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그룹이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의 매각을 추진하던 중 미국과 유럽 금융 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거래가 무산됐습니다. 전자상거래 기업 쿠팡의 최대주주로 유명한 비전펀드 운영사 소프트뱅크는 2016년 320억달러를 주고 영국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을 인수했습니다. 현재 ARM의 지분 중 75%를 소프트뱅크가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25%는 소프트뱅크 자회사인 비전펀드가 갖고 있습니다.

ARM은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2020년 기준 ARM의 모바일 칩 설계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합니다. 태블릿PC 설계 분야 시장 점유율도 85% 수준입니다. 애플, 퀄컴, 삼성전자, 엔비디아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ARM에 반도체 칩 설계를 맡깁니다. 사실상 칩 설계 시장을 ARM이 독점하고 있는 셈이죠.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한국이 앞으로 인공지능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유튜브 캡처


소프트뱅크는 2020년 9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ARM을 매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인수 대금은 약 400억달러로, 6년 전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할 때 지불한 320억달러보다 80억달러 많았습니다.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경쟁하거나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는 회사들이 이 거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엔비디아는 세계 최대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업으로, 미국의 반도체 회사 가운데 시가총액이 가장 큰 회사입니다. 엔비디아가 ARM을 품에 안으면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에서 나왔습니다. 퀄컴, 인텔, AMD,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미국, 영국과 유럽연합(EU)의 규제 당국도 독점 금지법을 근거로 소프트뱅크의 ARM 매각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결국 거래가 무산됐고,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에 위약금으로 12억5000만달러를 물게 됐습니다.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와 인수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금으로 이미 위약금 수준의 금액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반독점 규제 리스크로 상장 준비하던 소프트뱅크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ARM 매각이 절실했습니다. 2021년부터 이어진 저조한 투자 실적 때문이었습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는 2021년 3분기에만 1조1670억엔 정도 손실을 냈습니다. 지분 20.1%를 보유한 중국 자동차 공유업체 디디추싱의 주가 하락으로만 약 4조5000억원을 손해봤죠. 1조원을 투자한 인공지능(AI) 안면 인식업체 센스타임도 미국 정부의 제재로 홍콩 상장이 지연되면서 손실 규모를 키웠습니다.

투자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는 2021년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당시 “앞으로도 절대 팔지 않겠다”던 쿠팡 지분도 줄였습니다. 2021년 9월 약 2조원 정도의 지분(5700만주)을 털어냈고, 2022년 3월 9일에도 5000만주를 1주당 20.87달러에 매각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3조원어치 이상 주식을 팔아치운 겁니다.

손 회장은 2021년 11월 소프트뱅크의 실적을 발표하면서 “주주 환원 차원에서 최대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을 추진한다”고 말했는데요, 이 같은 약속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ARM 매각 실패는 소프트뱅크그룹 입장에서 악재였습니다. 현금을 확보할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ARM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은 반도체 사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매각을 추진해도 규제에 막혀 거래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결국 매각 대신 기업공개(IPO)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기업공개를 통해 투자자들의 자금을 확보하는 전략을 세운 거죠.

ARM은 기업공개 준비 과정에서 비용을 절감하고 핵심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경영진을 교체하고 인력 감축 계획을 발표하는 등 비상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2013년부터 ARM 최고경영자(CEO)로서 회사를 이끌어온 사이먼 시거스(Simon Segars)가 9년 만에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35년간 반도체 업계에 몸을 담았던 르네 하스(Rene Haas)가 신임 CEO로 선임됐습니다. 2022년 2월부터 ARM을 이끌고 있는 르네 하스는 취임 직후 영국과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의 12~15%를 해고한다고 사내 이메일을 통해 공지했습니다.

직원 수로 따지면 약 1000명 가까운 인력이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하스는 메일에서 “그 어느 사업과 마찬가지로 ARM은 기회와 비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업 계획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안타깝게도 이번 계획에는 ARM의 전 세계 직원에 대한 정리해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소프트뱅크는 상장을 통해 최소한 600억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상장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주주총회에서 ARM 인수 의지를 보인 박정호 부회장. /SK하이닉스 제공

◇“ARM 사고 싶다”는 한국 대기업 회장님

이 같은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ARM을 사고 싶다고 밝힌 대기업 회장이 있습니다. 바로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입니다. 박 부회장은 SK스퀘어와 SK텔레콤 부회장직도 겸직하고 있는데요, 2022년 3월 28일 SK스퀘어 정기 주주총회에서 그는 회사의 투자 방향을 소개하면서 “ARM을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박 부회장은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ADT캡스와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키옥시아) 등을 연달아 인수한 인물입니다. ‘M&A 승부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박 부회장은 3월 30일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도 “ARM 인수합병을 위해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전략적 투자자들과 함께 컨소시엄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인수 방식까지 언급했는데요. 소프트뱅크가 매각 계획을 완전히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ARM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시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으로 소프트뱅크가 ARM 상장 계획을 철회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쟁에 따른 세계 경기침체가 증시에 큰 타격을 주면 ARM이 기업가치를 기대치 만큼 인정받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업계에서는 “소프트뱅크가 인플레이션과 경제 긴축 등의 이유로 기업공개를 통해 ARM이 제값을 인정받기 힘들 것으로 본다면 SK 등 다른 회사에도 인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글 시시비비 영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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