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상쟁(서로 겨루다)
어요곡 대전(大殿)의 이름은 여풍당(厲風堂)이다.
기운화가 대전 입구에 들어서 노곡주 곁에서 눈을 내리뜨고 조용히 서 있는 임호청을 보자 오늘따라 일진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곡주님”
기운화가 곡주에게 예를 올렸다.
노곡주 임창란은 이미 고희로 얼굴에 온통 주름이 가득 졌지만, 주름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오히려 매의 눈처럼 여전히 날카로워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쿨럭쿨럭, 운화가 왔구나.”
임창란은 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손짓을 해 기운화를 앞으로 오게했다.
“운화는 근래 들어 무엇 하느라 바빴느냐?”
기운화는 예의 바르게 앞으로 나아가 임창란 오른 편에 서서 몸을숙여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는 몇몇 작은 요괴를 길들여 다시 돌려보냈고, 요 며칠은 제 밑에 있는 어요사들에게 요괴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치느라바빴습니다.”
임창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구나, 우리 어요곡을 위해 이리 열심이다니.”
늙어서 마른 장작 마냥 거칠고 메말라진 손을 내밀어 기운화의손을 잡고 두들이며,
“수고했느니라”
“아랫 사람으로써 어요곡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걸요.”
기운화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임호청의 시선이 살짝 옮겨져 기운화의 얼굴을 빠르게 스쳐나갔다. 임창란은 매우 흐뭇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이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어요곡에 온갖 기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모을 수있었던 것은 고조(高祖) 황제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어요 일족이 서남쪽으로 떨어진 이 곳에서 삶을 보낼 수 있도록허락해 주셨다. 지금 순덕공주님께서 사나운 요괴 한 마리를 보내오셨는데, 우리 어요곡의 도움을 받아 이 요괴를 길들이시고자 한다. 이는 황은(皇恩)이요, 임무가 막중하니 실수해서는 아니되느니라.”
기운화와 임호청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다. 기운화는 비록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그 교인을 길들이는 이 일은아무래도 그녀가 피한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노부(老夫:노인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가 여러 번 생각을 해봤는데 이런 요물은 오직 너희 두 사람에게 맡겨야 내가 안심이 될거 같구나.” 임창란이 기침을 두어번 더 하더니 말을 이었다.
“마침 노부가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것을잘 알고 있느니라.”
“곡주님, 홍복(洪福:큰 복)을 누리소서.”
“아버님, 천수를 누리소서.”
기운화와 임호청은 거의 동시에 이 말을 하고 땅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공수하며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임창란은 웃으며 손사래를쳤다.
“이 몸은 말이지, 노부가 제일 잘 알구 말구. 또 이제 미래의 곡주자리를 정해야 할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지.”
이 말이 나오자, 여풍당 전체에 침묵만이 흘렀다.
“너희들은 다 내 자식들이다. 모두 매우 뛰어나지. 노부는 진정 누구를 택해야 할지 어렵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이번 기회로, 너희둘은 한번 실력을 겨뤄 보거라.”
임창란이 품 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는데, 그 종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은은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순덕공주님께서 그제 서신을 보내오셨다. 공주님께서는 노부에게 이 요괴를 길들이라고 명하셨지. 순덕공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 가지니라. 첫째는 이 요괴가 입으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요괴의 꼬리가 변해 사람의 다리가 되는 것이고 셋째는 그 마음이 영원히 역심을 품지 말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너희 둘 중에 누구든지 먼저 해 내기만 한다면, 그가 다음 곡주자리를 맡거라.”
“소자, 명을 받듭니다.”
임호청이 포권(抱拳: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부여잡고 가슴 앞에 모아 남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인사법)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기운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임창란이 눈을 돌려 기운화를 응시하며,
“운화는?”
기운화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임창란의 온화한 눈빛에 감추어진 살기를 느끼고는 가슴이 서늘해져 그저 모든 감정을 참아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운화가 명을 받듭니다.”
여풍당을 떠난 기운화는 임호청과 헤어질 때가 될 때까지 멍하니걸었다. 임호청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서야 기운화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임호청을 바라봤다.
“운화.”
임호청은 예의바르지만 약간은 거리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 얼마동안, 아낌없는 가르침 기대할게.”
기운화도 예를 올리며 말했다.
“ 오라버니, 제게 이리 예의를 차리시다니요.”
그렇게 인사치레 말을 나누고 나자 두 사람은 할 말이 없어졌다.
여풍당 밖의 화곡(花谷)에는 일년 사시사철 온갖 꽃들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게 피어나는데 봄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면 꽃잎과 꽃향기가 계곡을 끊임없이 에워싸 사람들을 무척 즐겁게 했다.
기운화는 임호청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마침내 입을 떼려는 찰나에 오히려 임호청은 몸을 돌리더니 그녀의 눈빛을 피해 차갑게 몸을 돌아서 떠나갔다.
기운화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오라버니라 부른 것은 한때는 정말 그녀가 그를 오라버니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기운화가 고개를 돌리니 봄날의 따스한 햇살 아래, 계곡에 있던 가지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이 순간, 기운화는 머릿속의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아름답게 핀 꽃들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직은 세상 물정을모르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게다가 그녀보다 몇 살 많은 임호청은 멀찍이 서서 조용하게 그녀를 바라보는데, 눈빛은 부드럽고 웃음 띤 얼굴은 수줍은 듯 했다. 그녀는 늘 아무렇게나 꽃을 한 움큼 꺽어 그에게 가져다주고 묻곤했다.
“호청 오라버니, 꽃 예뻐요 안 예뻐요?”
임호청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담더니 그녀의 머리에 있던 풀과 엉킨 나뭇가지를 쓸어내린 후, 귓가에 꽃 한 송이를 달아 주고웃으며 말했다.
“꽃은 동생 머리에 꽂으니 제일 예쁘네.”
그런데 기억 속에 따스하게 웃던 오라버니는 지금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뒷모습만을 남기고 돌아갈 뿐이었다.
기운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 사이가 이렇게 된 까닭을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임호청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 탓해야 한다면, 그저 그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기운화가 서운원(棲云院)에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방안에 앉아 등을 키고 콩알만한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하나, 둘, 그녀가 다섯까지 세었을 때, 공중에서 갑자기한 가닥 요기가 번쩍 하더니 백의홍상(白衣红裳)을 입은 흑발의여인이 방안에 불쑥 나타났다.
기운화는 촛불의 심지를 돋우며 그 여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묻기만 했다.
“말해봐. 임창란이 이번에 직접 나한테 임호청과 맞붙어 싸우라고했어. 곡주는 내가 어느 정도로 해 주길 원하지?”
여인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네가 전력을 다해 일에 임하시길 원하셔..”
기운화가 한번 웃더니,
“전력을 다하라고? 내가 진짜로 그 교인을 길들인다면 임창란이정말로 내게 곡주 자리를 내어 줄까?”
“곡주님은 곡주님 스스로 마땅히 계획하신 바가 있으시다. 넌 묻지 않아도 돼.”
여인은 이 말에 대한 답만 하더니 손을 들어 환약 하나를 기운화앞으로 던졌다.
“넌 하나만 알면 된다. 만약 그분이 너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것을 아시게 된다면, 한달 후에 넌 해약을 손에 넣지 못할 뿐이야.”
기운화가 환약을 받고 곁눈질로 백의홍상 여인이 올 때처럼 귀신같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기운화는 손가락으로 환약을 문지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임호청을 포함한 어요곡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임찬란이 기운화를 아주 총애한다고 여겼다. 노곡주 그녀를 호법으로 봉했고 그녀를 대하는 것과 임호청을 대하는 것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은연 중에 기운화로 임호청을 대신하려는 뜻까지 보였다.
그러나 오직 기운화만이 안다.
다 계산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그 늙은 영감탱이가 남쪽 어요곡 곡주 자리를 일개 ‘외인’에게 내준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설사 그녀가 그의 양녀일지라도 말이다.게다가 임창란은 그녀를 양녀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늙은이 손에 있는 바둑알 하나일 뿐. 그를 도와 온갖 음험하고 떳떳하지 못한 일은 죄다 저질렀다.
기운화는 이번 달 해약을 먹었다. 쓰고 떫은 맛이 입안에 퍼졌다. 씁슬한 맛은 그녀의 정신을 맑아지게 했고 그녀의 앞에 놓여진 어려움을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늙은 영감탱이가 곡주 자리를 자기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정정당당하게 시합을 벌여 놓더니 그녀보고 전력을 다해 임하란다. 그녀가 만약에 진다면 설사 임호청이 바로 자리를 이어 받는다 해도 그녀는 틀림없이 어요곡에서 버려질 것이다. 구효성과 요 몇 년간 그녀를 지지해 준사람들까지도. 그 어느 하나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만약에 이긴다? 더 큰일이다. 이 늙은 영감탱이가 뒤에서 무슨 수을 꾸며서 그녀를 혼내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 수가 없다 할 지라도 그녀가 달마다 꼭 먹어야 하는 해약만 끊어도 충분히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기운화는 옷깃을 잡아당겼다. 약을 방금 먹은 몸은 원래 열이 좀 올라 입 안이 마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지금 처한 자신의 상황를 생각하자니 그녀는 더욱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방안에 있기 답답해진 기운화는 방을 나와버렸다. 아직은 봄밤이 품고 있는 차가움을 찾아 어요곡을 정처없이 거닐었다. 곰곰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교인이 갇혀져 있는 감옥 밖까지 걸어갔다.
사실 우연은 아니었다. 교인을 가둔 이 지하 감옥은 기관이 매우 많은데, 이런 곳은 어요곡 전체에서도 여기 하나뿐이다. 예전에 이곳은 능력이 강한 요괴들만이 갇힐 수 있었는데 그 수가 매우 적었고 평소에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기운화는 심란할 때면 늘 이 주변을 거닐곤 했고 어떤 때는 심지어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모처럼 그녀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밤은 교인이 이 안에 갇혀 있어서 감옥 밖에도 적지 않은 간수들이 있었다. 기운화가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호법님”이라 불렀다. 기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물었다.
“그 요괴는 착실히 잘 있나?”
호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에 소곡주가 교인을 손을 한번 봐서 그런지 밤엔 소란을 필 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운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가 가보지.”
기운화가 들어가고자 한다면 호위는 당연히 막을 수 없다. 기운화는 굳이 애써 발소리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은 채 지하 감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런 힘을 가진 요괴라면 그녀가 어떻게든 자신의흔적을 감추더라도 들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 감옥에 내려가니 감방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거대한 철창에는 부적이 잔뜩 붙여져 있었고 대낮의 피비린내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지하 감옥 꼭대기에서부터 떨어지는 달빛은 감옥 안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고, 거대한 꼬리를 가진 그 교인은 홀로 감옥에 매달려있었다.
긴 꼬리는 아래로 늘어뜨려져 땅에 닿았고 비늘은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예전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기운화는 천천히 걸어 들어가다 머리와 허리까지 늘어뜨린 은빛긴 머리카락이 교인의 얼굴을 반쯤 가린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기운화는 이 교인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어요곡 대전(大殿)의 이름은 여풍당(厲風堂)이다.
기운화가 대전 입구에 들어서 노곡주 곁에서 눈을 내리뜨고 조용히 서 있는 임호청을 보자 오늘따라 일진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곡주님”
기운화가 곡주에게 예를 올렸다.
노곡주 임창란은 이미 고희로 얼굴에 온통 주름이 가득 졌지만, 주름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오히려 매의 눈처럼 여전히 날카로워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쿨럭쿨럭, 운화가 왔구나.”
임창란은 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손짓을 해 기운화를 앞으로 오게했다.
“운화는 근래 들어 무엇 하느라 바빴느냐?”
기운화는 예의 바르게 앞으로 나아가 임창란 오른 편에 서서 몸을숙여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는 몇몇 작은 요괴를 길들여 다시 돌려보냈고, 요 며칠은 제 밑에 있는 어요사들에게 요괴를 다루는 기술을 가르치느라바빴습니다.”
임창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착하구나, 우리 어요곡을 위해 이리 열심이다니.”
늙어서 마른 장작 마냥 거칠고 메말라진 손을 내밀어 기운화의손을 잡고 두들이며,
“수고했느니라”
“아랫 사람으로써 어요곡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걸요.”
기운화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임호청의 시선이 살짝 옮겨져 기운화의 얼굴을 빠르게 스쳐나갔다. 임창란은 매우 흐뭇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이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어요곡에 온갖 기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모을 수있었던 것은 고조(高祖) 황제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어요 일족이 서남쪽으로 떨어진 이 곳에서 삶을 보낼 수 있도록허락해 주셨다. 지금 순덕공주님께서 사나운 요괴 한 마리를 보내오셨는데, 우리 어요곡의 도움을 받아 이 요괴를 길들이시고자 한다. 이는 황은(皇恩)이요, 임무가 막중하니 실수해서는 아니되느니라.”
기운화와 임호청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다. 기운화는 비록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그 교인을 길들이는 이 일은아무래도 그녀가 피한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노부(老夫:노인이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가 여러 번 생각을 해봤는데 이런 요물은 오직 너희 두 사람에게 맡겨야 내가 안심이 될거 같구나.” 임창란이 기침을 두어번 더 하더니 말을 이었다.
“마침 노부가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것을잘 알고 있느니라.”
“곡주님, 홍복(洪福:큰 복)을 누리소서.”
“아버님, 천수를 누리소서.”
기운화와 임호청은 거의 동시에 이 말을 하고 땅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공수하며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임창란은 웃으며 손사래를쳤다.
“이 몸은 말이지, 노부가 제일 잘 알구 말구. 또 이제 미래의 곡주자리를 정해야 할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지.”
이 말이 나오자, 여풍당 전체에 침묵만이 흘렀다.
“너희들은 다 내 자식들이다. 모두 매우 뛰어나지. 노부는 진정 누구를 택해야 할지 어렵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이번 기회로, 너희둘은 한번 실력을 겨뤄 보거라.”
임창란이 품 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는데, 그 종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은은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순덕공주님께서 그제 서신을 보내오셨다. 공주님께서는 노부에게 이 요괴를 길들이라고 명하셨지. 순덕공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 가지니라. 첫째는 이 요괴가 입으로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요괴의 꼬리가 변해 사람의 다리가 되는 것이고 셋째는 그 마음이 영원히 역심을 품지 말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너희 둘 중에 누구든지 먼저 해 내기만 한다면, 그가 다음 곡주자리를 맡거라.”
“소자, 명을 받듭니다.”
임호청이 포권(抱拳: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부여잡고 가슴 앞에 모아 남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인사법)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기운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임창란이 눈을 돌려 기운화를 응시하며,
“운화는?”
기운화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임창란의 온화한 눈빛에 감추어진 살기를 느끼고는 가슴이 서늘해져 그저 모든 감정을 참아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운화가 명을 받듭니다.”
여풍당을 떠난 기운화는 임호청과 헤어질 때가 될 때까지 멍하니걸었다. 임호청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서야 기운화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임호청을 바라봤다.
“운화.”
임호청은 예의바르지만 약간은 거리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 얼마동안, 아낌없는 가르침 기대할게.”
기운화도 예를 올리며 말했다.
“ 오라버니, 제게 이리 예의를 차리시다니요.”
그렇게 인사치레 말을 나누고 나자 두 사람은 할 말이 없어졌다.
여풍당 밖의 화곡(花谷)에는 일년 사시사철 온갖 꽃들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게 피어나는데 봄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면 꽃잎과 꽃향기가 계곡을 끊임없이 에워싸 사람들을 무척 즐겁게 했다.
기운화는 임호청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마침내 입을 떼려는 찰나에 오히려 임호청은 몸을 돌리더니 그녀의 눈빛을 피해 차갑게 몸을 돌아서 떠나갔다.
기운화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를 오라버니라 부른 것은 한때는 정말 그녀가 그를 오라버니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기운화가 고개를 돌리니 봄날의 따스한 햇살 아래, 계곡에 있던 가지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이 순간, 기운화는 머릿속의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아름답게 핀 꽃들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직은 세상 물정을모르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게다가 그녀보다 몇 살 많은 임호청은 멀찍이 서서 조용하게 그녀를 바라보는데, 눈빛은 부드럽고 웃음 띤 얼굴은 수줍은 듯 했다. 그녀는 늘 아무렇게나 꽃을 한 움큼 꺽어 그에게 가져다주고 묻곤했다.
“호청 오라버니, 꽃 예뻐요 안 예뻐요?”
임호청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담더니 그녀의 머리에 있던 풀과 엉킨 나뭇가지를 쓸어내린 후, 귓가에 꽃 한 송이를 달아 주고웃으며 말했다.
“꽃은 동생 머리에 꽂으니 제일 예쁘네.”
그런데 기억 속에 따스하게 웃던 오라버니는 지금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뒷모습만을 남기고 돌아갈 뿐이었다.
기운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 사이가 이렇게 된 까닭을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임호청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 탓해야 한다면, 그저 그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기운화가 서운원(棲云院)에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방안에 앉아 등을 키고 콩알만한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하나, 둘, 그녀가 다섯까지 세었을 때, 공중에서 갑자기한 가닥 요기가 번쩍 하더니 백의홍상(白衣红裳)을 입은 흑발의여인이 방안에 불쑥 나타났다.
기운화는 촛불의 심지를 돋우며 그 여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묻기만 했다.
“말해봐. 임창란이 이번에 직접 나한테 임호청과 맞붙어 싸우라고했어. 곡주는 내가 어느 정도로 해 주길 원하지?”
여인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네가 전력을 다해 일에 임하시길 원하셔..”
기운화가 한번 웃더니,
“전력을 다하라고? 내가 진짜로 그 교인을 길들인다면 임창란이정말로 내게 곡주 자리를 내어 줄까?”
“곡주님은 곡주님 스스로 마땅히 계획하신 바가 있으시다. 넌 묻지 않아도 돼.”
여인은 이 말에 대한 답만 하더니 손을 들어 환약 하나를 기운화앞으로 던졌다.
“넌 하나만 알면 된다. 만약 그분이 너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것을 아시게 된다면, 한달 후에 넌 해약을 손에 넣지 못할 뿐이야.”
기운화가 환약을 받고 곁눈질로 백의홍상 여인이 올 때처럼 귀신같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기운화는 손가락으로 환약을 문지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임호청을 포함한 어요곡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임찬란이 기운화를 아주 총애한다고 여겼다. 노곡주 그녀를 호법으로 봉했고 그녀를 대하는 것과 임호청을 대하는 것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은연 중에 기운화로 임호청을 대신하려는 뜻까지 보였다.
그러나 오직 기운화만이 안다.
다 계산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그 늙은 영감탱이가 남쪽 어요곡 곡주 자리를 일개 ‘외인’에게 내준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설사 그녀가 그의 양녀일지라도 말이다.게다가 임창란은 그녀를 양녀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늙은이 손에 있는 바둑알 하나일 뿐. 그를 도와 온갖 음험하고 떳떳하지 못한 일은 죄다 저질렀다.
기운화는 이번 달 해약을 먹었다. 쓰고 떫은 맛이 입안에 퍼졌다. 씁슬한 맛은 그녀의 정신을 맑아지게 했고 그녀의 앞에 놓여진 어려움을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늙은 영감탱이가 곡주 자리를 자기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정정당당하게 시합을 벌여 놓더니 그녀보고 전력을 다해 임하란다. 그녀가 만약에 진다면 설사 임호청이 바로 자리를 이어 받는다 해도 그녀는 틀림없이 어요곡에서 버려질 것이다. 구효성과 요 몇 년간 그녀를 지지해 준사람들까지도. 그 어느 하나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만약에 이긴다? 더 큰일이다. 이 늙은 영감탱이가 뒤에서 무슨 수을 꾸며서 그녀를 혼내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 수가 없다 할 지라도 그녀가 달마다 꼭 먹어야 하는 해약만 끊어도 충분히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기운화는 옷깃을 잡아당겼다. 약을 방금 먹은 몸은 원래 열이 좀 올라 입 안이 마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지금 처한 자신의 상황를 생각하자니 그녀는 더욱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방안에 있기 답답해진 기운화는 방을 나와버렸다. 아직은 봄밤이 품고 있는 차가움을 찾아 어요곡을 정처없이 거닐었다. 곰곰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교인이 갇혀져 있는 감옥 밖까지 걸어갔다.
사실 우연은 아니었다. 교인을 가둔 이 지하 감옥은 기관이 매우 많은데, 이런 곳은 어요곡 전체에서도 여기 하나뿐이다. 예전에 이곳은 능력이 강한 요괴들만이 갇힐 수 있었는데 그 수가 매우 적었고 평소에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기운화는 심란할 때면 늘 이 주변을 거닐곤 했고 어떤 때는 심지어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모처럼 그녀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밤은 교인이 이 안에 갇혀 있어서 감옥 밖에도 적지 않은 간수들이 있었다. 기운화가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호법님”이라 불렀다. 기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물었다.
“그 요괴는 착실히 잘 있나?”
호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에 소곡주가 교인을 손을 한번 봐서 그런지 밤엔 소란을 필 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운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가 가보지.”
기운화가 들어가고자 한다면 호위는 당연히 막을 수 없다. 기운화는 굳이 애써 발소리를 감추려고 하지도 않은 채 지하 감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런 힘을 가진 요괴라면 그녀가 어떻게든 자신의흔적을 감추더라도 들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 감옥에 내려가니 감방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거대한 철창에는 부적이 잔뜩 붙여져 있었고 대낮의 피비린내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지하 감옥 꼭대기에서부터 떨어지는 달빛은 감옥 안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고, 거대한 꼬리를 가진 그 교인은 홀로 감옥에 매달려있었다.
긴 꼬리는 아래로 늘어뜨려져 땅에 닿았고 비늘은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예전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기운화는 천천히 걸어 들어가다 머리와 허리까지 늘어뜨린 은빛긴 머리카락이 교인의 얼굴을 반쯤 가린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기운화는 이 교인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리가똣 아리가똣
진짜 빌런은 곡주인데 소곡주 얘 섭남인가 ㅡㅡ;
좆팔 곡주 빌런냄새 오지게나네 저새끼가 다 망칠듯요
우흥~ 왜 안붙여
귀찮아졌…지금 제목도 긴거 같어 ㅡㅡ;; 어교기로 바꿔야 하나 싶다
고마웡 오늘도 잘볼게
재밌어 ㅎ 저러다 어떻게 장의가 기운화바라기가 되는거지
껌딱지마냥 따라다니면서 눈물을 펑펑흘려가지구 진주를 만든다던데 엌ㅋㅋㅋㅋㅋㅋ
12시 안에 4장 올리겠음 ㅋㅋㅋ 4장 제목은 처지가 비슷하다임 ㅋㅋ
온냐 거기 12시면 여기1시? 쿨쿨 자고 낼 아침에 볼게ㅜ 아리가똣
상어완댜님 성깔있어 보였는데 운화 앞에서 얼마나 귀여우려나ㅋㅋ
ㄹㅇ 순진무구캐라던데 ㅋㅋㅋㅋ 어케 글케됨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