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덴지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소년.
많은 아픔과 상실을 겪고, 한층 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레제와 재회한 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서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따뜻한 진심으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레제
폭 탄 악마의 심장을 가진 소녀.
조국에 버림받고 무기로서 살아온 과거의 악몽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덴지와의 재회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일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며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능숙한 선생이자, 때로는 그의 품에서 위로받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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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죽기 싫어서 싸우는 단순한 생존의 법칙 속에서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의 세계에서 감정은 사치였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거세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그녀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서투른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아주 느리게.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표현이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아주는 것과 같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레제의 격렬했던 떨림이 순간 멎었다.
그녀는 고장 난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비난이나 동정, 혹은 경멸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에는 그 어떤 평가나 판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온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투박하고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
그 온기가 두개골을 뚫고 얼어붙어 있던 뇌수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이 온기는 무엇인가.
이 다정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이런 종류의 접촉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접촉이란 언제나 목적을 가졌다.
제압하기 위한 것이거나,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유혹하기 위한 것.
그러나 그의 손길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 마."
레제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길에 의지하려는 듯 몸이 자꾸만 그쪽으로 기울었다.
모순된 몸의 반응에 그녀는 더욱 비참해졌다.
"나는...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어. 나는 더러워. 네 심장을 노렸고, 너를 죽이려고 했어.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음에 젖어들었다.
자기혐오의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덴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 흐름을 끊었다.
"첫 번째 명령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레제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명령.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기비하 금지."
덴지는 간결하게 말했다.
마치 길가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의 문구를 읽는 것처럼 무심한 어조였다.
"앞으로 네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거, 금지야. 어기면 벌이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엉뚱하고 단순해서, 레제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벌?
자기비하 금지?
그것이 명령이라고?
그녀가 겪어온 세상의 명령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무슨..."
"못 들었냐. 그게 첫 번째 명령이라고. 네가 나한테 명령을 내려달라고 했잖아."
덴지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나 비웃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명령."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그게 두 번째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그 말은 첫 번째 명령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막연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별빛과도 같았다.
아름답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득한 목표.
"...사람답게 사는 거..."
레제가 멍하니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는... 그런 거 배운 적 없어. 나는 사람을 죽이는 법, 폭 탄을 다루는 법, 남을 속이는 법밖에 몰라. 먹고, 자고,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무력감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
그녀에게 '사람다운 삶’이란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난 못해. 할 수 없어. 나는... 그냥 고장 난 도구일 뿐이야."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자기비하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덴지의 손바닥이 그녀의 뒤통수를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방금 첫 번째 명령 어겼다. 벌 받아야겠네."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벌인데."
"벌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네가 한 말은 틀렸어."
덴지는 그녀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서 조금 떼어놓았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은 똑바로 그녀를 향해 있었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그가 말했다.
"나도 너랑 별반 다르지 않았어."
그의 말에 레제의 눈이 의아함으로 흔들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비록 가난하고 무식해 보일지언정 자유로워 보였다.
적어도 그녀처럼 누군가에게 종속된 존재는 아니었다.
덴지는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앉으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레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덴지는 천장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는 빚이 존나 많았어.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이었지. 야쿠자 놈들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돈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어. 갚을 돈은 당연히 없었고."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했어. 나무를 베기도 하고, 악마를 잡기도 하고. 그래도 빚은 줄어들 생각을 안 하더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지. 매일 밤 빚쟁이들이 들이닥칠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는 거라고는 식빵 한 조각이 전부였어. 그것도 그냥 먹으면 맛없으니까, 잼이라도 발라 먹는 게 소원이었지."
잼.
그 소박한 단어가 레제의 귓가에 박혔다.
그녀는 잼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돈이 너무 없어서, 내 몸을 팔기도 했어."
덴지의 말에 레제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오른쪽 눈알도 팔고, 콩팥도 하나 팔고... 불알도 하나 팔았지. 돈만 준다면 뭐든지 다 팔았어. 어차피 내 몸뚱어리, 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빚 갚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지."
그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레제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 그냥 시키는 대로 했지. 야쿠자들이 악마를 잡아오라면 잡아갔고, 돈을 벌어오라면 벌어갔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그런 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그냥... 살아남는 게 전부였으니까. 너처럼, 나도 그냥 도구였던 거야. 야쿠자들의 돈 버는 기계."
그의 과거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 형태는 달랐지만, 그 본질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 없이, 타인에 의해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는 삶.
"그때 내 유일한 친구는 포치타뿐이었어. 체인소 악마였지. 우리는 낡아빠진 판잣집에서 서로 기대면서 살았어. 매일 밤마다 내가 걔를 껴안고 잤지. 걔가 없었으면 난 진작에 죽었을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야쿠자 놈들이 나를 속였어. 좀비 악마한테 나를 제물로 팔아넘긴 거야. 나는... 거기서 한 번 죽었지. 온몸이 칼에 찔리고 토막 나서 쓰레기통에 버려졌어."
레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때 포치타가 자기 심장을 나한테 줬어. 그래서 내가 다시 살아난 거야.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그놈들, 내가 다 죽여 버렸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서린 분노와 슬픔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뒤로 공안에 들어가서 데블헌터가 됐어. 거기서 처음으로 따뜻한 이불에서 자보고, 매일 세 끼 밥을 먹어봤지. 목욕도 매일 하고. 그게... 나한테는 '사람답게 사는 것'의 전부였어. 그전까지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레제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나도 잘 몰라. 사람답게 사는 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참이거든. 너나 나나, 시작은 똑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건 마찬가지라고."
그의 말은 서툴렀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어떤 위대한 교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유창한 위로의 말보다도 더 깊게 레제의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여주며,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고, 같은 곳에서 출발하는 동료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하나의 거울이 되어 그녀 앞에 놓였다.
그 거울 속에는 상처 입고 이용당했던 과거의 덴지가 비쳤고, 그 옆에는 놀랍도록 닮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타인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살아온 삶.
그 공통된 상흔의 발견은 그녀의 견고했던 자기 연민과 고립감의 성벽을 밑동부터 뒤흔들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 두 사람이 공유하는, 조심스럽고도 엄숙한 무게를 지닌 침묵이었다.
레제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덴지의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낡은 마룻바닥의 나뭇결을 무의미하게 눈으로 좇고 있었다.
덴지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랐다.
방금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꺼내 보인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뒷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이 무거운 공기를 환기시킬 말이 필요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문득 밤의 학교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뭐냐..."
덴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고, 어딘가 멋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레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는 희미한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그... 쥐새끼 이야기."
쥐새끼.
그 단어에 레제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시골쥐와 도시쥐 이야기.
그것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계산된 연기였다.
그 거짓된 순간을 그가 지금 꺼내 든 의도를 알 수 없어 그녀는 다시금 경계심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때 너는 시골쥐를 골랐지. 평화로운 게 최고라고. 나는 도시쥐를 골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그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덴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 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봤거든. 곰곰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거야. 시골쥐든 도시쥐든, 뭔가 둘 다 마음에 안 들었어. 왜 그런가 했더니..."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둘 다 정답이 아니었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려먹었는데, 거기서 맞는 답이 나올 리가 없었던 거지."
그의 단언에 레제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틀린 질문?"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것처럼 거칠고 희미했다.
"그래, 틀려먹은 질문!"
덴지는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몸을 그녀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생각해 봐. 왜 우리가 쥐새끼여야 하는데? 왜 하필 쥐새끼냐고! 찍찍거리고, 더러운 하수구나 파먹고 살고, 고양이한테 쫓기거나 쥐덫에나 걸려 뒤지는 그런 하찮은 쥐새끼 말이야!"
그의 말은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논리가 있었다.
"그리고 왜 시골하고 도시,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데? 시골에서 살면 맛있는 걸 못 먹고, 도시에서 살면 위험하게 살아야 하고. 그게 말이 돼? 왜 우리는 그런 엿 같은 선택지 안에서만 살아야 하냐고!"
그는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단지 우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구로서의 삶과 버려진 삶 사이에서 고통받아온 그들 자신에 대한 외침이었다.
"우리는 쥐가 아니야."
덴지는 레제의 눈을 똑바로 보며 힘주어 말했다.
"너도, 나도 쥐새끼 따위가 아니라고."
그의 단호한 선언에 레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평생을 자신이 실험실의 쥐와 같다고 생각해왔다.
정해진 미로 속에서, 조련사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그런데 그는 지금, 그 미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야."
새.
그 단어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새는 말이야,"
덴지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튼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마치 드넓은 하늘을 보는 듯했다.
"시골하고 도시를 지 맘대로 오갈 수 있어. 시골 숲에서 자다가, 배고프면 도시에 날아와서 빵 부스러기 같은 걸 주워 먹을 수도 있지. 도시가 지겨워지면, 언제든지 다시 조용한 숲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그의 설명은 지극히 단순했지만, 그 속에는 레제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자유의 개념이 담겨 있었다.
"새는 쥐새끼처럼 땅바닥에 붙어서 살지 않아. 하늘을 날아다니지. 쥐덫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어. 고양이가 달려들면 그냥 날아오르면 그만이니까. 물론, 더 큰 새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고 총에 맞을 수도 있겠지. 위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레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쥐새끼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안 그래? 우리는 그렇게 답답하고 구질구질한 쥐 따위가 아니야. 우리는... 자유로운 새라고."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평생 그렇게 새장 안에서 살 건지."
그는 곰팡내 나는 이 비좁은 공간, 그녀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감옥을 둘러보았다.
"아니면 그깟 새장 같은 거 다 때려 부수고, 나랑 같이 자유롭게 날아다닐 건지. 네가 정해."
자유.
그 단어는 너무나도 달콤했지만, 동시에 맹독을 품은 금단의 과실과도 같았다.
자유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끝없는 막막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 만에, 그녀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힘겹게 단어들을 엮어냈다.
"나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나는... 날 수 없어."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나는... 이미 한쪽 날개가 부러졌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체념과도 같은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러져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날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 그저 새장에 갇혀 주인을 위해 노래나 부르다 죽도록 만들어진 카나리아 같은 거니까. 날갯짓은 하겠지. 하지만 이 좁은 새장 안에서 퍼덕거리기만 할 뿐이야. 결코 저 하늘로는 날아오르지 못해. 날아오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할 뿐이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을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녀의 절망적인 고백에, 덴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레제는 그가 실망했으리라, 혹은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모든 예상을 산산조각 냈다.
"어."
그는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럼 마침 잘됐네!"
그의 뜬금없는 말에 레제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날개가 부러졌다는 고백에 잘됐다니.
덴지는 그런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한쪽 날개가 없거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와 같은 종류의 깊은 상실감이 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하나 나 하나. 합치면 딱 날개 한 쌍이잖아. 완벽하지 않냐?"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수학 공식을 설명하듯 말했다.
"네가 오른쪽 날개 해. 그럼 내가 왼쪽 날개 할게. 둘이 같이 날갯짓하면, 그러면 날 수 있잖아. 혼자서는 못 날아도, 둘이라면 날 수 있다고. 안 그래?"
그의 말.
그 단순하고, 유치하고, 비논리적이기 짝이 없는 그 말이 레제의 심장에 거대한 망치처럼 내리꽂혔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마지막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십 년간 그녀를 지탱하고 보호해왔던 자기혐오와 체념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성벽이 한순간에 먼지처럼 허물어졌다.
그 벽이 사라진 자리에는 텅 빈 공허함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화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아..."
그녀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시야가 뜨거운 액체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무너지듯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덴지는 당황하지 않고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받아 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마침내 억눌려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 아아... 아아아...!"
그것은 소리 없는 눈물이 아니었다.
조용한 흐느낌도 아니었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듯,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절규하듯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다.
목이 찢어져라 내지르는 울음소리에는 그녀가 살아온 모든 시간의 고통과 슬픔, 외로움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목 놓아 울었다.
체면도 자존심도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껏 소리 내어 울었다.
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가만히 안아줄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격렬한 울음으로 들썩일 때마다, 그는 서툰 손길로 그녀의 등과 머리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마치 폭풍우 속에서 작은 새를 감싸 안은 거대한 나무처럼, 그는 묵묵히 그녀의 모든 슬픔을 받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녀의 격렬했던 통곡은 점차 잦아들어 지친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방 안에는 그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그의 심장 소리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울음이 그치자, 텅 비어버린 마음속에 아주 작은 생각 하나가 촛불처럼 피어올랐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 서투르고, 단순하고, 어딘가 바보 같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이 사람과 함께라면.
정말로...
날아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신이 아니었다.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칠흑 같던 절망의 어둠 속에,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줄기 하나가 스며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어깨에서 마지막 떨림이 멎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는 바로 눈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마른 입술이 아주 힘겹게 열렸다.
"...고마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세상에 존재하던 언어로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미안해... 이 말밖에... 할 줄 몰라서."
그녀가 배운 언어는 상대를 기만하고, 복종하고, 파괴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그녀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진심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사과에 덴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럽게 온기가 사라지자 레제는 저도 모르게 불안한 기색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어딘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다니 뭐가."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심하고 퉁명스러웠다.
"배 안 고프냐? 나는 배고픈데."
그의 말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생뚱맞아서, 레제는 순간 멍해졌다.
"사람은 울면 에너지를 많이 쓴다고. 그러니까 다시 채워 넣어야지. 안 그러면 쓰러져."
그는 그녀가 평생을 부정당해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덴지는 더 이상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편의 점 봉투를 뒤적였다.
그는 초콜릿이 박힌 과자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툭 던져주었다.
레제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먹어. 단 거 먹으면 기분 좀 나아진대."
그는 자신도 다른 과자 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레제는 손에 들린 과자 봉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말한 '사람답게 사는 것’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그저 슬프면 울고 배고프면 먹는 것.
그녀는 조심스럽게 과자 봉지를 뜯었다.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과자 한 조각을 깨물자, 바삭한 식감과 함께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이 절망의 무게를 아주 약간은 가볍게 해주는 듯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과자를 먹었다.
어색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편안함이 그 어색함 속에 섞여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덴지가 먼저 과자 봉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이제."
그가 말했다.
"밤도 깊었고, 내일 뭘 할지는 내일 일어나서 생각하자고. 일단은 자야 돼. 사람은 잠을 자야 머리가 돌아가니까."
그는 방 한구석에 있던 낡고 얇은 이불과 베개를 끌어와, 레제가 잠자리로 쓰던 낡은 매트리스 위에 펼쳐주었다.
"네가 여기서 자."
그의 말에 레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자. 여긴..."
"됐고, 그냥 자라면 자."
덴지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벌러덩 드러누우며 팔로 머리를 받쳤다.
삐걱, 하고 낡은 마룻바닥이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무 데서나 잘 자. 바닥 딱딱한 게 오히려 잠이 더 잘 와. 옛날 생각나고."
그의 말은 배려였지만, 배려처럼 들리지 않으려는 투박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았는지, 바닥에 누워 있던 덴지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 진짜 말 안 듣네. 이것도 명령이다. 세 번째 명령. 당장 그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잠이나 자."
명령.
그 단어는 여전히 그녀에게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그가 마련해준 잠자리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낡은 매트리스는 푹 꺼져 있었고 이불에서는 희미한 먼지 냄새가 났지만, 이상하게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바닥에 누워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 안은 다시 어둠과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전의 그 숨 막히는 어둠과는 달랐다.
그녀의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고른 숨소리는 불안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자장가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평온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끝에서,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아주 작은 구원의 조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깊고 평화로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닥에 누운 덴지는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든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눈을 감았다.
낡고 비좁은 방 안에서, 부서진 날개를 가진 두 마리의 새는 그렇게 서로의 존재에 기댄 채 위태롭지만 고요한 하룻밤의 휴식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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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야스도 합니다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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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ㄱㅅ
캬 제3의 선택지 ㅋㅋㅋ
캬아 ㅅㅂ 눈물나냐 - dc App
제 3의 선택지를 이렇게 맛나게 표현하다니 넌 100점이다
덴지는 그런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한쪽 날개가 없거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와 같은 종류의 깊은 상실감이 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하나 나 하나. 합치면 딱 날개 한 쌍이잖아. 완벽하지 않냐?" 다시 읽어도 킥인 부분ㄹㅇ
왜 제목이 비익조인가 했는데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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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글올라올때마다개추를참지못하고다음내용을기다려요구독형플렛폼에글을쓴다면기꺼이구독하고존경심을표할게요글계속써주셈 - dc App
진짜 글 너무잘써요 평생 글만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ㅠㅠ 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집중력이 딸려 책 읽기 귀찮은 사람인데 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이제 읽는 것에 대해 조금 편안해졌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