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꿈을 꾸다 깼는데 눈을 떠보니 중환자실이었어요. 간호사들이 ‘저 환자는 혼자선 아무것도 못해’라고 말하더라고요. 무슨 상황이지 싶었어요.”

서른 한 살 장채원씨는 2019년 5월의 어느 날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버스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날은 간경화를 앓다 간 이식을 받은 아버지가 드디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었다. 아버지의 퇴원을 기념해 저녁에는 가족들과 함께 불고기를 먹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채원씨의 사고는 그의 팔과 다리를 비롯한 온몸 11곳의 뼈를 부러뜨릴 만큼 심각했다. 마치 온 몸이 묶인 불가사리처럼 채원씨도 목과 양 팔,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깨어났다. 버스에 끌려가며 생긴 다리의 상처는 레이저로도 지우기 힘들만큼 컸다.

그 시기 채원씨는 10년 이상 앓아온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더해 1년 계약 후 정규직 전환을 조건으로 입사한 한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아 삶의 의지조차 없었던 상황이었다. 자살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하던 시기에 당한 이 사고는 채원씨의 삶을 크게 뒤바꿔 놨다.

-사고 이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의 상황은 어땠나요?

“중환자실에선 무통주사를 계속 맞고 있어 아픈 줄 몰랐어요. 상황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다른 환자들이 고통스럽다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있어야만 하니 무섭기만 했어요. 제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를 알게 된 건 사고 후 10일 정도 지나 일반병동으로 옮긴 후였어요. 그때 엄마가 처음으로 수첩에 그림을 그려가며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상태가 어떤 지 알려주셨어요. 양팔과 다리, 목에 깁스를 했다는 인지한 것도 그때예요. 뇌압을 낮추느라 앞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것도 엄마가 거울을 보여주고 나서야 알게 됐죠.”

-병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몸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병원이라는 작은 사회에서의 인간관계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6인실을 썼는데 한 할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데 제가 화장실 가는 소리에 깨셨나봐요. 그러니까 ‘작작 좀 돌아다니라’고 소리를 치시더라고요.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떨치기가 어렵더라고요. 하루 종일 같은 병실에서 지내야 하기도 하고요. 최대한 조심하며 지내는 방법밖에 없었죠.”

-사고 이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의 상황은 어땠나요?

“중환자실에선 무통주사를 계속 맞고 있어 아픈 줄 몰랐어요. 상황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다른 환자들이 고통스럽다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있어야만 하니 무섭기만 했어요. 제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를 알게 된 건 사고 후 10일 정도 지나 일반병동으로 옮긴 후였어요. 그때 엄마가 처음으로 수첩에 그림을 그려가며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상태가 어떤 지 알려주셨어요. 양팔과 다리, 목에 깁스를 했다는 인지한 것도 그때예요. 뇌압을 낮추느라 앞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것도 엄마가 거울을 보여주고 나서야 알게 됐죠.”

-병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몸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병원이라는 작은 사회에서의 인간관계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6인실을 썼는데 한 할머니가 낮잠을 주무시는데 제가 화장실 가는 소리에 깨셨나봐요. 그러니까 ‘작작 좀 돌아다니라’고 소리를 치시더라고요.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떨치기가 어렵더라고요. 하루 종일 같은 병실에서 지내야 하기도 하고요. 최대한 조심하며 지내는 방법밖에 없었죠.”


오른손 깁스를 풀고 스스로 쥐고 먹었던 양념치킨. /장채원

-반대로 가장 행복했거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요?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 둘 깁스를 풀기 시작했을 때예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아주대병원에서 수술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겼는데, 외래 진료는 계속 아주대로 다녔어요. 워낙 많이 다치다 보니 처음에는 민간 응급차를 불러 타고 간 뒤 침대로 이동하며 진료를 봤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는 걸어서 병원 안을 돌며 진료를 볼 수 있었어요. 그때 정말 기뻤어요. 주먹을 쥐기 힘든 오른손으로 양념치킨을 스스로 들고 먹었던 일도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예요.”

사고로 다친 귀를 수술을 하기 전 찍은 사진. 수술을 위해 양갈래 머리를 했다./ 장채원

-병원에서 만난 인연들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요양병원에 있을 때 늘 환자복 위에 빨간 조끼와 머플러를 두르고 치료실에 오시는 99세 봉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어요. 항상 밝은 얼굴로 먼저 인사해주시고 사는 동안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며 거의 매일 치료실에 나와 운동을 하시는 분이셨어요. 제일 어린 저와도 대화가 잘 통했고 굉장히 긍정적이신 분이었어요. 사실 병실에 70대 초반인데도 매일 ‘이 꼴로 어떻게 사나, 죽어야지’라는 비관적인 말씀만 하셔서 주변 사람들까지 지치게 만드는 분도 계셨었거든요. 봉 할머니를 보고 저도 현재의 제 상황을 비관하기보단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왼쪽부터 병원 옥상에서 쉬고 있는 채원씨, 채원씨가 그린 펭수 그림. /장채원

-코로나로 요양병원에서 7개월 간 건물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어요.

“외출도 외박도 면회도 모두 다 금지였어요. 병원 옥상에 올라가 트와이스 춤을 추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것마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건물에 병원만 있는 게 아니라 외부 사람과 접촉하게 될까봐 그랬나봐요. 실내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했어요. 밖은 봄이라고 하는데 전 그 기운을 느낄 수 없었어요. SNS에서 친구들이 벚꽃 구경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모습을 볼 때는 속상했지만 코로나는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치를 안 할 수도 없고요. 비관해봤자 달리지는 게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맞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감사일기와 칭찬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책을 주문해 토익 공부를 했어요. 지금은 비록 병원에 있지만 퇴원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며 버텼던 것 같아요.”


왼쪽부터 사고 후 뇌압을 낮추기 위해 빡빡 밀었던 머리가 조금 자란 모습, 팔과 다리에 남은 수술자국과 흉터. /장채원

-인터넷상에 글을 쓰기도 했어요.

“퇴원 후 집에 오니 백수라는 현실이 확 와 닿더라고요. 마음이 너무 갑갑했어요. 억울하게 버스에 치여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홀라당 날아가버렸고, 현실로 돌아오니 경력단절 딱지가 붙었잖아요.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까 하다가 글을 쓰는 채널에 제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저를 위해 썼는데 쓰다 보니 구독자 수도 늘어나고 댓글도 많아졌어요. 어떤 분은 젊은 나이에 화상을 입어 병원 생활 중인데 제 다리의 흉터에 대한 글을 보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위로를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니 세상에는 말을 하지 않을 뿐, 저마다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겠구나 싶었어요.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것만 알아도 위로가 될 때가 있잖아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제 글이 위로가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책을 내기로 결심했어요.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해 출간했죠.”

활짝 웃고 있는 채원씨. /장채원

-책 제목 ‘이왕 살아난거 잘 살아보기로 했다’는 어떻게 지은 건가요?

“교통사고가 나기 전 우울증이 많이 심한 상태였어요. 회사에서 정규직 전환이 안돼 해고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고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어요. 자살시도를 한 적도 있고요. 난 안 되는 사람인가보다, 쓸모 없는 사람인가보다라는 생각이 정규직 전환 실패로 가중됐죠. 그때는 어리석지만 죽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의도치 않게 사고를 당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노력을 하면서 나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그래! 이왕 이렇게 살아난 거, 다시 죽을 생각 말고 한 번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어요. 잘 살아보기로 했다는 건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저에게는 성실하고 긍정적으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걸 의미해요. 하루하루 무탈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바람이 있다면 봉 할머니처럼 몸과 마음이 건강한 귀여운 할머니로 늙는 것이에요.”

-책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고맙다는 메시지가 SNS를 통해 오기도 하고, 병원 생활 중인 가족이 그때 이래서 이런 말을 했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분도 있어요. 환자를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환자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기도 해요.”

-지금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지내시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아요.

“천성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다보니 꾸준히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도 감사일기를 쓰고 있고, 사람들이 칭찬을 해줄 땐 비공개 SNS 계정에 적어 놔요. 아주 구체적으로요. 우울한 날, 속상한 날 적어 놓은 걸 보면서 마음을 다잡죠. 하지만 아직 불안했던 어린 시절 가정환경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어요. 알코올 중독 아빠, 부모님의 잦은 다툼은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고, 저를 쉽게 불안해지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들었어요. 상담센터를 다니면서 과거의 부정적 감정들을 점차 해결해 나가고 있어요. 수의사라는 새로운 꿈도 생겨서 열심히 준비 중이에요.”

울산 간절곶에서 스스로에게 보낸 엽서. 은주는 채원씨의 개명 전 이름이다./ 장채원

-울산 간절곶에 혼자 여행을 떠났는데, 떠나보니 어땠나요?

“그동안 전 저를 못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전 혼자 행선지만 정하고 여행을 떠날 만큼 실행력 있고 대담한 사람이었더라고요. 파도 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 갔었는데, 그곳에 노란 우체통이 있더라고요. 제 자신에게 편지를 썼어요. 나 스스로가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돼야겠다고 생각해서요. 앞으로 5달 후 제 생일에 그 편지가 도착해요. 그때 편지를 보면 감회가 남다르겠죠.”

-사고 이전과 이후, 생활이나 마음가짐에서 가장 달라진 점을 뽑자면 어떤 걸까요?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저장해둔 글귀가 있어요.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지, 일장일단’. 사고 전에는 부모님이 싸우시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무기력함을 느끼고 좌절할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일들은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말아요. 바꿀 수 없는 일들에 아무리 애를 써봤자 뭐해요. 그냥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다리에 있는 큰 흉터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징그러울 수 있지만 이 흉터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면 어색함이 좀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것처럼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거고 이왕이면 좋게 생각하자는 마음에서 적어 놨어요.”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모델로 활동한 채원씨. /장채원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모델이 됐어요.

“사고 후 4개월 동안 뼈를 굳히기 위해 누워만 있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몸무게가 20kg이나 늘었어요. 그때 친구가 이 패션쇼 참가 지원 링크를 보내주더라고요.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 도전했어요. 면접을 보고 최종 10명 안에 합격해 모델로 활동했죠. 흉터가 있다고 못난 사람은 아니잖아요. 가족과 친구들도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너무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 책은 서른 한 살 취준생의 투병기이기도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20~30대들이 흔히 고민할 인간관계, 다이어트, 생리, 연애 문제까지. 우울증이 심했을 때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관련 책을 쌓아 두고 펑펑 울면서 읽은 적이 있어요. 도움되는 구절들은 노트에 한가득 적어 오기도 했고요. 전 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보다는 과거의 저처럼 마음이 힘든 분들, 좌절하고 계신 분들께 더 많이 전달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도서관에 더 많이 비치되길 바라요.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내일을 살아갈 작은 용기와 위안이 됐으면 좋겠어요.”

글 시시비비 포도당
시시비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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