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석 요리의 역사

실장석을 요리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초고대문명이 실장석을 창조했던 이유도 실장석을 식량으로 쓰기위해서라고 한다.

특히 양충을 학대하면 할수록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초고대문명의 멸망 이후, 인류는 문명이 퇴보하였는데

그럼에도 인류가 계속 될수있었던 이유는 실장석 사냥이라고 한다.

이후 실장석과 인류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인간과 실장석이 운명을 걸고 대전쟁을 벌였는데

세계 각지에서 벌어졌으며 대부분 인간측이 승리했다.

(인간이 패배한 지역은 훗날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의 진출로 격전이 벌어지고 해방되었다)

인간측은 실장석들을 모두 멸종시키려고 했지만 실장석의 식량 가치 때문에 존속을 허락했다한다.

중세에 오면서 실장석은 가장 구하기쉽기 때문에 고급 요리 이미지가 없었으나

중세 유럽의 왕, R은 스스로 실장석 요리를 즐겨먹어서 실장석 요리 대중화에 기여했다한다.

물론 궁중 요리사 A의 뛰어난 요리 실력(재료의 맛보다 양념)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육식금지령과 불교 문화의 영향이 있어도 실장석을 즐겨먹었다한다.

기근이 벌어졌어도 실장석을 잡아먹어서 연명했다한다.

현대, 종전 이후에는 유통망, 교통의 붕괴로 실장석이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문명화의 인프라 정비 때는 야생 실장석은 공원에서만 볼수있었는데

이때는 인프라가 붕괴되었어도 야생 실장석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주민들이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사령부는 야생 실장석을 계속 일본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때 실장석 요리는 고급 요리의 이미지가 없었다.

60년대 수상 이케타 토시아키는 "영세민은 실장석을 먹어라"라고 보도가 유명했었다.

사실 이케다는 "쌀 대신 실장석을 먹더라도 경제 정책을 바꿀수없다"고 말했었지만 기자들이

허위보도를 했었다.

이케다의 비서는 "정정보도를 요구해야한다"고 말했지만

이케다는 "정치는 송곳으로 발등을 찌르는 일이라서 예쁜 말로 위기를 넘길수없다"고 말했다한다.

훗날 후타바 이치로는 실장석 요리의 고급화를 이뤄내서 실장석 요리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이케다 수상도 퇴임후에 즐겨먹었다하고 한다.

한국의 경우,

숲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나온다며 맹호출림으로 불렀고

산은 실장석,실장씨, 카오스 실장, 실장인이 나온다며 실장지산으로 불렀다고한다.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평지가 부족하고 산지가 많아서 실장석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실장씨, 실장석, 실장인들도 사람을 먹기는 했지만 실석류에게 인간의 고기는 해롭기 때문에

그들은 즐겨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가끔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여 해방구로 만들거나 혁명기지로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야생 생물들은 호랑이, 실장석, 실장인, 실장씨, 카오스 실장들이었기때문에

이들을 토벌하는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한다.

이 특수부대는 움직일때 문민의 허가도 받지 않으며 선행동 후보고를 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그만큼 반란에도 이용되었는데도 계속 운영되었는데 그만큼 실장석의 피해가 심했다한다.

최철웅이라는 인물은 실장석 학대,학살로 벼슬을 얻었다한다.

그의 학대 노하우, 실장석 지식은 훗날 훌륭하게 쓰였다.

현대에는 사육실장 납치, 학대가 문제였지만 조선시대는 사육실장 납치, 취식이 문제였다한다.

고위층의 애완용 실장석 납치, 살해, 취식은 문제되지 않았지만(물론 보상은 조금해야했다)

돈벌이, 식량을 위하여 키우는 실장석 납치, 살해, 취식은 문제로 삼았다.

고위층에서 서민까지 실장석 학대는 매우 퍼져있으며 문화로 정착되었다.

실장석은 인간에게 피해를 줬으며 산실장은 산의 치안을 어지럽히기에 학대가 권장되었다.

물론 학대 끝에 죽으면 맛있게 즐겨먹기도 했다.

오늘날의 학대파들은 학대치사로 죽은 실장석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