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집 안을 메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꼭 누군가 낮게 비웃는 것 같았다.
살아 있긴 하네. 아직 전기 안 끊겼네. 아직은.

정우는 식탁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은행 앱, 카드 앱, 대.출 앱, 문자함.
한 번 본 걸 또 보고, 또 본 걸 또 봤다.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사람 마음만 닳았다.

통장 잔액 184,327원.

그 밑에 잡히는 자동이체 목록들.
주담대, 신용대.출, 보험료, 통신비, 관리비, 아이 어린이집 특별활동비.
정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내리다가 멈췄다.

이번 달도 모자랐다.

모자란다는 말은 참 점잖다.
실제로는 구멍이었다.
바닥이 뚫린 배 같은 거였다.
아무리 양동이로 퍼내도 물이 다시 차오르는.

“그놈의 돈.”

입안에서 퉁명스럽게 굴러나왔다.
욕이었고, 탄식이었고, 오래된 패배선언 같기도 했다.

싱크대 쪽에선 저녁 설거지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아내가 아이 재우다 같이 잠든 모양이었다.
젖병 하나, 국그릇 둘, 프라이팬 하나.
평범한 그릇들인데도 정우 눈에는 전부 청구서처럼 보였다.

먹는 것도 돈.
자는 것도 돈.
애 키우는 것도 돈.
아픈 건 더 많은 돈.

심지어 꿈꾸는 것조차 돈이 들었다.

그는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혹시나 숫자가 달라졌을까 봐.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미신도 디지털로 한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아버지는 늘 저녁 늦게 들어왔다.
작업복에는 쇳가루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식탁에 앉아 양말도 벗기 전에 소주부터 한 잔 들이켰고, 어머니는 그 앞에 말없이 김치찌개를 놓았다.
그때마다 집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가 깔렸다.
싸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먹구름 같은 공기.

한 번은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달 카드 막긴 막아야지.”

그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밥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정우는 그 소리가 싫었다.
가난이 소리로 난다면 아마 그런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짐했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안 산다.
돈 때문에 표정이 썩는 어른이 되지 않는다.
가족 앞에서 숫자에 쪼그라드는 사람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식탁에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딱 그때 아버지 같았다.
나이 든 얼굴, 잠 못 잔 눈, 턱에 거칠게 올라온 수염,
그리고 손에 들린 건 소주잔 대신 휴대폰일 뿐.

정우는 비웃듯 웃었다.

사람은 자기가 제일 싫어하던 방식으로도 망가진다.

젊을 때는 돈을 좀 우습게 알았다.
열심히 하면 벌 수 있고, 실력이 있으면 따라오고, 남들보다 빨리 판단하면 잡을 수 있는 거라 믿었다.
실제로 어느 시절엔 꽤 벌기도 했다.
계좌에 돈이 찍히면 세상이 환해지는 줄 알았다.
사람들 말투도 달라지고, 내 의견이 더 무게 있어지는 느낌도 있었다.

그 시절 정우는 착각했다.
돈이 많아지면 내가 커진다고.

실은 반대였다.
돈이 들어오면 세상이 잠깐 허리를 숙여줄 뿐이었다.
그러다 돈이 빠져나가면,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등을 돌렸다.

사업은 예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고,
투자는 예상보다 더 빨리 깨졌고,
믿었던 사람들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평범하게 자기 살 길을 갔다.
마지막에 남은 건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서류로 정리된 빚과,
말로 다 못할 자책이었다.

정우는 메모장을 열었다.

이번 달 현금 마련.

중고 판매.
미수금 독촉.
보험 약관대.출 검토.
차량 유지비 점검.
외식 끊기.
구독 전부 해지.

쓰다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삶인가.
이건 계획이 아니라 연명 아닌가.

그는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감쌌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아니라 소음이 났다.
왜 이렇게 됐지.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내가 무능한 건가.
진짜 형편없는 인간인 건가.

돈은 이상했다.
없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닌데, 사람 존엄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마트에서 가격표를 먼저 보게 만들고,
전화 오는 번호에 심장이 먼저 철렁하게 만들고,
아이 옷 한 벌 사면서도 한 달 뒤 잔액을 계산하게 만들고,
아내가 “괜찮아”라고 말하면 그 말의 절반은 포기라는 걸 알게 만들었다.

그게 제일 잔인했다.

돈이 없을 때 무너지는 건 소비가 아니었다.
관계였다.
말투였고, 눈빛이었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내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자?”

정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응.”

아내가 물 한 컵을 따라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 유리컵 바닥이 나무 식탁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또 보고 있어?”

정우는 대답 대신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아내는 맞은편에 앉지 않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게 더 사람 힘 빠지게 했다.
마주 보고 따질 생각이 아니라는 뜻이어서.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달도 좀 빠듯할 것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자기가 자기 말에 구역질이 났다.
빠듯.
또 그 말이었다.
빠듯이 아니라 모자란 거고,
모자란 게 아니라 막막한 거고,
막막한 게 아니라 두려운 거였다.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정우는 액수를 말했다.

입으로 꺼내는 순간 숫자가 더 더러워졌다.
숫자는 원래 무표정한데, 사람 입을 통과하면 수치가 된다.

아내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겠어.”

“화 안 나?”

“화는 나지.”

정우는 그제야 아내를 봤다.

“근데 화난다고 돈 생겨?”

말은 담백했는데 그 안에 피로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우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내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했다.

“나한테 제일 짜증나는 건 돈 없는 거보다, 당신이 자꾸 혼자 판결 내리는 거야.”

“무슨 판결.”

“당신이 실패했다는 판결. 가장 자격 없다는 판결. 다 끝났다는 판결.”

정우는 헛웃음을 쳤다.

“안 끝났으면 이러고 있겠냐.”

“끝난 사람은 계산도 안 해.”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이 퍽 초라했다.
사십이 다 되어 가는 남자.
눈 밑은 꺼졌고, 어깨는 굳어 있었고,
한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입으로
이제는 카드 결제일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낮게 말했다.

“나는 돈이 없으면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야.”

아내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정우는 계속 말했다.

“돈 못 벌면 내가 쓸모없는 것 같고,
집에 돈 못 가져오면 남편 자격도 없는 것 같고,
애 앞에서 웃고 있어도 속으론 사기 치는 기분이야.
괜찮은 척하는 게 다 거짓말 같아.”

말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울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사람은 너무 오래 버티면 목부터 굳는다.

아내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화면이 식탁에 엎어졌다.

“그건 돈이 아니라 당신 자존심 문제야.”

정우는 기분 나빠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정확했기 때문이다.

“돈이 중요한 건 맞아. 없으면 힘들지. 비참하기도 하고. 근데 당신은 자꾸 돈을 생존수단이 아니라 자기 점수표로 써.”

“틀린 말은 아니잖아.”

“틀리지. 돈은 점수표가 아니라 도구야.”

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도구가 사람 목을 조르는데?”

“그래도 도구야. 칼도 사람 살리고 죽이잖아.”

정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선 비가 다시 굵어졌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서 번들거렸다.
세상은 참 뻔뻔했다.
누군가는 오늘도 큰돈을 벌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오늘 밤 다리 밑에서 잘 것이고,
대부분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내일 아침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겠지.

세상은 공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돌아갔다.

정우는 뒤집힌 휴대폰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무섭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장 해결할 방법이 잘 안 보여.”

“그럼 안 보이는 대로 쪼개.”

“무슨 뜻이야.”

“한꺼번에 살지 말고. 이번 주, 이번 달, 이번 분기. 그렇게.”

정우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한번 굴렸다.
이번 생이 아니라 이번 주.
남은 인생이 아니라 남은 열흘.

그 정도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단위였다.

아내가 말했다.

“그리고 도움 요청하는 걸 실패라고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도움 요청.
그건 그에게 거의 패배 선언과 비슷한 단어였다.

아내는 그런 표정을 읽은 듯 덧붙였다.

“지금까지 혼자 다 해보겠다고 버틴 결과가 뭐였는데.”

그 문장은 매서웠다.
하지만 잔인할 만큼 정확했다.

정우는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이번엔 제목을 지웠다.

이번 달 현금 마련.

그 대신 새로 적었다.

살아남는 순서.
1. 이번 주 현금 유입 만들기
2. 자동이체 조정 가능한 것 확인
3. 반드시 지킬 지출 / 미뤄도 되는 지출 분리
4. 감당 안 되는 부분은 협상
5. 매일 숨지 말고 공유

그는 한 줄을 더 적었다.
6. 돈과 내 가치를 섞지 말 것

쓰고 나서 한참 그 문장을 봤다.
너무 뻔한 말 같았는데, 정작 평생 한 번도 지키지 못한 문장이었다.

돈 앞에서는 이상하게 사람이 작아진다.
돈이 사람보다 위에 앉는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 삶을 경영하는 게 아니라
돈이라는 신을 모시게 된다.

더 벌면 안심할 줄 알았는데 더 불안했고,
잃고 나니 진짜 드러난 건 잔고가 아니라 자기 바닥이었다.
정우는 그제야 알았다.

자기를 파괴한 건 가난만이 아니었다.
돈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습관이었다.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잘게.”

정우가 물었다.

“나 한심하지 않냐.”

아내는 문 앞에서 돌아봤다.

“한심한 건 상황이지,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근데 상황 바꾸려면, 사람부터 안 무너져야 돼.”

문이 닫혔다.

정우는 혼자 남았다.
냉장고 소리는 여전했고, 빗소리도 여전했고,
잔액도 그대로였고, 빚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숨 쉴 틈이 생긴 것 같았다.

그는 계산기를 집어 들었다.
숫자를 다시 넣어봤다.
모자라는 금액.
조정 가능한 금액.
이번 주 안에 만들 수 있는 금액.

현실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까처럼 목을 겨누는 칼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방향만 잘못 잡으면 베이는 공구 같았다.

다룰 수는 있다는 뜻이었다.

새벽 세 시를 넘길 즈음,
그는 마지막으로 메모장 맨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그놈의 돈.
필요하지만, 숭배하진 말 것.

정우는 그 문장을 읽고 피식 웃었다.
오늘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밖에서는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내일도 사정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숫자를 봐야 하고, 또 결정을 해야 하고, 또 버텨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알았다.

인생을 무너뜨리는 건 돈이 부족한 사실 하나가 아니다.
그 사실을 핑계 삼아 스스로를 폐기처분하는 순간이다.

그 밤 정우는
빚을 갚지 못했다.
수입을 늘리지도 못했다.
기적처럼 누가 돈을 보내준 것도 아니었다.

대신 딱 하나는 했다.

돈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릎 꿇는 걸,
조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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