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겨울의 날은 유난히 일찍 어두워지기에 창밖의 석양은 곧 지려 했다. 주황빛 햇살이 특수 제작된 창호지 위에 비추자 창호지는 금빛을 흩뜨리는 것처럼 빛이 났다. 그러나 방 안에는 오히려 한 점의 빛도 없었다. 만약 콩알만한 크기의 촛불이 일렁거리고 있지 않았다면 이 방에 빛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광택이 나는 도톰한 비단 이불 안에서 사람이 꿈틀꿈틀 대더니 웅얼거리며 깨어났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창밖을 한번 내다보더니,

“아, 날이 어두워졌네, 일어나야겠는걸.”
그녀는 하품을 한번 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난 후 그녀는 햇빛이 사라지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썹 끝이 가늘게 움직이더니 창백한 손가락이 뻗어 나왔다. ‘삐걱’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열렸다. 그녀는 창문 옆 한쪽 벽에 서더니 손을 내밀어 저물어가는 햇살을 만졌다. 그러자 가뜩이나 앙상한 그녀의 손은 햇빛에 살점이 발라지듯 순식간에 끔찍한 백골만 남았다. 그러나 햇빛을 받지 못한 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기운화(纪云禾)는 손을 뒤집어 햇빛에 드러난 자신의 마른 뼈를 바라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깜짝 놀랐네.”
한치의 동요도 없는 말투였다. 말을 마치고 나니 바로 아래층 뜰 밖에서 찬합을 든 계집애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운화는 손을 거두었으나 창문은 닫지 않았다. 오늘은 햇볕이 들었는데도 찬바람은 여전히 살을 에는 듯했다. 방안으로 바람이 휘휘 불어왔으나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그저 벽 뒤로 몸을 숨겨 먼 산과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가운입김이 하얗게 새어 나왔다.

“오늘 밤엔 눈이 조금 올 듯하네. 술 한 주전자를 데워 마셔야겠는걸.”‘쾅’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 때 바깥의 석양은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지고 있었고, 방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새로 온 계집종 강미연(江微妍)이 퉁명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아직도 술 마시고 싶어요? 병든 몸으로 마시면 죽을까 봐 겁나지도 않나 봐요?”

강미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자 조금 교활하고 난폭해 보였다.
  “창문은 꽉 닫아야죠. 죽으면 그만인데, 병이라도 나면 나중에 내가 와서 돌봐야 하니 힘들어진다고요.”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찬합 안의 음식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운화는 창가에 기대어 머리를 대고 강미연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강미연이 엮이기 싫다는 듯이 한 말을 듣고도 화도 내지 않고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사람들이 모두 집에서 쉬고 있는데,제가 굳이 와서 밥을 가져와야 하냐구요.”
강미연은 투덜거리며 식사 준비를 마쳤다. 고개를 돌리자 기운화가 여전히 창문을 열어 놓은 채인 것을 보았다. 곧바로 눈썹을 치켜 뜨며,
“제가 말하는 게 안 들려요?”
“들려.”

기운화는 눈썹이 휘어지게 웃으며 그녀를 쳐보았다. 심술궂은 여자 아이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드문 좋은 광경을 즐기는 듯했다
“계속해 봐”

기운화의 이런 모습을 본 강미연은 바로 화가 불같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든 그릇을 내려 놓았다. 발걸음을 크게 내딛어 두 걸음만에 창가에 와 손을 뻗어 창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 한 손이 그녀의 굽힌 팔 아래로 들어와 가까스로 창문을 떠받쳤다. 창가에 손을 내밀어 창문을 닫지 못하게 것은 의외로 병색이 완연한 기운화였다.

강미연은 고개를 돌려 기운화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기운화는 여전히 웃을 듯 말 듯한 모습을 한 채였다.

“바람을 쐬고 싶었어. 환기도 시키고. 하루 종일 참았는데…”
기운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미연이 그녀의 손을 찰싹 때려 풀었다.“무슨 상관인데요.”

  기운화 맞아서 붉어진 손등을 보고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강미연은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밥은 혼자 드시구요. 다 먹으면…”

강미연이 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기운화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강미연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돌려 기운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말할 새도 없이 그녀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어떻게 밀렸는지는 모르겠는데 막 닫힌 창문에 머리가 ‘쿵’하고 부딪혔다. 창문이 계집종의 머리에 받혀 단번에 열렸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창문 밖으로 강미연의 몸이 반쯤 드러났는데 그것은 기운화가 그녀의 옷자락을 손으로 잡은 덕분이었다. 기운화는 강미연이 이 3층 각루(閣樓)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강미연은 얼굴빛이 반쯤 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약간 떨면서,“당신..당신 뭐하는 거예요! 날 놔…아니! 놓지 마세요.”

기운화는 한 손으로는 그녀를 들고 한 손으로는 이마 위에 살짝 배어나온 엷은 땀을 닦았다. 두번 기침을 하더니 탄식하며,

“휴, 도무지 예전 같지가 않네. 요만한 동작 했다고 힘들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네.”

강미연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바로 기운하의 손목을 잡더니,
“제..제발,제발 떨지 마세요”
기운화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상관인데.”

기운화가 손을 떼는 척을 하자 강미연이 놀라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비명을 지르고 나자 오히려 그녀를 당기는 강한 힘을 느꼈다.강미연이 꼭 감았던 눈을 뜨자 뜻밖에도 기운화가 그녀를 잡아당겨 돌려놓는 것을 보았다.

비틀거리지 않고 방 안에 서서 등 뒤를 바라보니 창밖으로 찬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고 태양은 이미 져서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한바터면 이 곳에서 떨어질 뻔했다.  강미연이 고개 다시 돌리니 눈앞에서 밉살스럽게 웃고 있는 기운화가 보였다.
“괴롭힘 당하는 기분이 어때?”

기운화가 이렇게 물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였지만 놀림을 받자 분노가 삽시간에 두려움을 덮어버렸다.강미연은 어릴 적부터 무예를 익혔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단지 방금은 기운화가 그녀가 부주의한 틈을 타서 기습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강미연은 고모가 그녀에게 운원(云苑)에서 말썽을 저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스스로가 여전히 이 부(府) 내의 일을 책임지고 있는 여관 (女官)의 친조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운원 안에는 병색이 짙은 “주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다.겉으로는 주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곳에 연금되어 있을 뿐이었다. 운원은 호심도(湖心島)에 만들어졌는데, 사방으로 교통이 막혀 있어 위에 지시가 있지 않고서는 외부인은 이 호심도에 발도 들여 놓을 수 없었고 운원 안에 사람들도 또한 마음대로 떠날 수 없었다.  

윗분은 특별히 더 당부했다. 이 ’주인’이 방문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 하게 하라고.  강미연이 밥을 챙기고 떠날 때마다 밖에서는 자물쇠를 채워야 했다. 그야말로 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취급했다.  

듣자니 이 여인과 부(府) 내의 그 대인과는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그녀가 온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부(府) 내의 그 대인은 운원에 오기는커녕 호심도에도 한 번을 온 적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기운화는 그저 냉대를 받는 채 곧 병들어 죽어가는 한 물 간 여자에 불과했다.

  이름 하나 없는데 못 건드릴 게 뭐가 있겠는가!  

강미연은 어려서부터 집에서 떠받들어져 자랐는데 가세가 기울지 않았다면 어찌 고모에게 부탁해 이곳에 들어와 다른 사람 시중을 들었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농락까지 당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난 강미연은 기운화가 미처 손도 못 쓸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네까짓 게 대체 뭐라고!”

그녀는 호되게 욕을 했다. 하지만 이 따귀가 기운화의 뺨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손은 누군가에게 중간에 붙잡혔다. 여자의 힘이 아니었기에 강미연이 고개를 돌리니 청상(青裳)에 흑포(黑袍)를 입은, 차가운 얼음이 얼어 있는 듯한 푸른 눈을 보았다.

이..이 사람은..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린 강미연은 바로 겁에 질려 온 몸을 떨었지만 그녀가 예를 갖추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그 손이 바로 그녀의 목 위로 떨어졌다.

강미연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그가 싸늘한 말투에 노기가 섞인, 마치 시퍼렇고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내는 듯한 말이었다.  “네까짓 게 대체 뭐길래?”

다음 순간 그녀는 버려지는 쓰레기마냥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3층 각루의 열린 창문에서 그대로 던져진 것이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뜰에 있던 얼음이 언 연못으로 떨어졌다.위에 얼음을 깨뜨리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한참만에야 다시 떠오르더니 살려 달라고, 주인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다.

뜰 밖에 서 있던 시종과 노비들 모두 심히 놀라고 두려워서 3층을 힐끗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도 감히 움직이지를 못 했다.
“이봐, 쟤 좀 당겨봐.”

3층에 있던 기운화가 머리를 내밀고 아래층에 있던 몇 사람을 불렀다.“안 당기면 진짜 사람 잡겠다.”

그러나 몇몇 시종들은 모두 감히 움직일 수 없었고 머리조차 들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운화 옆에 흑포를 입은 남자의 서릿발 같은 무서운 기세에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운화가 이 광경을 보더니 살짝 입을 삐죽이며,

“관둬라, 관둬. 내가 창문을 닫을 테니, 너네들은 어서 끌어당겨 올려라. 이 녀석이 못 볼테니.”

“……”

주인님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감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 방에 있는 이 여인뿐이리라.

  ‘딸각’하고 3층의 창문이 진짜로 닫혔다. 바깥의 찬 바람을 차단하고 기운화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 옆 의자에 비스듬히 앉더니,

“ 장의(长意), 지금 너 성격말야. 진짜 많이 안 좋아졌구나.”
“이리와 밥 먹어.”

그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장의는 식탁 옆으로 다가가 아직 다 차리지 못한 그릇과 젓가락을 기운화에게 놓아주었다. 기운화도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장의를 줄곧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

“나 좀 놔줘라. 충분히 갇혀 있었잖아.”

장의는 젓가락을 그릇 위에 올려 놓았다. 조용하고 맑은 소리가울려 퍼졌지만 고요한 방안에서 들으니 오히려 살얼음판 같았다. 기운화가 한숨을 쉬며,

“넌 나를 거둬서 뭐 하려는 거야? 내 목숨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나 좀 나가게 해 주라. 눈도 보고 달도 보고 곧 들판에 가득 피게 될 봄꽃도 보게 말야. 운이 좋아 어쩌면 여름비도 구경할 수 있을 지 몰라……나는 그저 며칠 자유롭게 삶을 누리고 싶을 뿐이야…..”
“기운화.”

장의가 기운화쪽으로 몸을 돌렸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했다. 그런데 또한 수많은 말을 숨기고 있는 듯도 했다.

“능력이 있으면 다시 날 한 번 죽여. 그리고 다시 가든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지만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기운화가 웃었다.

“ 너 이 말 6년전에 했더라면, 난 오늘밤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담담하게 내뱉는 말을 듣더니 장의는 손을 약간 꽉 쥐었다가 곧 다시 풀었다. 그는 기운화 앞까지 걸음을 옮기더니 그녀의 턱을 잡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 어떤 흔들림이라도 찾으려 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예전과 같이, 시커먼 소용돌이가 모든 비밀을 감춰 버린 듯한 그 눈이었다.

장의가 말했다.

“안타깝네. 지금은 이미 6년 전이 아니니.”
“그러게.”

기운화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이미 6년전이 아니지.”
기운화는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대단한 대요괴가 되었고 어요사였던 나는 폐인이 되어 버렸네. 장의…..”

기운화 목소리에 담긴 놀리는 듯한 비웃음에 장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의 우리는, 6년전하고는 완전히 달라졌지.”

수감자와 구금자.


공교롭게도 그들의 처지가 바뀌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