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있었다. 온 세상에서 모인 왕립 마법교단의 인재들 중에서도 단연 찬란히 빛나던 형이. 평민들의 자존심, 부모님의 자랑이며, 친구들의 자부심이고, 규칙 몇 가지도 지키지 못해 교단을 박차고 나가 이단마법사가 된 못난 동생마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형제의 연을 이어가며 포용하던 형이. 이제는 없다. 용의 발에 밟혀 죽었다. 말년에 못다한 영광을 찾던 멍청이 대공은 성전을 선포했고, 광활한 검은죽음 산맥을 지배하는 날개 달린 짐승은 자비를 몰랐다. 바보 같이 성실한 형은 대공의 순장 행렬에 순순히 따라갔다. 평민 출신 궁중 마법사가 왕가에 반항했다는 흉한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제기랄. 난 그런 짓 못한다. 죽어라 노력해 궁중 마법사가 된들 다 무슨 소용이던가. 시체 없는 장례식이라, 평민 출신이라, 힘없는 볼모 신세라 미안하다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그리고 장례식마저 훔쳐볼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했다. 잃을 게 많은 형은 순순히 따랐지만, 난 잃을 게 없다. 부모님도 내가 죽은 줄 아니까. 그 뱀대가리 새끼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 “필멸자여, 그게 네 가상한 용기의 원천인가?” 입에 담긴 사악한 검은 불을 일렁이며, 용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시커먼 눈으로 용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비웃음이 울렸다. 구강 구조가 인간과 다른 생물이다. 내 두려움을 보고 즐기기 위해 마나로 만든 소음에 불과하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실장석만도 못한 비열한 자식. “이곳은 내 영토다. 침입자에게 온당한 대우는 죽음이지. 네 형제는 그에 맞는 대가를 준비하지 못했다. 네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기에 찾아왔느냐?”
“제 형과 일행은 당신께 어울리는 예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바치는 공물입니다.” 나는 내 뒤의 둔덕을 가리킨다. 평지 위에 아무렇게나 솟은 흑수정과 기암괴석들은 마룡의 취향대로 만들어진 인공적 조형물이다. 그 구더기만도 못한 미적감각을 고취시킨다는 점 외엔, 침입자들의 행군을 불편하게 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으리라. 용이 잠든 사이, 나는 그 수십 톤에 이를 바위와 산봉우리들 수십 개 주위에 일일히 마법진을 그려놓았다. 모든 일을 끝내고 내가 주저앉자마자 용이 눈을 뜨며 일어났으니, 교활한 녀석이 정말 잠들었을리는 없다. 녀석은 아마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해 자는 척 했으리라. 그게 네놈의 파멸로 이어질것이다. 버러지같은 도마뱀아. “설명해라. 미물아. 나는 조잡한 너희 마법을 살펴보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 “마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린 소환 마법진은 무역왕의 금고와 이어져 있습니다.“ 황금 군주라 불리는 발타이 무역국의 왕. 수천년 동안 누구도 도적질하지 못한, 전 대륙이 선망하는 보물창고인 황금 군주의 일곱 금고. 녀석의 덩치만큼 거대한 정적이 흐른다. 녀석이 침묵으로서 동요하는 것이 보인다. 황금에 미친 타락한 용들은 수천년의 성숙함으로도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간단한 교차 마법입니다. 인간들이 쓰는 차원문과 같은 원리죠. 마나를 불어넣으면, 같은 무게의 금속과 치환될 겁니다. 바위 산을 대가로 같은 무게의 보물을 얻게 되실 겁니다.” “흥미롭군.” “그러나 미력한 저는 마법진 전부를 작동시킬 힘이 없습니다. 다만 목숨을 걸고 그 금고에 침입하여 마법진을 그리는 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부디 제 수고를 공물로서 여겨주시고, 황금 군주의 일곱 금고의 온당한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심드렁히 바라보던 용은, 마치 밟아죽이려는 듯 앞발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가 내 나이만큼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일곱 금고에 침입했다는 헛소리를 믿으라고?” 가식덩어리 자식. 죽이지 않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흥미가 동했다는 의미다. “. 전 당신만이 들어주실 수 있는 청이 있어 왔나이다, 고귀한 용이시여. 영겁의 생애 중 조금의 여유만 베풀어 주시면 됩니다. 직접 확인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제 말이 거짓이거든, 개처럼 고통스럽게 죽여주십시오” 녀석은 발을 슬그머니 뺀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를 내려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다. 숨결이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위압감도. “네가 바라는 대가는?” “부디 간청드립니다. 제 형의 시체를 돌려주십시오. 제대로 된 장사를 치르지 못했나이다.”
녀석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마법진들이 빛난다. 손해볼 것 없다고 판단한 녀석이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영롱한 빛이 온 협곡에서 빛난다. 나는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도착한 것은 금이 아니다. 금속마저도 아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용은 당황한 표정이다. 거대한 눈동자는 수축되고 입은 헤벌어진다. 전 대륙에서 벙찐 용을 본 사람은 나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린다. 용의 본능적 위압감도 마력의 공포도 그 기쁨을 누르진 못한다. “이건… 뭐지?”
“아! 아! 들리십니까? 안들리세요?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동방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배를 타고 동방에서 건너온 생물이니까! 이것들은 실장석이라고 하는 생물이야! 이 아가리에서 실장변 냄새나는 뱀 대가리야아아!”
“테에?” “테치?” “지벳” “데스? 데픗, 데퍄퍄!” “데샤아아아아아아!”
내 말이 안 들렸을 수도 있다. 실로 엄청난 소음이 해일처럼 몰려들었으니까. 주위 풍경이 바뀌어 놀라는 소리, 용을 보고 실금하는 소리, 셀 수 없이 많은 동족의 무게에 짓눌려 죽는 소리. 웃겨서 눈물이 흐른다. 눈앞의 풍경은 광기와 유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수천만 마리의 낯선 생물이 진녹색과 돼지기름 색의 바다가 되어 협곡을 뒤덮은 광경을 보고 용은 얼어붙었다. 나는 생각했다. 일평생 만든 말썽 중 단연 최고야.
용은 멍하니 되묻는다. “뭐라고?” 나는 또 크게 웃는다. 녀석이 마침내 분노한 표정으로 돌아볼 때까지 웃는다. 상쾌하다. 더 이상 없는 형을 대신해 용을 마주 바라보며 눈물을 뿌려 웃는다. 그 사이에, 어느 눈치 없는 실장이 ‘거대노예’를 획득했다며 거수의 발톱에 똥을 바르고 있다. 저 가만히만 있어주면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생물을, 놈이 과연 몇마리나 참아낼 수 있을까? “그래, 복수다. 망할 자식, 아까 침입자에게 온당한 대우는 죽음이라고 했느냐? 그래. 나도 네게 걸맞는 대우를 해주겠다. 이 실장석 똥구녕만도 못한 도마뱀 새끼야! 네놈의 업보가 조금이나마 돌아온 줄 알아라. 이게 바로 십만양병 탁아다! 어디 똥무더기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웃으며 구경해주마!“
격분한 용이 나를 향해 검은 파멸을 뿜었다. 그러나 난 그 자리에 없었다. 환영마법에 속았음을 알게 된 용은 분노로 길길이 날뛰었을테지만, 도발하는 환영만 남겨둔 채 일찌감치 도망친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십 년이 흘렀다. 자유 마법사 연맹이 생겼다. 왕명에 얽매이길 거부한 이단 마법사들은 단결되고 통제된 세력의 보호 아래에서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창설 멤버로서 어엿한 간부가 된 나는 어느 개척도시의 도서관에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유적의 기록을 먼저 해독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바로 그놈, 검은죽음 산맥의 타락한 흑색용 도시아킨이 남긴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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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3160년 2일, 정신병에 걸린게 분명한 마법사가 복수라며 괴이한 생물을 협곡에 방류하고 도주했다. 내 수석 조각품들을 인간의 술책에 잃었다는 것보다, 미물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아, 눈을 멀게 하는 일곱 금고의 찬란함이여. 그동안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나 인간 군대도, 용도, 세상의 어떤 힘도 몇 년만 있으면 날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산맥의 마나를 흡수한 힘으로 무역왕의 나라를 불태우고, 일곱 금고의 황금을 갈취한 뒤, 날 모욕한 놈을 찾아내 사지를 찢으면 될 일이다. 리치 부관들을 호출했다. 산맥을 덮은 생물들의 정체를 알아낼 것을 지시했다. 인간의 머리통만한, 한번도 본 적 없는 녹색 생물체가 묘하게 내 관심을 끈다. 용의 예지적 본능이 관심을 가질 것을 지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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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4일, 봄이 시작되나 날씨가 아직 차갑다. 부관 중 한명인 정원사 마그란이 명령대로 생물체 수십마리를 나의 대전에 대령했다. 표정 없는 해골이 녹색 물질에 뒤덮여 있었다. 마그란의 정신적 피로가 느껴졌다. 생물체 중 한 놈은 날 보자마자 죽었다. 마그란은 놈만은 사념을 느낄 만큼 영리했다고 했다. 나머지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그랬다. 놈들은 제놈들끼리 떠들고 싸우고 있었다. 신비하게도 마나로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몇몇은 ‘죽는다’고, 몇몇은 ‘사육된다’고, 또 다른 놈들은 ‘노예를 구했다’ 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놈이 내게 뛰어와 ‘의무를 다하라’ 며 녹색 물질을 던지고 소리를 지른다. 놈을 비꼬며 할 수 있는 건 해보겠다고 말하자, 녀석은 기쁨의 울음과 함께 내 앞발에 작은 놈을 던졌다. 작은 놈은 발톱에 부딪혀 터졌다. 어처구니 없어 쳐다보자 놈이 발톱을 두드리며 말한다. 노예의 냄새가 나는 것이 제 새끼를 죽였노라고. 얼마나 미력한 지성인가. 비웃으며 녀석을 마나로 눌러죽이려 했는데, 들짐승에게도 미약하게 느껴질 만한 무게에도 녀석은 당황스럽게도 터져 죽었다. 남은 것들 중 반수는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흩어지고, 반수는 죽은 놈을 비웃고 있었다. 어느 놈들은 내게 가랑이 사이에서 녹색 물질을 꺼내 던진다. 정황상 놈들의 분변이 분명했다. 분노하는 대신 미약한 저항을 비웃으며 놈들에게 주제를 알라고 경고했다. 한 놈이 질문했다. ‘말도 안되는 레치. 그럼 세레브한 와타시는 오마에 병신 거대 똥노예보다 못한 레치?’ 왜 안그렇겠느냐고 비꼬자 놈은 저절로 죽었다. 나보다 아래인 현실을 감당하길 거부하듯. 태어난 이래 처음 느끼는 분노가 온 몸을 휘감았다. 보물로 가득한 내 쉼터를 모두 불태우고, 불살라져 녹은 황금 더미에 저주를 퍼부은 다음, 나는 리치 부관들에게 이 생물체들을 박멸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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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일, 바람과 언어의 여신 야냐스의 힘이 담긴 언어해석 마법에마저도 ‘데스’나 ‘테치’같은 어미가 붙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제외하곤, ‘실장석’이라는 생물은 연구의 가치도 없었다. 왜 모두 죽이지 못했느냐 묻자 부관들이 주저했다. 평소처럼 충직하게 즉시 시행하는 대신 그 번식력과 근성이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항명과 변명은 용납치 않는다. 놈들의 정신을 고통스럽게 주무르자 다시 복종을 맹세하며 일을 수행하러 떠났다. 자비도 포기도 모르는 냉혹한 리치들이 그런 미물에 망설인다니 심히 의문스러웠지만, 무역왕의 영토에 있는 붉은 용과 싸울 전략을 짜는데만 해도 바쁘다. 반드시 거만한 늙은 용의 목을 물어뜯고 말리라. 다시 한 번 박멸을 지시했으니 그걸로 끝이다. 연초의 비가 오크 전사들의 혈기를 식힌다. 그리고 협곡을 메운 지독한 냄새도 조금 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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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52일, 봄꽃이 만개했다. 검은 바위 틈의 무채색 풀과 꽃들은 심오한 빛을 내뿜는다. 그랬어야 했다. 대신 벌판은 악취와 더러운 진녹색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웠던 정원은 태고의 고통을 표현한 나의 작품들 대신 실장석이란 생물의 분변으로 덮였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전쟁 전문가인 부관들이 한 달이 넘게 해수 박멸 따위에 고전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리치들은 하나같이 해골 병사들이 모두 놈들의 독성에 망가졌다고 보고했다. 고블린 노예들과 사충(沙蟲, 샌드웜)들을 풀어 녀석들을 사냥하게 했다. 협곡에 실장석들이 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울린다. 오늘은 미물들의 단말마 속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으리라.
정원사 마그란의 정신을 본보기로 고문했다. 내 앞마당 정원의 보안은 놈의 담당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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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55일, 나의 증오가 산맥을 가득 메웠다. 실장석이라는 미친 생물들이 연신 내가 심은 마나꽃을 닥치는대로 뽑아놓은 것이 날 격분시킨 것이다. 마침내 좀 조용해졌다 싶었는데, 산맥을 메운 마나의 압박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놈들은 금세 의욕적으로 울부짖는다. 연신 꽥꽥대는 거대한 소음 속에 협곡에 회색 마나꽃의 씨가 말랐다. 마나식물들의 생장이 늦춰짐에 따라 협곡의 마나를 모아 힘을 비축하려는 내 계획이 어그러진다. 임무를 방기한 고블린 노예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 마그란은 노예들의 굴이 똥과 실장 새끼로 가득차서 점령당했노라고 보고했다. 영역싸움에서 이 따위 생물과 겨뤄 패배하다니, 어리석은 것들. 고블린들을 더 변호하려는 마그란을 다시 고문했다. 고막이 떨어질 것 같다. 방음마법도 통하지 않는 수백만 실장석들의 추한 소리를 마그란은 일종의 ‘쾌락의 소리’라고 했다. 놈들은 내 작품을 뜯어 그것을 가랑이에 문지르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치고 피로한 고블린들을 협곡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그리고 검은죽음 성채에 잠든 모든 가고일과 전쟁기계들을 깨웠다.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또다른 작품들을 이런데 쓰는 것이 아깝지만, 돌로 된 기계들은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실장석을 모두 때려 죽일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만류하는 리치 부관 중 하나의 정신을 쪼개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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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65일, 단 10일만에 모든 전쟁기계들의 작동이 멈췄다. 가고일들도 사지가 남아나지 않아 현장에서 모두 철수했다. 가죽에는 통하지 않지만 쇠와 돌에 지대한 부식성을 보이는 놈들의 분변, 마그란의 표현에 따르면 ‘육실할놈의 똥벌레들의 똥독’ 때문이었다. 해골 병사들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이었나? ‘육실할놈의 똥벌레’라는 표현을 되새겨본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어쩐지 상쾌했다. 놈이나 나나 육성으로 욕을 뱉어 본 것은 실로 수백년 만이 아니던가? 그러나 말초적인 상쾌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지는 마그란의 보고는 나를 경악시켰다. 나는 다급하게 불과 용암의 정령들을 깨워 ‘똥벌레’들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마그란은 놈들의 소음이 ‘데스’에서 ‘뎃데로게’ 로 바뀐 것이 번식의 징조라고 했다. 놈들은 수를 불리려 하고 있다. 이 생물들은 죽어도 살아도 문제다. 내 영역에 돌주먹에 터져 죽은 실장석들의 시체가 넘쳐난다. 죽은 놈들의 시체는 똥보다 더한 악취를 풍긴다. 나는 더 이상의 냄새를 감당할 수 없다. 구워서 고블린들에게 먹거나 거름으로 만들어서라도 시체를 치우라고 지시했다. 고블린들은 먹지도, 식물을 키울 거름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대신 내게 차라리 죽여달라며 용서를 빌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
마그란을 다시 고문했다. 마그란이 이유를 묻자, 나는 ‘분노는 녀석들을 박멸하는 좋은 동기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마그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도 말했다. 개인적인 화풀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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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80일, 초여름 날씨인데도 몇 안되는 불의 정령들이 모두 얼어죽었다. 남방 엘프들의 숲을 파괴할 전쟁병기였는데, 겨우 이런 일에 모두 소멸되다니. 범인은 다름아닌 리치 부관 중 하나, 빙결마법의 선구자인 '냉혹자 에오파르'였다. 생전에 한 왕국을 잔혹하게 얼려버리고 리치의 힘을 얻어 냉혹자라는 별칭을 얻은 자다. 이유는 동정심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차마 분노하지도 못했다. 에오파르는 모종의 사연으로 다른 부관들 몰래 이 생물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온 모양이다. 녀석은 어미를 잃은 개체들 수백을 거두어, 내 군단에 걸맞도록 교육시키고자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녀석은 천애고아인 ‘아기’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며 내 면전에 본인이 ‘교화했다는’ 작은 실장석을 들어올렸다. 놈은 ‘똥노예가 눈앞에 한가득’이라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리치 에오파르는 고개를 떨구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를 둥지에 쳐박은 나 대신, 격분한 마그란이 에오파르를 낳은 어미를 욕하며 혈마법으로 에오프의 대갈통을 부숴버렸다.
터져죽은 똥벌레는 내 둥지에 지독한 냄새만을 남겼다. 마그란은 분노로 이성을 잃고 기절했다. 혈압 문제가 없는 언데드가 기절하려면 보통 수준의 분노와 압박으로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내 부관은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기절해 망각 속으로 떠났다. 조금 오래. 나는 더 이상 마그란을 고문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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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25일,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 지속된다. 한껏 새끼를 깐 녀석들도 물이 부족하자 점점 메말라간다. 녀석들의 개체가 점점 줄어든다. 박멸을 위해 모든 하천을 막아버렸지만, 그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댐을 건설해 실장석들의 수분 공급을 막고, 나의 군단은 댐 위 상수원에서 물을 길어 쓴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군단이 쓸 상수원들의 물은 언제 침입했는지 모를 실장석 무리에 의해 빠르게 오염되었다. 오크, 트롤 할 것 없이 군단 전체가 실의에 빠졌고, 마그란은 내 지성을 예의 바르게 욕했다. 나는 마그란 대신 귀중한 수원에 똥묻은 몸을 담갔던 실장석 무리들을 고문하기로 했다. 절망에 빠진 나는 놈들의 비명이라도 들어야만 했다. ‘오로롱, 세레브한 정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데수우…’ 웃기지 마라. 내 정원이다. 너희는 못 돌아가는 데스... 안돼. 내 정신마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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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0일, 물을 오염시켰다가 내 손에 죽어간 실장석들이 남긴 말에, 그동안 나는 여태껏 생각지 못한 평화로운 결론을 내렸다. ‘행복하게 살고싶었을 뿐인 데스’, ‘용님의 영역인줄 알았으니 다시는 안 그럴것인데스’ 그리고, ‘어째서인데스, 와타시들도 생명인데스.’ 나는 최소한 내 영역에서는, 숨죽여 사는 생물들은 여태껏 내버려두었다. 인간과 같이 어설픈 지성으로 나와 생태적 지위를 겨루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해할 이유가 없으니까. 놈들도 냄새가 좀 날 뿐, 어차피 위험하진 않다. 그렇다면, 다른 들짐승처럼 공생의 기회를 줄 순 없을까? 놈들도 같은 생의지를 지닌 생명이 아니던가? 더해서, 곤충이나 새, 야생동물들은 놀랍게도 이 생물체들을 먹고 번성중이었다. 변을 생산하는 기관은 포식자들도 기피하지만, 최소한 생태적으로 정해진 기능이 있는 것이다. 몰살할 필요는 없음에 나는 기쁨을 느꼈다. 아마 갈수록 몰살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져서였겠지만, 오늘 내내 나는 애써 자신을 속였다. 수치스럽다.
녀석들의 ‘우두머리’격인 개체들은 놀랍게도 나름의 지성이 있어, 내가 놈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텔레파시를 보냈음에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마그란의 의견에 따라 군단의 야영지로부터 먼 곳에 있는 격오지의 큰 하천 일대를 조사하자, 놀랍게도 수 만 마리가 물을 두고 패를 갈라 영역다툼을 하고 있었다. 일대의 땅을 파헤치자 우두머리들이 사는 굴만 수백개가 나왔고, 결국 바글바글한 대장놈들을 끌어내 내 앞에 모이게 했다. 여태껏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죽은 에오파르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실장석은 이해력과 인지능력에 한계가 있어, 웬만한 짐승보다 큰 형체라면 그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포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어쨌든 나보단 약할 것’이라며 현실도피를 하게 되며, 그렇기에 살쾡이 크기의 짐승도 두려워하는 놈들이 큰 짐승에게 투분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때문에 고양이나 오크, 엘프 등 하위종족들의 아이는 두려워해도, 성체 하위종족에겐 비웃으며 똥을 던지는 경우가 넘친다고도 했다. 그리고 놈들이 ‘노예’를 만들 땐 몸에서 특정 호르몬을 분비해 똥에 묻히고, 그 똥을 노예가 될 대상에게 던져 묻힘으로서 상하관계 서열을 만든다고 했다. 놈들이 수만배의 덩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날 노예로 불렀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무례가 의도가 아닌 어리석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나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씻어 냄새를 없애버린 뒤, 폴리모프하여 어린 인간의 형상으로 놈들과 대화했다.
그중 가장 큰 놈이 ‘인간님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신지’ 물을 땐 희망이 보였다. ‘개체 수를 조절하고 똥은 땅 밑에 묻어라. 통제력을 지닌 개체들이 하위 개체들을 통솔해 규칙을 지켜라. 그럼 이 산에서 사는 것을 허락하겠다’ 라고 말했다. 일방적인 통지였고,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다. 녀석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번식과 노상방뇨 및 방분은 일생의 행복이고, 똥을 묻어버리면 ‘구더기’ 개체들이 먹을 게 없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 또한 당황했다. 그따위로 똥을 계속 뿌린다면 숲이 망가져 먹을것은 씨가 마를 것인데다가, 내가 바란 건 통보였지 긴 교섭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그 멍청한 지성에 내 조건을 이해시키는 일 자체에 악을 쓰고 덤벼들며 나는 피로를 느꼈다. 놈들이 지쳐 자러 돌아갈 때까지도 놈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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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0년 131일, 나는 다시 찾아가 놈들에게 ‘공생의 필수 조건’을 가르치려 했다. 중요한 일이다. 맘 같아선 전부 죽이고 싶지만, 내 집인 협곡의 자연환경을 전부 들어 엎지 않는 바에야 널리 번식해버린 놈들을 박멸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온 사방에서 풍기는 분변의 악취를 견디며 살 수는 없다. 에오파르처럼 교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적어도 분변이라도 덮어 없애도록. 그런데, 찾아가자마자 우두머리 중 한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똥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제 노예 냄새가 나게 된 인간 똥노예는 노예의 신분이므로 더러운 입 닥치고 위대한 자신에게 물이나 제공한다, 자신의 아이들과 부하들이 전부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라며 조잡한 무기로 내 다리를 찌르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놈이, 미친 똥벌레놈이, ‘노예 주제에 이 산의 진정한 보스인 와타시에게 반항이 거칠다, 남성기가 달렸다면 흑발의 아이를 만든 뒤 사지를 잘라 똥굴에 던지는 정도로 용서해주고 아니면 죽일것이다’ 라며 다시 내 다리를 찌르다 또 다시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랬다고.
연구고 이해고 생의지고 다 필요없다. 나는 다시 마음 속 본연의 논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두머리 놈들은 전부 불타죽었다.
내 다리를 찌른 놈은 특별히 데려와 오래도록 고문했다. 이번엔 마그란 대신이 아니었다. 놈 뿐이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놈들을 고문하는 것은 즐겁다. 요새 의욕 저하로 자취를 감췄던 나의 사악함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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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올렸던 대회용 스크 여기도 올려봄 지난번에 올린 단편보다 조회수 적은거보면 난 단편쓰는게 나은지 싶다 별로 될것같진 않지만 입선이라도 좋으니 대회 입상해보고싶어서... 구성이나 재미에 문제 있으면 지적좀 부탁 |
카페에서 재밌게 봄. 정말 굳이 지적하자면 독자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참피물의 기대 범위에서 좀 벗어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