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부 if물임. 덴지가 마키마 완식 이후 공안을 때려치고 나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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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덴지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소년.
많은 아픔과 상실을 겪고, 한층 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레제와 재회한 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서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따뜻한 진심으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레제
폭 탄 악마의 심장을 가진 소녀.
조국에 버림받고 무기로서 살아온 과거의 악몽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덴지와의 재회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일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며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능숙한 선생이자, 때로는 그의 품에서 위로받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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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마를 먹어치운 이후의 세계는, 덴지가 알던 세계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떴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거리를 오갔으며, 악마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나타나 비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덴지에게 있어 그 모든 풍경의 색채는 미묘하게 바래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태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 혹은 거대한 목표를 상실한 자의 공허함 같은 것이 그의 일상을 옅은 막처럼 감싸고 있었다.
공안을 나온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곳은 더 이상 그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명확한 감각이 있었다. 마키마라는 거대한 존재가 사라진 공안은 평범한 직장이 되었고, 덴지에게 평범한 직장이란 따분함과 동의어였다. 족쇄가 사라진 자유는 달콤했지만, 그 자유가 데려다준 곳은 막막한 벌판이었다.
그는 민간 데블헌터가 되었다. 의뢰를 받아 악마를 잡고, 보수로 끼니를 해결하고, 남는 돈으로 월세를 냈다. 삶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과거에 느꼈던 최소한의 온기조차 없었다. 포치타의 심장이 뛰는 감각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지는 날들이었다.
그날도 덴지는 의미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빌딩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는 시간,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약속 장소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뒤섞여 거리는 인간의 강을 이루고 있었다.
덴지는 그 흐름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정처 없이 발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는 며칠 전에 받은 보수가 들어있었지만, 딱히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히,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으면 이 지긋지긋한 허기가 조금은 채워지 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가 스쳐 지나가고, 온갖 종류의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자동차 경적,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 그 모든 것이 그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배경음악 같았다. 그는 군중 속의 섬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심코 횡단보도 맞은편으로 시선을 던진 그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들어왔다.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었지만, 유독 그 모습만이 덴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
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듯한 위태로운 몸짓.
덴지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멀어지고, 오직 저편의 인영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레제.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함께 비를 피했던 좁은 전화 부스.
어설픈 마술에 까르르 웃던 그녀의 웃음소리.
아무도 없는 밤의 학교 교실에서 나눴던 시시껄렁한 농담들.
그리고 수영장에서의 일탈.
불꽃놀이 아래서 함께 도망치자고 속삭이던 목소리.
그 모든 달콤한 기억의 끝에는 언제나 폭음과 피의 냄새가 서려 있었다. 그의 심장을 노리던 소련의 자객. 그를 속이고, 이용하고, 죽이려 했던 여자.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덴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전과 많이 달라 보였다. 활기차고 당당하던 걸음걸이는 온데간데없었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어깨를 움츠린 채 걷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운 듯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은, 덴지가 알던 레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작은 짐승 같았다.
'...상관없는 일이야.'
덴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녀는 적이었다.
그를 죽이려 했던 여자고, 그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다시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상대였다.
그저 모르는 사람이라고,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함께한 기억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 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본 그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낡고 해진 옷,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무언가에 쫓기는 듯 연신 주위를 살피는 초조한 몸짓. 저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혼자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살아있을 거라고는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증오했냐?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는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의 끝이 너무나도 끔찍했기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지나치면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저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오늘 밤 잠자리에 누워서도 분명 그녀의 얼굴이 떠오를 터였다. 그 찝찝한 기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결국 덴지는 무단횡단으로 차도를 가로질러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레제는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번화가를 벗어나 점점 더 어둡고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드문드문한, 쓰레기 더미가 뿜어내는 악취와 축축한 어둠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런 곳이 익숙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덴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뒤를 밟았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하고 사는 걸까.
한참을 더 걸어, 그녀는 낡아빠진 3층짜리 건물의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1층에는 문 닫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라멘 가게가 있었고, 건물 외벽은 페인트가 벗겨져 흉측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덴지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 끝, 낡은 나무 문 앞에서 그녀의 기척이 사라졌다.
덴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지만 이 문 너머에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돌아설 수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 너머에서 숨을 죽이고 이쪽을 경계하는 기척.
덴지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문 안쪽에서 작게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정적.
덴지는 이마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레제. 나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안쪽에서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리며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틈새로 보이는 것은 잔뜩 경계심에 물든, 겁에 질린 녹색 눈동자였다.
그녀는 덴지를 확인하고는 놀라움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그냥 길 가다 봤다. 문 좀 열어봐."
레제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녀가 사는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덴지는 방 안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사람이 사는 방이라고는 믿기 힘든 풍경이었다. 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방 안에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공간에는 얇은 이불과 베개가 전부였고, 구석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 용기와 과자 봉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관 속 같은 방이었다.
레제는 그런 방 한가운데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덴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덴지는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꼴이 왜 이래?"
덴지가 무심하게 물었다. 레제는 대답 대신 입술만 깨물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누가 보낸 거지? 공안?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편집증적인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길에서 봤다고."
"거짓말! 우연일 리가 없어. 날 처리하러 온 거지? 쓸모없어진 도구는... 흔적도 없이 없애버려야 하니까..."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벽에 등을 기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덴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아무도 안 보냈어. 그리고 널 처리할 생각도 없고. 그냥... 어... 그냥 너 하는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따라온 거야."
덴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레제의 경계심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의심과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내가 어떻게 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우린 적이었잖아. 넌 날 죽여야 하고, 난 네 심장을 가져가야 했는데."
"그건 그때 얘기고."
덴지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삐걱, 하고 낡은 마룻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레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밥은 먹었냐?"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레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덴지는 구석에 쌓인 컵라면 용기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런 것만 먹고 사나 보네. 그러다 골병들어."
"상관없잖아."
"상관있어. 사람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녀야지."
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레제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문 쪽으로 이끌었다.
"뭐 하는...!"
"밥 먹으러 가자. 뭐라도 좀 먹여야 얘기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싫어! 난 밖에 못 나가! 나가면... 나가면 그들이 날 찾아낼 거야! 감옥 안에 있더라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레제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덴지는 그녀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며 말했다.
"그럼 내가 사 올게.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문 잠그고."
그는 레제의 손을 놓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덧붙였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도망가 봤자 갈 데도 없잖아, 너."
그 말을 남기고 덴지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잠금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안의 기척을 살폈다. 희미한 흐느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근처 편의 점에서 도시락 두 개와 따뜻한 음료수, 그리고 약간의 간식거리를 샀다. 다시 그녀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덴지는 방으로 들어와 편의 점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레제는 여전히 벽에 기댄 채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덴지는 도시락 하나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먹어."
레제는 도시락을 내려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덴지는 젓가락을 뜯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안 먹을 거면 내가 다 먹는다."
그는 자신의 도시락 뚜껑을 열고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우물거리며 음식을 씹는 그의 모습을, 레제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맡아보는 따뜻한 음식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덴지는 못 들은 척하며 식사를 계속했다. 잠시 후, 레제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따뜻한 밥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눈물을 감추며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오직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와 음식을 삼키는 소리만이 좁은 방을 채웠다. 덴지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묵묵히 음식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도시락 바닥에 붙은 밥알 하나까지 깨끗하게 긁어 먹고 나서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
모기만 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덴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갈 거지?"
레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 불편한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덴지는 그녀의 기대를 가볍게 무시했다.
"아니. 오늘 여기서 잘 건데."
"뭐?"
레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왜... 왜 여기서 자? 네 집 있잖아."
"너 혼자 두면 또 무슨 짓 할지 몰라서 그런다. 밥도 안 먹고 저러고 있다가 굶어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난 괜찮아! 혼자 있을 수 있어!"
"안 괜찮아 보이는데."
덴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방구석에 있던 얇은 이불을 끌어와 바닥에 펼쳤다.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넌 거기서 자."
그는 침대 역할을 하는 낡은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레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와 매트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불편해."
"나도 불편해.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넌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돼."
덴지는 이불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 부스러기가 보였다. 그는 팔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불 꺼."
레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벽에 달린 스위치를 내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오직 두꺼운 커튼 틈새로 희미한 도시의 불빛이 새어 들어올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덴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모르겠어."
레제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그냥... 무서워. 언제 그들이 날 찾아낼지, 어떻게 죽게 될지... 매일 밤 그런 꿈을 꿔."
"죽는 게 무서워?"
"...아니.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어차피 난...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벌레처럼 숨어 지내다 죽는 건 싫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배어 있었다. 덴지는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녀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너는 도구가 아니야."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도구는 생각을 안 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하지만 넌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 무섭다고, 이렇게 죽는 건 싫다고."
"......"
"사람은 생각하잖아. 그러니까 넌 사람이야."
덴지는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누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봐. 도망만 다닐 건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건지. 네가 직접 생각해서 정해.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야."
그의 말은 투박하고 단순했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그녀에게는 작은 등불처럼 느껴졌다. 생각한다. 선택한다. 그녀의 인생에는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덴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지쳐 있었고, 복잡한 생각보다는 잠을 선택했다.
하지만 레제는 잠들 수 없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옆에 누운 덴지의 기척을 느꼈다. 그의 존재가 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 했던 상대가, 지금은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사람’이라고 말했다.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의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사람은 생각한다.’
그 단순한 문장이 그녀의 굳어 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지난 십 몇년간 그녀는 오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무기였다.
생각이라는 것은 금지된 사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모든 것을 잃고 숨어 지내는 지금에서야, 그녀는 생각하라는 말을 들었다.
레제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잠든 덴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무방비하고, 어딘가 아이 같은 얼굴.
그녀는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가, 잠시나마 평범한 소녀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감정들은 분명 진짜였다.
거짓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이 되어버린 마음.
그래서 더 괴로웠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수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덴지의 말대로,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어둡고 축축한 방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평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도, 기댈 사람도 없었다.
밤은 깊어갔다.
도시는 잠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방은 세상과 단절된 섬처럼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레제는 아주 오랜만에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덴지가 던져준 작은 불씨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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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행복한 순애보다 이런 식의 구원순애가 더 맛있는거같아서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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