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는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
비록 편집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중성 500% 첨가 체인소맨을 연재하고 있긴 하지만, 후지모토 타츠키는 본질적으로 작가주의 만화가이다. 대중성이나 개연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오직 자기가 그리고 싶은 주제를 그리는 것만이 타츠키의 목적이다. 본질적으로 만화를 서브컬쳐가 아닌 제9의 예술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먹음직스러운 1화를 보고 서브컬쳐나 장르의 관점으로 타츠키의 만화에 접근한다면 에퉤퉤퉤 엠창씹창 이게 뭐시여 하는 반응이 나온다. 지극히 정상이다. 1화와 작품 초반의 장르적 모습은 그냥 "씹덕 타츠키"의 개인적 취향이 잠시 발현되었을 뿐이고, "만화가 타츠키"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만화가 타츠키"를 사로잡은, 그가 만들고자 하는 한 편의 거대한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타츠키의 만화를 하나라도 본 사람은 쉽게 답할 수 있을거다. 영화, 나아가 "연기"다.
단편집의 작품들, 파이어 펀치, 룩 백, 안녕 에리, 체인소맨에 이르기까지, 타츠키의 만화는 모두 연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연기란 자신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를 흉내내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타츠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연기를 하고, 연기에 사로잡히고, 끝내 연기를 넘어선다.

가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울고 있다.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있다. 씹덕들은 게임 시리즈를 생각하겠지만 원래는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사용하던 가면을 뜻하는 단어다. 이 뜻에서 나아가 페르소나는 심리학 용어로 발전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격, 개인이 사회적 요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표출하는 공적 얼굴이 페르소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카운터에서 침을 뱉는 진상틀딱에게 "애미 씨발 가정교육을 625로 쳐받았나"라고 하는게 편돌이 김씨의 본성이라면, 웃는 얼굴로 "카운터에서 침을 뱉으시면 안됩니다."라고 응대하는건 김씨의 편돌이로서의 페르소나, 사회성의 가면, "연기"이다.
카를 융에 따르면 이 페르소나가 점점 비대해지면서 본성을 압박하여 삐슝뿌슝빠슝하는게 정신분열이고 페르소나와 본성의 합이 자아(에고)이며 페르소나 뒤에 감춰진 원형을 잘 조절하여 적절하고 균형잡힌 자기, 셀프를 찾아내는게 자아실현인데... 머리만 아프니까 넘어가자. 사실 나도 오래돼서 잘 기억 안난다.

이게 융의 정신구조도다. 아니마/아니무스는 각기 남성/여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여성성/남성성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런 밑바탕에서 타츠키는 연기=페르소나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발적인 페르소나와, 타의적인 페르소나다. 생성 과정에서의 주체성 여부 차이라고나 할까. 물론 자발적으로 만들었든 타의적으로 만들었든 결국 페르소나는 본성이 아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호아킨 피닉스가 조커가 아닌 것처럼.
그런데 호아킨 피닉스가 조커가 아니라는 게, 페르소나가 본성이 아니라는 게 무조건 잘못된 일일까? 호아킨 피닉스가 그 연기력으로 완벽한 초인을 완벽히 연기했다고 쳐보자. 이 초인은 똥도 안싸고 오줌도 안 누고 땀 대신 향수를 내뿜으며 석가모니와 같은 인성의 보유자이자 아이큐는 1557에 은가누랑 맞다이를 까서 이긴다. 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할까, 이 초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할까?
내가 호아킨 피닉스가 아닌지라 확답은 못 하겠지만,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초인이 될 수 있다면 자신 대신 초인으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페르소나는 반드시 부정적일까?

마더 카르멜은 악인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자신이 악인이라고 믿었다. 이 흉악무도한 악당은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이들을 납치하여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으로 보살폈으며 이렇게 키운 아이들을 해군에 넘겨 전란의 시대에 정의를 바로세우는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마더 카르멜은 과연 악인인가?
<여동생의 언니>

<룩 백>의 프로토타입 격인 만화다.
<여동생의 언니>는 콩쿠르 금상을 탄 작품을 1년동안 현관에 전시하는 전통이 있는 미술학교에 다니는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이다. 보다시피 동생은 언니의 누드화를 그려 당당히 금상을 수상하였고, 자랑스러운 동생을 둔 언니는 1년동안 공개처형을 당한다.
언니는 초딩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온, 3학년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빡고수다. 동생은? 언니를 동경해서 언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중3떄 붓을 처음으로 쥐어보았고, 이제 막 미술학교에 입학한 고1이다. 근데 동생이 언니보다 더 잘 그린다.
당연히 언니는 천재인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항상 사이가 좋았던 동생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언니를 동경하는 동생은 <자신의 목표>을 그리라는 과제에 언니의 누드화를 그린다. 동생을 싫어하는 언니는 누드화의 모델을 해 주지 않았기에 이 누드화는 상상도이다.
근데 이 상상도 속의 언니는 "진짜 언니"보다 가슴도 더 크고 유두도 더 예쁘다(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만화에 진짜 나오는 대사다. 나 변태 아님 ㅇㅇ). 자연스럽게 학생들과 교사와 학부모들은 현관에 걸린 "상상 속의 언니"와 "진짜 언니"를 비교하게 된다...
실로 변태적인 내용이지만 이쯤 설명했으면 대충 감이 올거다. "상상 속의 언니"는 동생이 만들어낸 타의적인 페르소나다. "진짜 언니"는 가슴도 작고 유두도 안 예쁘지만, 상상도를 본 사람들은 진짜 언니에게 페르소나를 기대한다는거다. 융 생각대로라면 페르소나가 셀프를 짓누르니 이제 정신붕괴로 이어질거다. 언니가 정신붕괴를 피하기 위해선 셀프를 강화시켜서 페르소나를 무찔러야 한다.
하지만 타츠키는 "연기=페르소나"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선생과 대화를 나누다 여동생이 그린 누드화의 주제가 <자신의 목표>라는걸 알게 된 언니는 여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내고, "여동생의 목표"를 연기하기로 결심한다. 자발적 페르소나다.
졸업식의 날, 동생이 그린 "상상 속의 언니"를 대신하여 현관에 전시된 그림은 언니가 그린 자신의 누드화이다. 언니의 누드화는 "상상 속의 언니"처럼 가슴이 크지도, 유두가 예쁘지도, 몸매가 좋지도(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짜 대사가 저렇다. 나 변태 아님) 않지만,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상 속의 언니"와 달리 강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열등감 때문에 동생을 바라보기를 포기했던 언니는 이제 "여동생의 목표"로서 당당히 여동생의 앞에 선다.
<자고 일어나면 여자애가 되어 있는 병>

체인소맨만 봤다면 의외겠으나 사실 타츠키는 퀴어 요소를 자주,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다.
페미니스트가 듣는다면 싫어할 이야기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류해보자. 남성성에는 강인함, 능동적, 3대 500, 상남자특)끓는물로 샤워함 뭐 그런 것들이 들어가고, 울보나 귀여움, 연약함, 수동성 등은 여성성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TS병>의 주인공 토시히데는 분명 "여성적"인 인물이다. 등장 장면의 8할 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울보니까. 딱히 여자가 되어서 이런것도 아니고 원래 성격 자체가 울보에 여자같은 녀석이라고 묘사된다. 융 식으로 말하자면 아니마(=여성성)이 매우 강한 사람인 셈이다.
그런데 어라, 자고 일어났더니 몸까지 여자가 되었네? 심지어 몸이 여자가 된 영향인지 토시히데는 학교에서 괴롭힘당하는 자신을 구해준 여자친구 리에의 "오빠"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꼈다고 말한다. 지금의 토시히데의 본성과 신체는 모두 여성이다.
오빠에게 NTR을 당?한 리에는 토시히데보고 섹스를 할테니 옷을 벗으라고 하지만(진짜 만화 내용이 이렇다.) 토시히데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토시히데의 커밍아웃(?)을 들은 리에는 나 대신 오빠가 토시히데랑 사귀라고 소리친 뒤 울면서 집을 뛰쳐나간다. 남겨진 리에의 오빠는 토시히데에게 조언한다. "너가 여자라면 여기서 계속 울고 있고, 남자라면 리에를 쫒아가라."
자신이 남자라고 선언한 토시히데는 리에를 쫒아가서 키스를 한 뒤 자신은 남자고, 리에와 섹스를 하고 싶다고 밝힌다.(진짜 대사다.) 병신같지만 어쨌든 섹무새는 분명히 남성적인 행동이다. 리에는 섹스 선언을 듣고 다시 토시히데에게 반하게 되고, "여자처럼 되어버린 나는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나래이션과 함께 만화가 끝난다.


토시히데는 <파이어 펀치>의 토가타와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다. 토가타는 남성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타인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여성을 연기하고, 토시히데는 여성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남성성을 연기하기로 결심한다. 이 주체성의 차이 때문에 토가타의 삶은 부정적으로, 토시히데의 결심은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연기를 좀 한다고 여자가 남자로 살아가는게 될까?
<사사키 군이 총알을 멈췄어>
된다.
비슷한 소리를 세 번이나 반복하려니 영 의욕이 떨어지지만, 이것도 결국 본성과 페르소나의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별거 없다. 평범한 고딩 사사키 군은 카와구치 선생님을 짝사랑한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에 테러리스트가 나타나서 선생님한테 권총을 들이밀었다. 테러리스트의 요구사항은 자기랑 카와구치 선생님이 섹스를 하는거다.(또다시 말하지만 진짜 만화 내용이 이렇다.) 물론 사사키 군은 테러리스트가 카와구치 선생님이랑 섹스하는게 싫다. 사사키 군이 선생님의 섹스를 막으려면? 테러리스트가 쏘는 총알을 잡아야 한다. 근데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총알을 잡냐?


이렇게 잡는다.
물론 인간이 총알을 잡는다는건 개소리다. 인간은 카카로트나 나루토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사사키 군은 총알을 잡았다. 왜냐? 사사키 군의 본성이 무엇이든, 사사키 군은 스스로 "총알을 잡을 수 있다"는 페르소나를 연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논리나 설명,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주제의식은 언제나 설정에 우선하는 법이니까. 설정은 결국 작가가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낸 규칙일 뿐이다. 작가가 정한 규칙 따위가 어떻게 작가의 의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말을 이길 수 있겠는가.
자신의 진짜 모습, 본성이 아무리 비참하고 찐따같아도 이상 속의 자신을 연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제 TS병에서 던진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연기를 한다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사사키 군은 총알도 잡았다. 인간이 총알도 잡는데 고추 없이 섹스하는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사사키 군이 총알을 멈췄어>의 마지막 장면이다. 작가는 이 장면을 지구와 운석 중 무엇으로 그릴지 한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 총알도 멈췄는데 운석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디시가 병신이라서 나머지 반은 따로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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