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cea8674b38b6efe3deb98a518d604030e4322b7316329912777




등장인물 

7cea8674b38b6efe3deb96fd47986a2d7e5e2cc9fb4ae4ed77dc930ab05f


덴지 



체인소의 심장을 가진 소년. 


많은 아픔과 상실을 겪고, 한층 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과거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레제와 재회한 후,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며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을 꿈꾼다. 


서툴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따뜻한 진심으로 서로의 구원자가 되어 깊은 유대를 쌓아간다. 

7cea8674b38b6efe3deb96fd44986a2d47ed56ca6c4d1d5c68371c331764


레제 



폭 탄 악마의 심장을 가진 소녀. 


조국에 버림받고 무기로서 살아온 과거의 악몽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었다. 


덴지와의 재회를 통해 처음으로 따뜻한 일상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며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때로는 그를 가르치는 능숙한 선생이자, 때로는 그의 품에서 위로받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


밤은 소리 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창밖의 세상은 잠든 도시의 희미한 소음과 멀리서 깜빡이는 네온사인의 불빛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방 안은 두 사람의 체온으로 덥혀진 공기와 땀, 그리고 서로의 체취가 뒤섞여 만들어낸 짙고 나른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방 안을 휘몰아쳤던 격정의 폭풍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평화롭고 충만한 고요만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레제는 그의 몸 위에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팍과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고, 그녀의 뺨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였다.


그녀의 가슴은 그의 가슴에 맞닿아, 두 개의 심장이 마치 하나의 심장처럼 같은 박동으로 울리는 소리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저 그의 몸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와 심장의 고동 소리,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의 몸을 연결하고 있는 미묘하고 생생한 감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덴지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자신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그녀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팔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사정의 여운으로 아직도 몸의 감각은 몽롱했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막연하게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가슴팍 위에서 무언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레제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검지 손가락을 펴 그의 가슴팍 위를 천천히 간질이기 시작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쇄골에서 시작해 명치를 지나 배꼽 근처까지 아주 느리고 부드러운 원을 그렸다.


그 무심한 듯한 손길 하나하나에 그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의미 없는 원을 그리다가,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결에 말하는 것처럼 나른하고 몽롱했다.


“있잖아.”


“……응.”


덴지가 힘겹게 대답했다.


“이 느낌… 되게 좋다.”


그녀가 속삭였다.


“네가… 내 안에 있는 느낌.”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노골적이어서, 덴지는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레제는 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에만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 빼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안쪽의 근육을 의식적으로 조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덴지의 몸이 움찔하며 떨렸다.


이미 모든 것을 쏟아내 힘이 빠져 있던 그의 것이 그녀의 자극에 다시 희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어. 이대로 잠들고, 이대로 아침을 맞이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충만감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의 여운이 아니었다.


평생을 느껴왔던 공허함과 상실감을 채워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그녀의 텅 비어 있던 내면이 그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가득 채워지는 느낌.


그녀는 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덴지는 한참 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말하는 ‘느낌’의 깊이를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섹스는 그저 기분 좋은 행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했다.


“……불편하지 않아?”


그가 한참 만에 겨우 꺼낸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다리 저릴 텐데.”


그의 그다운 대답에, 레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그녀의 몸 전체가 가늘게 떨렸고, 그 진동이 그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바보.”


그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걱정 하는 거 아니야, 이럴 땐.”


“그럼 무슨 걱정을 하는데.”


“아무 걱정도 안 해. 그냥… 좋은 걸 느끼는 거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가슴팍에 뺨을 부볐다.


“너는 안 좋아? 내가 이렇게 있는 거.”


“……좋아.”


덴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좋은데… 그래도…”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이 완벽한 순간이 곧 깨져버릴 것 같은, 이 행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그는 이 행복에 익숙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서로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서로의 감각을 더듬는 듯한 밀도 높은 침묵이었다.


그들은 몸을 섞는 것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레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아주 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덴지 군.”


“…어?”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아주 분명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그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가르고 덴지의 고막을, 그리고 심장을 직접적으로 강타했다.


‘좋아한다’는 말과는 그 무게부터가 달랐다.


‘좋아한다’는 말은 감정의 표현이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의 장점과 단점을, 그의 인간적인 부분과 악마적인 부분까지도 모두 끌어안겠다는 선언이었다.


덴지의 뇌가 다시 한번 멈췄다.


그는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는 눈만 껌뻑이며 그녀를 쳐다볼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고, 오직 ‘사랑해’라는 세 글자만이 거대한 종소리처럼 윙윙거리며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레제는 그의 그런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굳어버린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사랑해, 덴지 군.”


그녀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그의 넋 나간 영혼에 주문을 걸듯 사랑의 말을 계속해서 불어넣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


“글자도 제대로 못 읽는 바보 같은 너도 사랑하고.”


“수도비가 아까워서 잘 씻지도 않는 더러운 너도 사랑해.”


“옛날에 나한테 속아 넘어갔던 순진한 너도 사랑하고.”


“지금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여운 너도 사랑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체인소 맨인 너도 사랑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덴지인 너도 사랑해.”


그녀는 그가 가진 모든 결점과 상처와 불안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그 위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녀의 사랑은 조건 없는, 절대적인 긍정이었다.


그녀가 사랑을 속삭일 때마다 덴지의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그의 얼굴에 천천히 혈색이 돌아왔다.


그는 마침내 멈춰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만해.”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지만, 그 속에는 화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줍음과 쑥스러움이 가득했다.


“낯간지러우니까… 그만하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배신하듯, 그의 입가에는 아주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한번 피어난 웃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반응에 레제는 더욱 즐거워하며 그의 목덜미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싫은데?”


그녀는 짓궂게 속삭였다.


“계속할 건데. 네가 익숙해질 때까지. 매일매일, 아침에 눈뜰 때마다, 밤에 잠들기 전에, 밥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계속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의 집요한 애정 공세에 덴지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감출 수 없는 행복의 빛이 가득했다.


“……진짜 못 이기겠다, 너는.”


그가 중얼거렸다.


항복 선언이자,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의 가슴 위에서 의미 없는 원을 그리다가,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결에 말하는 것처럼 나른하고 몽롱했다.


“있잖아.”


“……응.”


덴지가 힘겹게 대답했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살갗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누군가랑… 이렇게 체온을 나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 줄 몰랐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주 옅은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체온이란 언제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거나, 혹은 이용해야 할 도구에 불과했다.


훈련 중에는 상대의 체온 변화를 읽어 약점을 파악해야 했고, 임무 중에는 자신의 체온을 숨기거나 혹은 위장하여 목표물을 속여야 했다.


체온을 나눈다는 행위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리던 원이 멈췄다.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 속에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희미한 아쉬움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어왔던 길을 아주 잠깐 뒤돌아보는 듯했다.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길.


그 길 위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누군가의 무기이거나, 도구로서만 살아왔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덴지의 심장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서늘한 슬픔만큼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과거가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무게로 다가왔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어휘가 부족했고, 그녀의 과거를 함부로 동정하기에는 그 역시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레제…”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잠겨 있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의 슬픈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거 알아?”


그녀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명랑한 톤을 되찾고 있었다.


“내 이름 말이야.”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턱을 괸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이름도, 사실은 무기를 뜻하는 소련어에서 왔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덴지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루지예(Оружие).”


그녀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그 단어를 말했다.


그녀의 혀끝에서 굴러가는 이국적인 발음은 낯설었지만, 어딘가 익숙하게 들렸다.


“발음, 비슷하지 않아? 레제… 아루지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장난감처럼 분해하고 조립하며, 그 유사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네 심장을 노리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기 직전에 새로 지어진 이름이야. 그전까지 나한테는 그런 평범한 이름 같은 건 없었거든. 그냥… 실험체 7번, 아니면 폭 탄… 뭐 그렇게 불렸지.”


그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목표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좋은, 평범하고 예쁜 여자아이 이름이라나 뭐라나. 발음하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아주 효율적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의미도 있었을 거야.”


그녀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결국 무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어떤 예쁜 이름으로 불리든, 어떤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든, 네 본질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라는 걸 절대로 잊지 말라는… 그런 의미.”


그녀의 이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선물이 아니라, 평생 짊어져야 할 족쇄이자 낙인이었다.


그 이름은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는 존재임을 매 순간 상기시키는 잔인한 주술과도 같았다.


덴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절망의 크기를 그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왔던 것이다.


“……미안하다.”


그가 한참 만에 겨우 꺼낸 말이었다.


“몰랐어…”


그의 사과에, 레제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왜 미안해해? 네가 지어준 이름도 아닌데.”


“그래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그녀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처럼.


“그러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를… 뭐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다른 이름이라도… 네가 원하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수도 있었다.


그녀의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아름다운 이름.


하지만 그의 제안에, 레제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레제라고 불러줘.”


그녀의 대답은 덴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녀는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그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하려는 것일까.


“왜…?”


그가 되물었다.


“그 이름은… 너한테 상처 아니야? 괴로운 기억만 떠오르게 하는 거 아니냐고.”


그의 질문에, 레제는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수만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맞아. 상처였어.”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인정했다.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 무기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했어. 내 손에 묻은 피 냄새를 기억해야 했고, 내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껴야 했지.”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지독한 고통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말을 잠시 끊고, 그의 뺨에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거친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그녀의 눈동자가 햇살을 머금은 호수처럼 따뜻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네가 ‘레제’라고 부를 때, 나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었어. 나는 그냥… 카페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자애였고, 너랑 같이 밤의 학교를 탐험하는 장난꾸러기였고, 너한테 수영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고, 너랑 같이 불꽃놀이를 보는 연인이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네 목소리에 담긴 ‘레제’라는 이름에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았어.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도 없었고. 대신… 아주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금은 어설프고… 가끔은 바보 같은 다정함이 담겨 있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 괜찮아. 더 이상 그 이름은 나한테 상처가 아니야.”


그녀는 그의 뺨을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네가 그렇게 나를 불러주니까.”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의 심장에 아주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녀는 그의 사랑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가 불러주는 이름 속에서, 그녀는 ‘무기’가 아닌 ‘레제’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었다.


이름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불러주는 사람의 목소리와 마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다정하고, 소중한 것을 부르듯이.


“레제.”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로 대답했다.


이제 그 이름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종류의 평화는 그녀가 살아온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그 평화를 음미했다.


마치 귀한 음식을 맛보듯,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러다 문득, 아주 사소하고 필연적인 질문 하나가 그녀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미래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미래란 그저 다음 임무의 시작과 끝, 혹은 생존과 죽음의 갈림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의 미래가 아닌 ‘우리’의 미래.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기댄 고개를 아주 살짝 들었다.


뺨이 그의 살갗에서 떨어지자 서늘한 공기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우리…”


그녀의 목소리는 잠긴 채 희미하게 갈라져 나왔다.


“이제 어떻게 될까?”


그것은 막연한 질문이었다.


그 속에는 한 톨의 기대와 한 줌의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덴지는 천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해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주 명료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존나 힘들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꾸밈이나 위로의 기색도 없었다.


그는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장을 노리는 새끼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거야. 포기 같은 건 절대 안 하겠지.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잘 아니까.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팔에 아주 희미하게 힘을 주었다.


“너를 처리하려는 놈들도 아마 있겠지. 배신자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소련인지 뭔지 하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공안이랑 크게 다르지 않을걸.”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레제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추위를 느꼈을 때와 비슷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그녀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그 희망이 부서졌을 때의 절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덴지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하얀 이가 희미하게 빛났다.


“근데.”


그가 말했다.


“뭐가 걱정이냐.”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가볍고 명랑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사람처럼.


“전에는 나 혼자였고, 너도 혼자였지. 그래서 힘들었던 거야. 일대일이니까. 어느 한쪽이 지치면 그걸로 끝이었잖아.”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이제 우린 둘이잖아.”


그 말은 아주 단순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이 레제의 심장에 아주 무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쿵, 하고 무언가 내려앉는 듯한 둔탁한 고동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생각해 봐.”


덴지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바보 같을 정도의 순진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제 나를 조지려면, 너도 같이 상대해야 돼. 그리고 너를 조지려면, 나도 같이 상대해야 되는 거고. 이건 더 이상 일대일이 아니라고. 이대일이야, 이대일. 존나 불공평한 싸움이지. 걔들한테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쾌해서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음모, 배신과 추격이 그에게는 그저 단순한 숫자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산 속에서, 그는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의 말이 천천히 소화되고 있었다.


‘우리’라는 단어. ‘둘’이라는 개념.


그녀는 평생을 혼자서 싸워왔다.


동료는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든 자신을 버리거나 이용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에 불과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등을 맡길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배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과 그를 하나의 팀으로 묶고 있었다.


어떤 조건도, 어떤 의심도 없이.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를 세차게 흔들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아주 천천히,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애써 그 감정을 감추었다.


대신,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그를 놀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흐응~?”


그녀는 콧소리를 내며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었다.


“그러면 말이야, 너를 노리는 놈들이랑 나를 노리는 놈들이랑 머리를 써서, 서로 손잡고 한꺼번에 덤비면 어떡할 건데? 그러면 이대이가 되잖아. 공평한 싸움이네.”


그녀의 질문은 그의 단순한 세계관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였다.


그녀는 그가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덴지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이 커지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의 뇌가 그녀가 제시한 새로운 변수를 처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회전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


그는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 생각은 못 했는데.”


마침내 그가 내뱉은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의 얼굴에는 ‘세상에, 우리의 완벽한 계획에 이런 허점이 있었다니!’라고 외치는 듯한 순수한 절망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빠진 표정을 본 순간, 레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큭…"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소리 없는 경련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었다.


“푸흐…! 아하하하하하!”


그녀는 그의 몸 위에서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땀으로 젖은 살갗이 그의 몸과 마찰하며 미끄러졌다.


그녀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그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폭소에, 덴지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 아주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웃음소리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처럼 그에게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왜 웃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녀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그의 크고 바보 같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웃음소리와 뒤섞여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 동안, 방 안에는 두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세상의 모든 위협과 위험은 그 웃음소리 속에서 잠시나마 그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레제의 뺨은 웃음과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마키마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질문 하나가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처음 만났을 때 죽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임무 실패에 대한 변명,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 답은 아주 간단한 곳에 있었다.


그녀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채 전화 부스 안으로 뛰어 들어와, 바보같이 꽃 마술을 보여주던 소년의 얼굴.


야간 학교 교실에서 칠판에 유치한 낙서를 하며 낄낄대던 얼굴.


수영장에서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허세를 부리던 얼굴.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단 하나의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이 얼굴.


그녀는 그 얼굴들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이상의 형상을 보고 있었다.


그와 자신은 같은 종류였다.


인간의 몸에 악마의 심장을 지닌, 흉기로 대체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이형의 존재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는 자유로웠다.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제멋대로 웃고 떠드는 영혼.


그녀는 그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빗속을 달리고, 학교 담장을 넘고, 유치한 장난을 칠 때마다, 그녀는 아주 잠시나마 자신이 그와 동화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자유라는 단어의 진짜 맛을 알지 못했으나, 그와 함께 바보 같은 짓을 할 때면 그 낯설고 달콤한 기분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낀다는 착각.


내가 그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환상.


그때는 몰랐던 그 벅차오르는 감정의 정체.


그것은 그를 향한 동경이자, 스스로를 옥죄던 사슬을 끊어내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었다.


그와 함께 바보 같은 짓을 하며 웃고 떠드는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살인 병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서투른 다정함 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심장도 함께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바보.”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경멸이 아닌, 세상 모든 애정이 담겨 있었다.


덴지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왜?”


그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의 그 순진한 반문에, 레제는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주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냥.”


그녀는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네가 그냥 바보라서 좋아.”


그렇게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껴안은 채로 체온을 나눴다.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얽힌 채, 말이 아닌 몸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심장 박동을 통해, 서로의 체온을 통해, 서로의 숨결을 통해.


고요함을 먼저 깨뜨린 것은 레제였다.


그녀는 아무런 예고 없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워.”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덴지는 처음에는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드는 게… 무서워.”


레제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빗던 것을 멈추고, 그의 등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제야 덴지는 반응했다.


그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 두 사람의 땀으로 젖은 살갗이 떨어지며 쩍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의 옆으로 굴러가 누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천장의 한 점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공허했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평소의 장난기 어린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덴지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뭐가 무서운데.”


레제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무… 행복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지금 너무 행복해서… 이게 전부 꿈일까 봐.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다시… 처음의 그 차갑고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깨어날까 봐.”


그녀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차마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가장 깊고 연약한 두려움을 그에게 꺼내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을 무기로 살아왔다.


감정은 사치였고,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충만함과 평온함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아름다운 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꿈에는 끝이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그 끝이 두려웠다.


덴지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을 비웃거나,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행복은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동반하는 낯선 침입자에 가까웠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하지만 제법 힘을 주어 꼬집었다.


“으베에?!”


레제가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공허했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은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야! 뭐 하는…!”


“이래도 꿈같냐.”


덴지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퉁명스러웠지만, 그 눈은 진지했다.


그는 그녀의 양 볼을 잡은 채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손안에서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아픈데도, 이게 꿈인 것 같냐고.”


그의 질문은 단순하고 무식했다.


하지만 그 어떤 화려한 위로의 말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이었다.


그는 그녀의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을,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고통’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꿈에서는 아픔을 느낄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그는 그녀를 현실의 영역으로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레제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에서는 그의 손가락이 주는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그녀의 머릿속을 떠돌던 불안한 상념들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치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온몸으로 자신의 대답을 표현했다.


그제야 덴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의 양 볼에는 그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얼얼한 자기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의 그림자가 어려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어이없음과 함께 희미한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덴지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설령 이게 진짜 꿈이라고 해도. 만약 이게 그 차가운 방에서 너 혼자 외롭게 꾸는 꿈이라고 해도…”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가 꼭 깨우러 갈 테니까. 걱정 마.”


그것은 그의 서툰 진심이었다.


그는 화려한 미사여구나 논리적인 설득을 할 줄 몰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순하고 무식한 약속뿐이었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너를 다시 찾아내겠다는 약속.


네가 악몽 속에 갇혀 있다면, 그 악몽을 부수고서라도 너를 현실로 데려오겠다는 약속.


그의 그 뜬금없고 유치하지만 더없이 진지한 선언에, 레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서서히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붉은 손자국과 그 미소가 어우러져 기묘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킥… 킥킥…”


그녀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 동안 웃었다.


“뭐야, 그게. 내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되는 줄 알아?”


그녀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왕자님이야? 백마 타고 칼 차고, 용이라도 무찌르고 오시게?”


그녀의 짓궂은 놀림에, 덴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자신이 기껏 머리를 쥐어짜 내서 한 멋있는 말이 한순간에 유치한 동화 이야기로 전락해버린 것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야!”


그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사람이 기껏 멋있는 말 생각해서 해줬더니, 그게 뭐냐! 반응이 왜 그래!”


그는 정말로 삐진 것 같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모습에 레제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계속해서 그를 놀렸다.


“아니, 왜. 멋있는데? 우리 왕자님. 그래서, 나를 깨울 때 키스라도 해 줄 거야? 아니면 그냥 뺨을 또 꼬집을 건가?”


“시끄러워! 너랑 말 안 해!”


덴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돌아누워버렸다.


레제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등을 보며 한참 동안이나 더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녀의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마지막 불안의 그림자마저, 그들의 유치한 장난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웃던 레제는, 문득 웃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돌아누운 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뜬금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장난기도, 유혹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아주 깊고 따뜻한, 그리고 조금은 슬픈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덴지는, 슬그머니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낯선 표정에 당황했다.


“……뭐야.”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삐진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호기심을 감추지는 못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레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낯선 언어를 속삭였다.


“Спасибо, что спас меня, мой любимый принц.”


그녀의 모국어였다.


그녀를 무기로 만들고,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언어.


그녀는 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덴지는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에게 그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야.”


그의 질문에, 레제가 마침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다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돌아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코끝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덴지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소련말 모른다고, 지금 나 욕했지. 그렇지?”


그의 엉뚱한 추측에, 레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는 척을 했다.


“어머. 티 났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그 뻔뻔한 대답에, 덴지의 머릿속에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이게… 너 오늘 한번 죽어보자!”


그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그는 돌아누워 있던 몸을 번개처럼 일으켜,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덮쳤다.


“꺄아~”


레제가 장난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저항하는 척을 하며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침대 위에서 뒤엉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욕망이나 쾌락이 아니었다.


순수한 장난과 애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싸움이었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뒹굼이 끝났다.


두 사람은 이불 위에서 서로의 팔다리를 얽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기분 좋은 피로감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하아… 하아… 너, 진짜… 사람 잡겠다…”


덴지가 먼저 헐떡이며 말했다.


그는 레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어라? 벌써 항복이야, 왕자님?”


레제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놀렸다.


“겨우 이 정도로 지치면 어떡해. 앞으로 나랑 평생 놀아야 하는데.”


“이게 노는 거냐… 목숨을 건 사투지…”


덴지가 끙끙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몸을 뒤척여 그녀에게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레제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더 꽉 껴안았다.


“비켜… 무거워…”


“싫은데. 여기가 내 특등석인데.”


레제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왕자님이 공주님을 무겁다고 하면 못써.”


“누가 공주야! 너는 그냥… 폭 탄 마녀지…”


덴지가 투덜거렸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체념과 애정이 묻어 있었다.


레제는 그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이 폭 탄 마녀를 구한 건 너잖아, 왕자님.”


그녀의 말에 덴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그저 그녀의 품 안에서 작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이내 모든 게 귀찮아졌는지, 그는 길게 하품을 했다.


“…몰라. 시끄러워. 잘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덴지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고르고 깊어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짐승은 어디 가고, 그저 세상모르고 잠든 어린아이 같은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레제는 잠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땀으로 축축한 그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정말로 어린애 같았다.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견뎌온 걸까.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득, 조금 전 자신이 내뱉었던 모국어가 떠올랐다.


'Спасибо, что спас меня, мой любимый принц.' (구해줘서 고마워, 나의 사랑스러운 왕자님.)


그래. 그는 그녀의 왕자님이었다.


백마도, 빛나는 갑옷도 없었지만.


서툴고 유치하고 가끔은 바보 같았지만.


그는 분명 자신을 길고 긴 악몽에서 깨워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구원자였다.


잠드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 않았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이 온기가 곁에 있을 것임을 그녀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레제는 그의 품에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온전한 행복감 속에서 깊고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들이 잠든 사이에도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체인소의 심장을 노리는 자들이 다음 계획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머나먼 고국에서는 사라진 최종 병기를 회수하거나, 혹은 '처리’하기 위한 추격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기다리는 내일이 어제보다 더 평화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더 지독한 악몽이, 더 거대한 폭풍이 그들의 낡은 문을 두드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넘어져도 괜찮았다.


곁에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줄 사람이 있었다.


설령 그 손을 잡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해도, 적어도 혼자 넘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함께 넘어져, 함께 아파하고, 함께 먼지를 털고 일어날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다.


시골쥐와 도시쥐는 이제 날개를 얻어 새가 되었다.


비록 한 짝밖에 없어서 혼자서는 날지 못하더라도, 두 마리의 비익조는 서로에게 기댄 채 함께 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폭풍 속에서 길을 잃어도, 서로가 서로의 등대가 되어줄 터였다.


창문 틈으로 새벽의 여명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다가오는 새로운 아침의 빛이었다.


그 빛은 잠든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고르게 내려앉았다.


평온하고, 더없이 다정한 빛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c63f8204898e2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덴레제 뽕차서 뇌 비우고 끄적여본 망상글 읽어줘서 고맙다


핸드폰 pc모드로 글 쓰는거라 검수할 시간이 없어서 오타나 중복문장은 제미나이한테 짬처리했음


둘이 꽁냥대는 시나리오 몇개 더 있긴한데 맥락상 넣을 곳이 없어서 폐기한게 아깝기도 하고


그런 것들 조금 다듬어서 에필로그 형식으로 몇 화 더 끄적여볼 예정


레제 재등장 안하면 타츠키 암살하러갈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