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덴지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소년.
많은 아픔과 상실을 겪고, 한층 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레제와 재회한 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서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따뜻한 진심으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레제
폭 탄 악마의 심장을 가진 소녀.
조국에 버림받고 무기로서 살아온 과거의 악몽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덴지와의 재회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일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며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능숙한 선생이자, 때로는 그의 품에서 위로받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
어둠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방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두꺼운 커튼이 외부의 빛을 완강히 거부했고, 그 덕에 방 안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심해와도 같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먼저 잠든 덴지의 숨소리는 얕고 고르게 공간을 채웠다.
레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마치 뇌의 어딘가에 달린 스위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은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었다.
덴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안정감을 주었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감각이었다.
적이었다.
서로의 심장을 노렸던 관계였다.
그런 상대가 내뿜는 온기가, 그의 존재가 이 비좁고 차가운 방 안의 공기를 미약하게나마 데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사람’이라고 말했다.
생각하고 선택하라고 했다.
그 말은 그녀의 가슴속에 박힌 파편처럼 계속해서 그녀를 찔렀다.
아프면서도, 동시에 그 자극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생각. 그녀는 그 단어를 혀끝으로 굴려보았다.
그녀의 삶에서 ‘생각’이란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에 가까웠다.
오직 명령을 이해하고, 가장 효율적인 수행 방법을 계산하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그 외의 모든 사적인 감정이나 고뇌는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결함으로 취급받았다.
훌륭한 무기는 말이 없고, 감정이 없으며,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그녀는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만들어졌다.
‘사람은 생각하잖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했다.
그 단순하고 무심한 한마디가 그녀를 지탱해왔던 세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사람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었는가.
내가 죽여온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으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그때였다. 생각의 꼬리를 물자, 닫혀 있던 기억의 수문이 열리듯 과거의 영상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발작과도 같았다.
...
...
...
회색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차가운 훈련실.
소독약과 희미한 화약 냄새가 뒤섞인 공기.
어린아이들의 거친 숨소리와 교관의 날카로운 소련어의 고함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Оружие не думает! Оружие подчиняется!" (무기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기는 복종한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소년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피 맛이 입안에 번졌다.
쓰러질 틈도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고통은 익숙했다.
고통보다 무서운 것은 교관의 실망한 눈초리였다.
쓸모없다는 낙인.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비명을 삼키며 다시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이겨야 한다는 본능만이 몸을 움직였다.
장면이 바뀌었다.
창문 하나 없는 독방.
하루에 한 번, 문 아래의 작은 배식구로 멀건 수프와 딱딱한 빵 조각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 있는 법을 배웠다. 아니,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법을 강요당했다.
감각이 무뎌지고 시간이 흐릿해졌다.
벽에 새겨진 무수한 흠집들을 세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때로는 환청이 들렸고, 환각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들을 친구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그녀가 미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Бомба." (폭 탄.)
누군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이름 없는 소녀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강력한 무기, ‘봄바’였다.
그녀는 그 이름에 익숙해져야 했다.
자신의 몸에 깃든 악마의 힘을 제어하는 훈련은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일부를 폭파시키는 감각은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무기는 아픔을 느끼지 않으니까.
"Твоя цель - сердце бензопилы." (너의 목표는 체인소의 심장이다.)
서류 위에 놓인 덴지의 사진.
무표정하고 멍해 보이는 얼굴.
그녀는 그 얼굴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그의 모든 것을 외웠다.
취향, 습관, 약점.
그를 유혹하고, 그의 마음을 얻고, 방심했을 때 심장을 꺼내 와야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
...
...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그녀의 정신을 할퀴었다.
과거의 목소리들과 현재의 고요함이 뒤섞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소련에서 그녀는 ‘봄바’라는 이름의 도구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 어둠 속에서 덴지는 그녀를 ‘사람’이라고 불렀다.
두 개의 정체성이 그녀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켰다.
두통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자놀이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기억의 홍수가 뇌를 압박하는 감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마를 짚었지만 소용없었다.
고통은 안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크윽..."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어떻게든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이 혼란을, 이 괴로움을 멈추고 싶었다.
과거의 망령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문득 그녀의 시선이 옆에 누워있는 덴지에게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윤곽은 희미하게 보였다.
곤히 잠든 얼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저 가슴속에, 그녀가 그토록 손에 넣으려 했던 체인소의 심장이 뛰고 있다.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심장을... 조국에 바친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임무를 완수한다면, 그녀는 다시 ‘봄바’가 될 수 있다.
쓸모 있는 도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더 이상 이렇게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생각할 필요도, 선택할 필요도 없다.
다시 예전처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완벽한 무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 끔찍한 두통도, 마음을 좀먹는 불안감도 모두 사라질 터였다.
그녀는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익숙한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신 마음속에 차가운 결의가 자리 잡았다. 그래, 그거면 된다. 그게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이다.
레제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전까지 그녀의 눈동자를 채우고 있던 혼란과 고뇌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텅 빈 무기질의 시선만이 남았다.
마치 잘 닦인 렌즈가 목표물을 포착하듯, 그녀의 시선은 덴지의 목에 고정되었다.
생기가 사라진 얼굴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조차 내지 않는, 수년간의 훈련으로 다져진 움직임이었다.
잠든 덴지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따뜻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망설임 없는,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그녀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이 손으로, 무방비 상태인 그의 목을 조르면, 그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임무도 수없이 해냈다.
하지만 손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막힌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피부 위에서 멈춰 서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몸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죽여라’는 명령이 울리고 있는데, 몸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이번에는 차가운 훈련실의 기억이 아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좁은 전화 부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가 보여주었던 서툰 마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토사물이 아니라, 하얀 꽃 한 송이였다. 그 꽃을 건네받았을 때의 놀라움과 당혹감.
‘고마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진심.
아무도 없는 밤의 학교. 교실 칠판에 유치한 낙서를 하며 함께 웃었던 시간. 수영장에서 그의 서툰 몸짓을 가르쳐주며 느꼈던 간지러운 감정.
‘가르쳐 줄게. 네가 모르는 거, 못하는 거, 전부 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아래서, 그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속삭였던 순간. 그것은 임무를 위한 연기였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그녀 자신의 진심이 되어 있었다.
‘그야 덴지 군을 좋아하니까!'
그 기억들이 되살아나자,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다시 뜨거워지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목을 향해 뻗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파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도구가 될 수도, 그렇다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존재였다.
그를 죽일 수도,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그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의 기억들이 떠올라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지금의 비참한 현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도망가야 했다.
그를 쳐다보면 가슴이 미어지니까. 그의 곁에 있으면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으니까.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가 없는 곳으로, 이 감정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레제는 결심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낡은 마룻바닥이 그녀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문고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는데."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온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덴지가 상반신을 일으킨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듯한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그녀를 향해 있었다.
"......"
레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망치려던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다가 깼는데, 네가 없어서."
덴지는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어디 가려고."
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나 책망의 기색은 없었다. 그저 순수한 궁금함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레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려고."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스스로도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흐음. 이 시간에?"
덴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레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접근이 두려웠다.
"거짓말."
그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서서 나직하게 말했다.
"너, 도망가려고 했지."
정곡을 찔리자 레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왜. 내가 불편해서? 아니면... 아직도 내가 무서워서?"
"......"
"말했잖아. 난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한다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그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그녀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그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 사실이 그녀를 죄책감으로 짓눌렀다.
"그냥... 그냥 여길 떠나고 싶었어. 너랑 상관없이."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래."
덴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제는 그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혹은 가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따뜻한 온기가 등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덴지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것이었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고, 그의 턱이 그녀의 어깨 위에 가볍게 얹혔다.
그의 가슴이 그녀의 등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등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
레제는 숨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접촉이었다.
훈련이나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한 온기가 담긴 포옹.
"가지 마."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잠이 덜 깬,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밖에 추워. 그리고 위험해."
그의 말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완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는 내 옆에 있어."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할 의지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품은 이상할 정도로 아늑했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공포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 같았다. 이 온기를 평생 갈구해왔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이 온기를 느낄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어깨 위로, 그의 셔츠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울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었지만, 흐느낌은 막을 수 없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림을 느꼈는지, 그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다정한 행위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이 온기는 거짓이다.
이 안락함은 환상이다.
그는 모른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는 사실을. 그가 베푸는 온정의 대상이 실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그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이 뒤엉켜 정신을 어지럽혔다. 덴지가 심어준 ‘사람’이라는 작은 씨앗과, 그녀의 존재 자체를 규정해온 ‘도구’라는 거대한 낙인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혼란을, 이 모순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그의 품을 거칠게 밀어내며 벗어났다.
갑작스러운 저항에 덴지는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몇 걸음 물러선 그녀는 그를 등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등을 돌렸음에도 그의 시선이 등 뒤에 못처럼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그가 물었다. 여전히 잠이 덜 깬, 그러나 어딘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도화선이 되었다. 그녀 안에 억눌려 있던 모든 혼란과 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레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비명에 가까웠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처참했다.
"레제는... 당에서 부여받은 가명일 뿐이야. 임무를 위한 이름. 나는... 나는 이름이 없어."
그녀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떨렸다. 그녀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댐이 무너져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듯, 그녀의 입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름도 없고, 부모도 없고, 고향도 없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만들어졌을 뿐이야. 무기로서, 도구로서!"
그녀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한 절박한 손짓이었다.
"나는 평생을 도구로 살아왔어.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그게 내 존재의 전부였어. 그런데 이제는... 나를 다뤄줄 주인이 없어. 나는 버려졌어. 쓸모없어졌다고!"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울부짖었다.
"머물 곳이 없어. 돌아갈 곳도 없어. 나는... 나는 대체 뭐야!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건데!"
그녀의 절규가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덴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옷을 붙잡고 오열하는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네가 나한테 명령을 내려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흐려진 녹색 눈동자에는 광기 어린 애원이 서려 있었다.
"나를... 나를 도구로 써 줘. 뭐든지 할게.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죽이라면 죽이고, 부수라면 부술게. 제발... 나에게 임무를 줘. 목적을 줘!"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매달렸다.
"그래,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어. 네 마음을 유린하고, 네 심장을 빼앗으려고 했지. 그러니까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당연해. 나한테 화가 많이 났을 거 아냐.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때려.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도 좋아. 나는 맞는 대로 맞을게. 아무 저항도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녀의 말은 점점 더 횡설수설해졌다. 이성과 논리는 이미 마비된 지 오래였다. 오직 버려졌다는 공포와 존재의의를 상실한 절망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그냥..."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갈 듯 작아졌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체념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네 마음껏 노리개로 써도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나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마. 쓸모없다고 말하지 마..."
그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는 처절한 선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물건으로, 장난감으로 취급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버려지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듯했다.
덴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들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갔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레제는 그의 침묵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희미한 기대감이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도 싫다면..."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단호했다.
"차라리 나에게 죽으라고 명령해 줘."
"...!"
"그러면 기꺼이 죽을게. 네가 보는 앞에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게... 버림받은 채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사는 것보다, 주인 없이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아. 마지막으로나마 임무를 완수하고 죽는 거니까. 제발... 덴지. 나에게 마지막 명령을..."
그녀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내뱉을 단어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그저 그에게 매달린 채, 지친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방 안에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덴지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품에 기대어 가늘게 떨고 있는 존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쏟아낸 말들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절망이었다. 도구, 주인, 명령, 노리개. 그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기에는 그녀의 상처가 너무 깊었고, 섣부른 동정은 오히려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도, 그녀를 때리거나 노리개로 삼을 생각도, 죽으라고 말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이 망가진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녀를 어떻게 건져내야 할지, 그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꾸던 소년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이듯, 그녀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떨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절망적인 애원 앞에서, 그는 과연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하는 걸까.
어둠 속에서 그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작은 머리를 감싸 안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참고로 해피엔딩임
- dc official App
전나 잘 읽히네 굿
피폐 순애는 지고의 미식임
in the sea 무한재생 걸어놓고 보니깐 몰입감 2배됨 - dc App
재밌네 잘읽었음
피폐뒤의 해피엔딩은 미식이지 암암
이런 명작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아니 문체 왤케 유려함 해피엔딩이라니 믿고 갑니다
다시 봐도 레제의 정체성 고민하는 부분이나 혼란스러워하는 대사가 미식임 ㄹㅇ
비익연리 합연기연 낙화유수 애집염착
누가 이거 ai 만화로 변환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