송에서 라이브로 속기하는 것도 봤습니다."


- 자격증은 어떻게 따는지. 어떤 시험이 치러지는지도 궁금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국가공인 속기사 자격증 시험은 1년에 두 번 있어요. 총 두 과목을 보는데, 연설문과 회의록 과목입니다. 각각 성우가 5분 동안 읽어주는 내용을 속기하는 시험이에요. 절대평가로 정확도가 90퍼센트가 넘어야 합격입니다. 


보통 속기사용 전문 키보드를 사서 관련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시험을 준비해요. 속기사 키보드 사용법을 숙지하고 말하는 속도에 맞춰 빨리 입력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해요. 정확성도 중요합니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서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공부해야 해요. 속기를 연습하는 시간 외에는 수시로 맞춤법 공부를 했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학원을 다니면서 합격하기까지 1년 6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국가공인 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에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 민간에서 주관하는 속기사 자격증을 추가로 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자막방송 실시간 속기, 경찰 조서 실시간 속기 같은 민간 자격증을 따놓으면 관련 일을하는데 조금 유리하기 때문이죠.”



속기법인 G1 방지원 대표 / jobsN


- 속기사 키보드가 특이하게 생겼다. 어떤 방법으로 빠르게 기록할 수 있는지.

“속기사 키보드는 일반 키보드와는 조금 다릅니다. 자주 쓰는 문장이나 단어를 바로 풀어쓸 수 있는 압축 키가 있어요. 예를 들면 ‘안녕하세요’는 자판 몇 개를 동시에 누르면 입력되죠. ‘포퓰리즘’같이 오타가 생기기 쉬운 단어도 약어로 입력합니다. 주의 깊게 듣는 것도 중요해요. 현장에서 못 알아듣는 것은 그냥 넘기고 비워둬요. 신경 쓰다가 다음에 나온 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의뢰인과 수정하면서 다시 기록하는 과정을 거쳐서 정확도를 높입니다.”


-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속기사가 됐다. 속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서 경제활동을 시작했어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거든요. 음식점에서 서빙도 해보고, 옷가게에서도 일해보고, 핸드폰 매장에서 판매도 해보고, 대형 마트에서 캐셔도 해봤어요. 


그러다가 결혼하고 출산을 하면서 경제 활동을 그만뒀습니다. 아기를 낳고 집에서 육아를 해보니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경제적인 요인도 있었고,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어요.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집에 아이가 있다 보니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싶었어요.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에 속기사라는 직업을 알았어요. 자격증을 가지고 전문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속기사협회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어요.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어서 주저 없이 그날 학원을 등록하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 자격증을 따고 속기법인을 차리기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자격증을 따자마자 속기협회에 취직해서 일해보기도 하고, 로펌에서 비서 겸 속기 업무를 맡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 일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속기 업무에 전념하고 싶더군요. 혼자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공유 오피스를 빌려서 개업을 했어요.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일이 점점 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속기사가 함께 일하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17년에 속기법인을 만들고 4명의 속기사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대부분의 속기사무소들이 홀로 운영하는 개인 사무소라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소화하기가 힘들어요. 속기법인을 만들면서 저를 포함해 다섯 명의 속기사와 업무가 몰릴 때 도와줄 수 있는 10여 명의 프리랜서가 함께 움직이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많은 양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속기법인 G1 방지원 대표 / jobsN


- 이곳 법조타운에서는 ‘빵 속기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던데.

“속기사무소를 개업하고 법조타운에 있는 고객들에게 어떻게 홍보할까 고민했어요. 그때 빵이 떠올랐어요. 제가 워낙 빵을 좋아하기도 하고, 제 이름도 ‘방’으로 시작하니까 빵으로 마케팅하자는 생각을 했죠. 떨리는 마음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빵을 사서 로펌과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빵을 사랑하는 볼이 빵빵한  빵 속기사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빵을 돌렸죠. 


처음에는 당황해하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계속 잊지 않고 찾아가다 보니 차츰 반겨주시더군요. 낯선 사무실을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예전에 여러 서비스업에서 일해본 경험이 용기를 내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벌써 4년이 넘었어요. 반응이 좋아서 속기법인이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사무실이 꼭대기 층에 테라스도 있고 분위기가 무척 밝다.

“법조타운에 있는 속기사무소들을 둘러봤더니 대부분 지하에 있거나 창문도 없는 작은 사무실이 많았어요. 돈은 좀 들더라도 직원들과 함께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무실이 크지는 않지만, 두 면이 유리라 햇빛도 잘 들고 큰 테라스도 있어서 쉴 공간도 있어요. 직원들과 함께 한 단계씩 목표를 이루면서 근무 환경을 좋게 만들어 나가는 게 목표예요. 지금은 사무실 유리창에 ‘00빌딩 7층 가자~!’라고 적혀 있어요. 하하.”


- 속기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법률 사무소의 의뢰를 받아서 재판에 증거로 제출할 녹취록을 작성하는 일이에요. 분쟁 당사자 간의 언쟁이나 변호사와의 대화를 담은 녹음 파일, 사건 현장에서 녹음된 음성 등을 주로 다루죠. 그렇다 보니 고객 비밀 보호를 위해서 공개할 수 없는 에피소드가 많아요. 


그런데 속기를 하다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이혼소송과 관련된 녹취록을 작성할 때, 녹음 파일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요. 부부가 싸우는 동안 한켠에서 울고 있을 아이가 그려지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럴 때마다 울컥해서 잠시 속기를 멈추곤 해요.”


- 인터뷰 하는 내내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는지.

“일을 할 때마다 행복해요. 예전에 힘들게 일했던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마트에서 캐셔로 일할 때는 늘 서있어서 다리가 아팠고, 백화점에서 일할 때는 출입구 앞이라 너무 추웠어요. 저도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었고, 자격증도 갖고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제 사무실을 갖고 일하는 게 꿈만 같아요. 가끔 직원들이 이제 빵 그만 돌리라고 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지난 목요일에 어김없이 빵 300개를 사서 돌아다녔어요. 늘 초심을 잃지 말자고 머릿속에 끊임없이 되새깁니다.”


글 CCBB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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