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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그에게서 들어보는 귀엽다는 말, 감질맛나는 그 달콤한 단어가 체온이 가장 낮은 몸의 부분인 귀를 타고 흘러들어가 붉은빛의 혈액을 심장을 꿰뚫어 목, 얼굴까지 발갛게 문지르고 색을 칠한다.

물론, 다른이가 나에게 그랬다면 좁쌀만큼도 그리고 경멸스러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터인데, 상대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반증하는듯이 나는 고개를 당당하게 들어 그의 여유로운 표정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괜시리 잔에 맺혀있는 죄없는 물방울의 개수만 하나, 둘 마음속으로 세고있었다.

“ 조... 조금은 당황스럽네... 맨날 귀여워 해주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니 무슨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걸... ”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나긋이 내밀고, 그리고 소심한 반항을 나름대로 해보지만 그런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듯이, 이미 이 데이트에서 그와 나의 상하관계가 생각보다 크게 벌어져 버렸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고, 심지어는 피부로까지 와닿아 그 기분좋은 촉감이 보드랍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것 처럼 나는 그저 손가락으로 붉은 머리칼을 돌돌 말고 있을 뿐이었다.

“ 덴지군... 덴지군은 어떤점에서 그렇게... ”

마침내 나는 고개를 들어 덴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상대방은 아무말도 없이 지긋이 웃음만 짓는 그 모습이 더더욱 나를 미치게 만드는지, 연신 갑갑함을 느끼며 하고싶은 말조차 뱉어내지 못한 스스로를 크게 원망하고 있었다.

바보, 바보, 그토록 바라오던 기회가 눈앞에 왔거늘, 그토록 원했던 그러한 상황이 되었거늘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기회를 내 손바닥으로 잡기는 커녕,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이 감정은 지배의 악마라는 정체성을 어느정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고개를 연신 저어대며 행여나 내가 실수 한 것이 없는지, 약점을 노출한점은 없는지 이성을 부여잡고, 냉정을 억지로 끌어오며 평소처럼 분석가의 시선에서 바라보려 노력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아무런 소용조차 없었고, 이 이름모를 감정에 무기력하게 젖어들며 온몸이 녹아드는 기분을 서서히 맞이하고 있었다.

“ 그냥요. 지금 하는 것도 그렇고요. ”

예상치 못한 타이밍,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그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의 핏기는 채도가 한층 선명해져 접시위에 놓여진 선홍빛의 고기 단면보다 훨씬 붉은색을 강렬하게 띄우고 있었고,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은 생각만이 물밀듯이 머릿속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는 기분좋게 뇌가 녹아버렸는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되어 어느샌가 연거푸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아직 나의 속도를 배려해주느라 상대방은 여전히 음식을 다 먹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순식간에 해치워진 접시는 나의 이성만큼이나 공허했다.

이후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듯 하였고, 디저트로 나온 조각케익과 커피의 맛조차 기억해내기 힘들었으며 멍하니 그가 이야기 하는것에 장단만 맞추어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던 엉망진창인 식사였을지도 모르지.

“ 후우, 마키마씨 맛있었어요! 그래도 고맙네요. 애들에게도 자랑해야겠어요. ”

주스를 게걸스레 한입에 털어넣은 덴지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말하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곱게 빗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최대한 상냥한 웃음을 띄운 채 다음 행선지로 가고자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자, 계산은 내가 할테니 다음코스로 가자. ”

“ 으에..? 아니에요... 저도 돈정도는 모아둔게... ”

“ 내가 신청한 데이트인걸, 말을 잘 듣기로 했잖니...? ”

“ 칫... 알았다구요. 그러면 이제부턴 뭘 할거죠? 생각하신거라도 있으신가요? ”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퉁명스레 답변하는 그 아이는 꼴에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 주둥이를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다음 목적지를 나에게 묻는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에 나는 그런 모습에 밝게 화답하며, 기분좋게 들어찬 포만감을 한껏 느끼고는 적막하게 다가왔던 창밖의 풍경이 어느샌가 아름답게 나의 눈동지에 비추어지곤 달콤히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피부에 스며들고 있었다.

적지 않은 금액을 계산하고 식당 밖으로 나와, 올라왔던 순서 반대로 지상으로 내려가며 엘레베이터에 있는 동안 온갖 망상들이 스멀스멀 튀어나와 나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안아주는 상상.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추는 상상.

그가 나만을 바라봐주는 상상.

그의 숨결을 가까이...

“ 마키마씨. ”

망상속 가운데에서 희끄무레한 소년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하얗게 들려온다.

“ 마키마씨! ”

멍하니 사라졌던 눈동자의 초점이 쾌청한 경종과 함께 번뜩 깨이며 돌아오곤, 정신을 다잡으니 심드렁한 그의 표정이 내 얼굴에 바짝 다가와 망상했던 내용중 일부를 발맞추어 실현시켜주는듯 싶었다.

꿈이 아닐까, 볼을 직접 꼬집어보며 몸이 얼어붙은 나의 눈 앞에 손을 펼쳐 흔들어보이는 천방지축 소년앞에서, 과연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 마키마씨, 무슨생각을 그렇게 해요...? 볼은 또 왜 꼬집고 있어요. ”

“ 아...?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

“ 아무것도 아니라... 흐음... 알았어요. ”

헛기침만을 간신히 쥐어짜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도도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나는 곧 어색한 제스쳐를 취하기 시작했고,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있을테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무기력하게
하지 못할바에야 이렇게라도 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며 합리화가 들끓는 시점이었다.

“ 덴지, 영화 좋아해...? ”

“ 영화요...? 가끔 집에서 아키랑 파워랑 같이 액션영화 본 적은 종종 있죠...? 으음... 나름 재미있게 봤던걸로... ”

“ 그렇다면, 영화관 데이트도 분명 마음에 들어하겠지? ”

“ 아...? 네... 뭐... 근데 저는... ”

“ 자, 이제부터 밤 11시까지 영화관을 달릴겁니다. 이의없지...? ”

“ 하아... 갑자기요...? 알았으니까... ”

“ 응. 오늘의 코스인걸. 따라와줬으면 좋겠네. ”

“네에... ”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에게 선사할게, 분명 너도 이것을 좋아할거야.

내가 주는 먹이와 흥미거리들을 얌전히 잘 받아먹고, 나만을 좋아해주련...?

너는 내것이니까, 그렇게 해야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의 심연으로 생각이 이끌려, 더욱 아득하고 까마득한 구렁텅이로 깊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지만 그딴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나는 아랑곳않고 그를 갖기위해, 그리고 이 조막만하고 새하얀 손아귀에 집어삼키기위해 부드럽게 그의 턱밑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 ... ”

약간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덴지를 보고, 나는 약간은 신경쓰이는 이 느낌때문에 오롯이 피어나는 궁금증을 그대로 의문문에 담아 간지러운 부분을 해소시켜주길 바랬다.

“ 덴지군, 무슨일 있니? 표정이 좋지 않네? ”

“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빨리 영화나 보러가요. ”

좀 전의 식당에서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어디가고, 쌀쌀맞고 거친 처음의 덴지로 돌아가버린듯 칼날과 같은 서리내린 바람이 온몸을 타고 꽤나 날렵한 따끔함을 내게 톡톡히 선보여주었다.

무슨일이지? 

아무도 내게 이런식으로 대한적도 없었는데 실로 당황스럽다.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며, 내 멋대로 쥐락펴락 할 수 없는 그에게 이름모를 짜증까지 치밀어오르고, 급기야 약간 언성까지 높이며 나는 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 덴지, 적어도 데이트하는 도중엔 즐겁게 해주면 안되겠니...? ”

“ 네? 하아... ”

“ 응? 한숨은 또 왜 쉬는거야...?  나랑 하는 데이트가 별로인거야? 정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돌아가도 좋아. ”

기강을 잡기위해 살짝은 핏기서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약간 주춤하며 뒷걸음질 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고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나의 감정에 맞춰주지 않은 그에게 잔뜩 심술이 난 나는 의도치않게 매섭게 그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 아니, 데이트는 즐거운데... 그냥 빨리 영화나 보러가면 안돼요...? ”

그 역시 마찬가지로 짜증섞인 눈빛이 역력했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회피하려 발버둥치는 그가 늘상 그랬듯이 가소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내 속마음도 몰라주는 모습에 안타깝고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 덴지, 앞으로 내게 그런표정과 말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내가 하자는대로 하겠다는건 너였어. ”

되도 않는 소리를 내 길다란 혀로 그를 향해 다그치며 앞으로 성큼 다가가자, 그 역시 이럴때에만 발맞추어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고, 참지못한 나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힘차게 앞으로 돌아서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신경쓰이지 않았다.

덴지군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하고싶은대로 영화관을 향해 말안듣는 말괄량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듯이 억지로, 그리고 강제로 이끌고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하였다.

기분나쁜 뜨거운 열기가 속에서 가득 차, 어느덧 한숨을 내리쉬며 도착한 영화관에서 알아보았던 표를 끊고, 영화표를 그에게 던지듯이 넘겨주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게되니, 탐탁치 못한 남녀 둘만이 불편한 기색으로 팔짱을 끼고앉아 아직은 불이 꺼져있는 스크린을 쳐다보며, 서로를 한번도 바라보지 않은 채, 나란히 시선을 평행하게 한 지점으로 집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