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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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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지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소년.

많은 아픔과 상실을 겪고, 한층 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레제와 재회한 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서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따뜻한 진심으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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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


폭 탄 악마의 심장을 가진 소녀.

조국에 버림받고 무기로서 살아온 과거의 악몽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덴지와의 재회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일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며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능숙한 선생이자, 때로는 그의 품에서 위로받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

어둠이 빛에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소리 없는 침식과도 같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엄한 교대의 순간을 잠결에 흘려보내곤 했다.

그러나 레제에게 있어 그날의 아침은 달랐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극장의 육중한 막이 아주 천천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걷히는 것을 맨 앞줄에 앉아 지켜보는 듯했다.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외부의 소음이나 빛의 자극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종류의 충만함이 그녀를 잠에서 부드럽게 건져 올렸다.

어젯밤까지 머물렀던 낡은 방에서의 잠은 언제나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 추는 위태로운 춤과도 같았다.

희미한 소리 하나에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고, 잠든 와중에도 의식의 일부는 언제나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기 위해 깨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잠은 달랐다.

깊고, 어둡고, 따뜻한 우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듯한 평온.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내던지는 법을 배운 듯했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 낯선 개운함을 잠시 더 음미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부터가 달랐다.

그녀의 방을 채우고 있던 눅눅한 곰팡내와 먼지 냄새 대신, 희미한 햇볕 냄새와 사람 사는 냄새, 그리고 어젯밤 두 사람이 나누어 먹었던 도시락의 미미한 잔향이 뒤섞여 있었다.

비록 초라했지만, 제대로 된 침구 위에서 몸을 뉘는 감각은 달콤했고, 좁긴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아침을 맞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만했다.

그녀의 몸을 짓누르던 만성적인 긴장의 갑옷이 밤사이에 녹아내린 듯, 사지가 놀랍도록 가볍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방의 천장이었다.

군데군데 얼룩이 진, 오래된 나무 천장.

그리고 그 천장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아침 햇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온 빛은 방 안의 공기를 가르며 맞은편 벽에 선명한 사각형의 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덴지는 그녀의 바로 옆, 한 뼘 남짓한 거리를 두고 누워 있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젯밤 잠자리를 정할 때의 작은 실랑이가 무색하게, 그는 어느새 자신의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그녀의 이불 영역을 조금 침범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추위를 피하려는 짐승처럼.

그의 잠든 얼굴은 모든 경계심을 풀어놓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은 마치 폭 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레제는 숨을 죽인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얼굴이, 그녀에게 ‘새’가 되자고 말했던 그 얼굴이었다.

이 얼굴이, 그녀의 모든 절망과 자기혐오를 묵묵히 받아주었던 그 얼굴이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무방비해서, 그 안에 체인소라는 흉포한 악마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부서지기 직전의 위태로웠던 모습이 아닌, 처음 덴지와 만났었던 그 시절의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공포와 경계심으로 흐려져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맑고 깊은 호수와도 같은 평온함과 함께, 아주 작은 호기심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옆에 누워, 잠든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속눈썹은 생각보다 길었다.

굳게 닫힌 입술은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자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그의 손길이 떠올랐다.

투박하고 서툴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온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잠시 망설였다.

마치 물의 표면을 건드리기 직전의 잠자리처럼.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 끝이 그의 따뜻한 뺨에 닿는 순간, 덴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잠결에 무언가 성가신 것이 닿았다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뺨에서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

그녀는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뺨의 윤곽을 따라 아주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턱선을 지나, 입술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덴지가 갑자기 “음냐...” 하는 잠꼬대를 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마치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양, 혀로 낼름 핥았다.

“!”

레제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손가락 끝에 남은 축축하고 뜨거운 감촉에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리는 듯했다.

심장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반응에 스스로가 더 놀랐다.

이런 종류의 당혹감은 그녀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돌아누워, 벽을 보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고른 숨소리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귓가를 때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뜨거워진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을 뿐인데.

그의 잠든 얼굴이 궁금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마치 통제를 벗어난 또 다른 생명체처럼 가슴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을까.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덴지가 잠에서 깨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짐승 같은 하품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듯했다.

“으아아... 잘 잤다...”

그의 잠에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제는 여전히 돌아눕지 못한 채,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방금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라...?”

덴지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레제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왠지... 입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는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꿈에서 딸기 케이크라도 먹었나...”

그의 멍청한 혼잣말에, 레제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좋은 아침.”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행히도 평소처럼 차분했다.

“오, 일어났냐.”

덴지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은 아직 잠의 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반쯤 감겨 있었다.

“좋은 아침이고 나발이고, 배고파 뒤지겠다. 뭐 먹을 거 없나.”

그는 일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음식을 찾았다.

그의 시선은 방 안을 훑으며 먹을 만한 것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 지극히 그다운 모습에, 레제는 아까의 당혹스러움을 완전히 잊고 다시금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에 빵 있네.”

그녀가 부엌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덴지의 눈이 그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아아... 식빵 쪼가리... 그런 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지. 아침이라면 역시, 밥이지! 흰쌀밥! 뜨끈한 미소시루에, 계란 프라이는 반숙으로! 그리고 비엔나소시지를 문어 모양으로 구워서...”

그는 또다시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이 꿈꾸는 아침 식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레제는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그의 미식 강의를 들었다.

“그렇게 매일 먹으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그녀가 현실적인 지적을 하자, 덴지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행복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걷혔다.

그는 어제 벌어온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떠올렸는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듯한 시늉을 했다.

“...젠장. 매일 그렇게 먹다가는 사흘도 못 버티겠군.”

그는 진심으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정했다!”

그가 선언했다.

“우리 집의 규칙 제1조다! 아침 식사는, 그 전날의 수입에 따라 퀄리티가 결정된다! 악마를 많이 잡은 날의 다음 날은 진수성찬! 수입이 없었던 날의 다음 날은 식빵 쪼가리!”

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규칙을 제정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때? 완벽하지?”

그가 동의를 구하듯 그녀를 보았다.

레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동기부여도 되고.”

“그렇지? 그리고 규칙 제2조!”

그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설거지는, 그날 밥을 안 한 사람이 한다! 공평하지?”

“공평하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규칙 제3조!”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내 만화책에 손대지 말 것! 특히 ‘파이어 펀치’ 최신간은 아직 나도 못 봤으니까, 절대 먼저 보면 안 된다! 알았냐?”

그는 지극히 사소하고 유치한 문제를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 내세웠다.

레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런 시시껄렁한 규칙들이 오가는 대화.

어쩌면 그녀가 동경해왔던 ‘평범한 일상’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네 만화책은 건드리지도 않을게.”

그녀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순순한 대답에 덴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의 아침은... 어제 수입이 꽤 짭짤했으니, ‘중상급’으로 정한다! 미소시루는 무리지만,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는 가능하다! 쌀은... 있었나?”

그는 부엌으로 달려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는 쌀이 반쯤 담긴 봉지를 들고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레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부엌으로 다가가, 쌀 봉지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옆에 섰다.

“내가 밥할게.”

그녀가 말했다.

“너는... 소시지나 구워. 문어 모양으로.”

그녀의 말에 덴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밥할 줄 아냐?”

“몰라.”

레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배우면 되겠지. 어려운 것도 아닐 것 같은데.”

그녀는 쌀 봉지를 받아 들고, 씽크대 앞에 섰다.

그녀의 눈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의지와 희미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도구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기 위한 첫 번째 걸음.

밥 짓기라는 아주 작고 소박한 행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덴지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칼과 소시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좁은 부엌 안에서, 두 사람은 서툰 몸짓으로 그들의 첫 번째 아침 식사를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좁은 부엌은 두 사람이 서 있기에는 명백히 비좁았으나, 그 협소함이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밀착은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한 온기처럼 느껴졌다.

레제는 씽크대 앞에 서서 쌀이 담긴 냄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해독 불가능한 고대의 암호를 마주한 고고학자와도 같은 진지함과 막막함이 서려 있었다.

밥을 짓는다.

그녀의 세계에서 식량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지급되거나, 혹은 생존을 위해 약탈하는 대상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개념 자체가 그녀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씻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등 뒤에서 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칼과 비엔나소시지가 담긴 봉투를 들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씻어?”

레제는 되물었다.

그녀는 냄비 안의 하얗고 작은 쌀알들을 내려다보았다.

깨끗해 보였다.

이것을 왜 씻어야 하는지, 그녀는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덴지는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시지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이리 줘 봐.”

그는 레제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수도꼭지를 틀었다.

좁은 공간 탓에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그 순간 레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냄비 안으로 차가운 물을 쏟아부었다.

투명한 물이 쌀 위로 차오르자, 희뿌연 쌀뜨물이 피어올랐다.

“봐. 이렇게 더럽잖아. 이걸 몇 번 헹궈내야 돼. 쌀알이 부서지 지 않게, 살살. 고양이 세수시키듯이.”

그는 직접 시범을 보였다.

그의 크고 투박한 손이 냄비 안으로 들어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쌀을 휘젓기 시작했다.

레제는 말없이 그의 손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희뿌연 물과 함께 쌀알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어쩐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 이제 네가 해 봐.”

그는 손을 빼고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레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흉내를 내어 냄비 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물의 감촉과 손가락 끝에 닿는 작고 단단한 쌀알들의 느낌이 생경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마치 아주 작고 연약한 생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쌀알 하나라도 부술세라, 그녀의 온 신경이 손끝에 집중되었다.

폭 탄의 신관을 해체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었다.

그녀가 쌀과 씨름하는 동안, 덴지는 옆에서 소시지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마 위에 비엔나소시지들을 나란히 올려놓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칼을 집어 들었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완벽한 문어 모양의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것.

그는 신중하게 소시지의 아래쪽에 칼집을 넣기 시작했다.

다리는 여덟 개여야만 했다.

그의 미간에는 장인의 그것과도 같은 깊은 고뇌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좁은 부엌 안에서는 두 사람의 서툰 작업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조용히 겹쳐졌다.

레제가 쌀을 씻는 물소리, 덴지가 칼로 소시지를 써는 소리.

그 소리들은 함께 어우러지자 어딘가 평화롭고 정겨운 생활의 소음이 되어 공간을 채웠다.

쌀 씻기를 마친 레제는 다음 과제에 봉착했다.

물의 양.

덴지는 ‘손등에 물이 반쯤 올라올 정도’라는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감각적인 조언을 남기고는 다시 자신만의 문어 만들기에 몰두해 버렸다.

레제는 자신의 손등과 냄비 속의 쌀을 번갈아 쳐다보며 몇 번이고 물을 넣었다가 따라내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토록 어려운 수학 문제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레제는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중대한 임무 하나를 완수한 듯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덴지는 이미 소시지 손질을 마치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옆 도마 위에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것도, 일곱 개 달린 것도, 심지어는 정체불명의 다족류 생물처럼 보이는 것들도 뒤섞인 채 장렬하게 전사한 소시지 부대가 널려 있었다.

기름이 달궈진 프라이팬 위로 소시지들이 올라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냄새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원초적인 유혹이어서, 레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곧이어 덴지는 옆에서 계란을 깨 프라이팬에 부었다.

흰자가 익어가며 만들어내는 투명한 막과 그 위에서 탱글탱글하게 익어가는 노른자.

그 모든 과정이 그녀에게는 하나의 경이로운 마술처럼 보였다.

밥솥이 조용히 증기를 내뿜으며 작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낮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방금 조리를 마친 문어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소시지 구이와 완벽한 반숙 계란 프라이 두 개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놓여 있었다.

“크으... 예술이지 않냐?”

덴지는 자신의 작품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특히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채 완벽하게 벌어진 소시지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보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 완벽한 곡선과 황금빛 색깔을 보라고. 이건 그냥 소시지가 아니야. 예술이라고, 예술.”

그의 자화자찬에 레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칼집을 낸 소시지로 보였지만, 그의 순수한 기쁨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응. 대단하네.”

그녀의 영혼 없는 칭찬에도 덴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규칙 제4조를 추가해야겠어.”

“또?”

“그래. 아주 중요한 규칙이야. ‘서로가 만든 음식에 대해 절대 비난하지 말 것’. 설령 그것이 인간이 먹을 수 없는 형태와 맛을 지니고 있더라도, 만든 사람의 노력을 존중하여 무조건 맛있게 먹어야 한다. 알겠냐?”

그는 지극히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제정하고는 그녀의 동의를 구했다.

레제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밥이 어떤 결과물로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규칙은 자신에게도 꽤나 유용해 보였다.

“좋아. 동의할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덴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밥솥의 취사 완료 알림음이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밥솥으로 향했다.

순간, 방 안의 공기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심판의 시간이었다.

“자, 어디 한번 볼까. 너의 첫 작품을.”

덴지는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레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밥솥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이 훅 하고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김이 걷히고, 마침내 밥솥 안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밥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형태의 것이었다.

윗부분은 질척하게 죽이 되어 있었고, 중간 부분은 그나마 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바닥 부분은 누룽지를 넘어 거의 숯에 가까운 상태로 변해 있었다.

물 조절에 완벽하게 실패한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름하야 전설의 ‘삼층밥’이었다.

명백한 실패작이었다.

레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참한 결과물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부끄러움과 실망감이 한꺼번에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뒤에서 지켜보던 덴지의 입에서도 당혹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한번 하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이거... 아주 입체적인 밥이 완성됐네. 골라 먹는 재미가 있겠어. 죽을 좋아하는 사람은 위쪽을, 된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중간을, 그리고 눌어터진 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닥을 먹으면 되니까. 아주 효율적인데?”

그의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레제의 마음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걱을 든 손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덴지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레제의 손에서 주걱을 빼앗아 들고는, 밥솥의 중간 부분에서 최대한 멀쩡해 보이는 밥을 퍼서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면 훌륭하지. 처음인데. 내가 처음 밥했을 때는 밥솥 태워 먹을 뻔했다고.”

그는 밥이 담긴 그릇 두 개를 들고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자, 먹자! 식기 전에! 최고의 반찬은 시장기라고!”

그는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며 젓가락을 들었다.

레제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지만, 차마 밥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덴지는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밥을 크게 한 숟가락 퍼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레제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씹히는 밥알의 절반은 돌멩이처럼 서걱거렸을 터였다.

덴지는 한참을 밥을 씹었다.

그리고는 꿀꺽, 하고 아주 힘겹게 그것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제는 그의 입에서 나올 평가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맛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꾸밈이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진솔함이 실려 있었다.

레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

“아니, 진짜야.”

덴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소시지 하나를 집어 함께 씹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는데.”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레제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미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규칙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덴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밥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물론, 밥알이 좀... 춤을 추긴 하네. 어떤 놈은 탱고를 추고 어떤 놈은 왈츠를 추고. 아주 정열적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근데 이상하게 맛있어.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냥... 이런 밥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아.”

누군가와 함께 장을 보고, 함께 부엌에 서서, 함께 만든 식사를 마주 앉아 나누어 먹는 아침.

그에게는 식빵에 잼을 발라 먹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꿈이었던 풍경.

그 풍경 속에서 먹는 밥이었다.

그는 다시 레제를 바라보았다.

“네가 처음으로 한 밥이잖아. 그걸 내가 처음으로 먹는 거고. 그러니까 맛있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그의 말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그 어떤 논리보다도 더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제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아주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짓누르던 부끄러움과 실망감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밥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것은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이 부끄럽게 느껴지 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밥을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서걱.

역시나 딱딱한 쌀알이 씹혔다.

맛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밥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계란 프라이를 조금 떼어 함께 먹었다.

고소한 기름 맛과 짭짤한 소금 맛이 설익은 밥의 맛을 조금이나마 덮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덴지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맛있다는 표정으로 밥과 반찬을 번갈아 가며 입안으로 쓸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어쩌면.

어쩌면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아침 식사를 계속했다.

서툴고,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식사였지만 그 어떤 식사보다도 따뜻하고 충만한 아침이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 낮은 탁자 위에는 전쟁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밥알 한 톨 남지 않은 깨끗한 그릇 두 개와 소시지의 문어 다리 파편 몇 개가 널브러진 접시.

방금 전까지 이곳에 존재했던 소박하지만 치열했던 만찬의 유일한 증거였다.

식사를 마친 뒤의 나른함은 마치 중력을 몇 배는 더 무겁게 만드는 끈적한 늪과도 같아서, 덴지는 그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순응하며 등을 바닥에 대고 큰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불룩하게 솟아오른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만족스럽게 두드렸다.

레제는 그런 그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직 자신의 그릇을 내려놓지 못한 채였다.

그녀 역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설익어 서걱거리는 밥알과 어설프게 구워진 소시지, 그리고 평범한 계란 프라이.

그녀의 혀가 기억하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이 없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영혼이 기억하는 그 어떤 식사보다도 충만했다.

그녀는 젓가락을 든 채, 바닥에 퍼져버린 덴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고뇌를 잊은 채 오직 자신의 배를 두드리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무방비하고 단순한 모습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아주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던 덴지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는 천장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아직도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레제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해? 아직도 배고프냐?”

그의 질문에 레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빈 그릇들을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았다.

“이제... 뭐 해?”

그녀가 물었다.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식사가 끝난 뒤의 ‘자유 시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다음 훈련이, 다음 임무가, 다음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질문에 덴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하냐니? 할 게 뭐가 있어?”

“......”

“밥 먹었으면 당연히 늘 하는 게 있잖아.”

그의 말에 레제의 눈에 희미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늘 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식후에 행하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덴지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한껏 즐기기라도 하듯, 씨익 하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빈둥대는 거지.”

빈둥대는 것.

그 단어가 가진 허무하고 생산성 없는 뉘앙스에 레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게... 늘 하는 거야?”

“그럼. 밥 먹고 배부른데 뭘 더 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 순간을 만끽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배가 꺼질 때까지.”

그는 다시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자신의 철학을 역설했다.

너무나도 그다운 대답이었다.

그 단순함과 본능에 충실한 태도에, 레제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쩐지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몸은 언제나 다음 행동을 위해 긴장하고 대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낯선 개념일 뿐만 아니라, 어딘가 불안하고 죄책감이 드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한번 해 볼 가치는 있을지도 모른다.

레제는 결심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덴지가 누워 있는 방향과 똑같이,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딱딱한 마룻바닥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녀는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옆에 눕자, 덴지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그녀의 모습을 뜯어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그가 불렀다.

“너, 왜 그렇게 힘주고 있냐?”

“힘 안 줬는데.”

레제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뻥치시네. 무슨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가지고는. 그렇게 누워 있으면 허리 아파. 힘 빼. 릴렉스, 릴렉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레제는 스스로는 힘을 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등과 바닥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일 정도로 꼿꼿했다.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배 위에 모은 두 손은 서로를 꽉 맞잡고 있었다.

휴식의 자세가 아니라,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 자세에 가까웠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어깨와 팔의 힘을 빼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들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수축하며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다.

“.....잘 안 돼.”

그녀가 마침내 힘없이 인정했다.

“이렇게... 평온한 건 익숙하지가 않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해져.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몸에 각인된 생존 본능이었다.

평온은 위험의 전조였고, 휴식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치였다.

그녀의 고백에, 덴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천장을 보며 누운 채,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레제는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비웃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다시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럼, 머릿속을 비워.”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장난기 섞인 톤이 아니라, 의외로 진지했다.

“네 머릿속에 지금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다 끄집어내서 저기 쓰레기통에 던져버려.”

그는 턱짓으로 방구석에 놓인 작은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옛날에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 그거 전부 다. 하나도 남김없이 싹 다 저기다 처넣어 버리라고.”

그의 해결책은 언제나처럼 지극히 단순하고 폭력적이었다.

과거를 마주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복잡한 과정 따위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그에게 과거란 그저 버려야 할 쓰레기에 불과했다.

“머릿속을 그냥 텅 비게 만드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처럼. 그럼 불안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어. 그냥... 있는 거지. 지금 여기에.”

그의 말은 어떤 심리학 서적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조언이었지만,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생각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러니 생각을 멈추면 된다.

그 단순한 논리가 레제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작은 돌멩이처럼 던져졌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씩 붙잡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상상을 했다.

교관의 날카로운 목소리,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훈련실의 풍경, 그녀를 ‘봄바’라고 부르던 차가운 목소리들, 그리고 덴지의 심장을 노렸던 자신의 모습까지.

그 모든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하나씩.

쉽지는 않았다.

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다른 기억이 뱀처럼 고개를 쳐들었고, 과거의 감정들이 끈질기게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고른 숨소리가 그녀에게 이상한 용기를 주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과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포만감과 나른함만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과거와 씨름하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정말로 머릿속이 아주 잠시나마 텅 비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모든 소음이 멎고, 오직 고요한 정적만이 남은 상태.

그 순간,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느슨해지듯, 어깨와 등, 팔과 다리의 근육들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마침내 바닥의 중력에 순응하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몸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무기도 아니고, 도구도 아닌, 그저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몸.

그 몸이 지금 이 순간, 이 공간 안에서 평화롭게 숨 쉬고 있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덴지가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눕는 소리였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이제 좀 사람 꼴 같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만족감이 묻어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도시의 소음만이 흐를 뿐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충만한 침묵이었다.

“있잖아.”

얼마나 지났을까.

덴지가 먼저 침묵을 깼다.

“너, 하고 싶은 거 있어?”

그의 질문은 뜬금없었다.

레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팔베개를 한 채, 옆으로 누워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하고 싶은 거라니?”

“말 그대로. 먹고 자고 싸우는 거 말고. 그냥... 네가 해보고 싶은 거. 그런 거 없냐고.”

그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해야만 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지, ‘하고 싶은 것’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자, 덴지는 마치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듯 말을 이었다.

“나는 존나 많은데. 일단 여자애랑 데이트를 해보고 싶고... 영화관 가서 팝콘 먹으면서 영화도 보고 싶고, 바다에도 가보고 싶어. 아, 그리고 게임기도 사서 밤새도록 게임만 해보고 싶다. 고양이도 키우고 싶고.”

그가 나열하는 소원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평범했다.

열여섯 살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일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쟁취해야만 하는 머나먼 꿈이었다.

“너는?”

그가 다시 물었다.

레제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그가 말한 소박한 꿈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아주 작은 소망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꽃.”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꽃?”

“응. 꽃을... 보고 싶어. 많이.”

그녀는 그가 처음 만났을 때, 마술처럼 건네주었던 하얀 꽃 한 송이를 떠올렸다.

그 꽃은 금방 시들어 버렸지만,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시들지 않고 남아 있었다.

“꽃이라면... 길가에도 피어 있잖아.”

덴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레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많이 피어 있는 곳.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색깔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그런 곳. 그런 곳에 가보고 싶어.”

그녀는 자신이 그런 풍경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아마도 훈련 중에 보았던 영화나 책 속의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덴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꽃밭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희미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흐음... 꽃밭이라.”

그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게 어디 있으려나.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돈과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그게 우리의 다음 목표다.”

“목표?”

“그래. 돈을 좀 더 모아서, 너를 그 끝내주는 꽃밭이라는 데에 데려가 주지. 내가.”

그는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레제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마음만으로도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덴지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말했다.

“그 꽃밭에 가기 전에, 다른 네가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어야 돼. 최소 열 개. 그리고 얼마나 걸리던 간에, 그걸 나랑 같이 하나씩 해 나가는 거야. 알았지? 이건 다섯 번째 명령이다.”

그는 또다시 제멋대로 규칙을 만들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더 이상 그녀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약속과도 같았다.

레제는 아주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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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해서 글 반갈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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