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장 꼭두각시
교인이 갑자기 공격을 하자 어요사들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막아낼 수 없었다. 다들 앞서 난조와 싸우던 중에 원체 부상을 입기도 해서 지금은 공격을 당해낼 힘이 없었다. 어요사들이 당황하여 사방팔방으로 도망가자 기운화는 속으로 만약 죽기살기로 살길을 뚫으려 한다면 아마 7할의 가능성이 정말로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운화가 검을 꽉 쥐었는데, 이 때 사람들 뒤로 갑자기 한 줄기 흰 빛이 들이닥쳤다. 기운화가 오는 이를 보고 두 눈이 약간 휘둥그레졌다. 곡주의 요복(妖僕) 경서(卿舒)는 앞서 청우 난조와 싸우면서 부상을 입은 듯 이마에는 혈흔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상처는 그녀의 짙은 살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기운화는 갑자기 심장이 조마조마해져왔다. 그녀는 장의가 경서와 싸우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서가 결국 왔다면 임창란도 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운화의 눈빛이 저도 모르게 여풍당 정전(正殿)쪽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임창란의 신영이 보였다. 기운화가 제대로 보기도 전에 눈앞이 하얗게 번득이더니 바늘로 찌르는 듯한 커다란 아픔이 이마 사이로 전해졌다. 순간 그녀는 두개골 전체가 마치 사방팔방으로 갈갈이 찢겨져나가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고통으로 인해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사라진 기운화는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손에 든 장검을 땅에 떨어뜨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돌정도로 눈앞이 아찔해서 그녀는 그저 하늘에서 고드름과 장검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낭랑한 소리만 들려왔다.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녀의 모든 감각은 완전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기운화는 자신이 컴컴한 어둠 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앞으로 걸어 나갔는지 가늠이 안 됐다 만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인 듯하기도 하고 마치 바람이 휙 스쳐지나가는 듯한 찰나의 시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다시 사지의 존재를 느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손끝에 침을 하나 놓고 있었다. 오감이 순식간에 모두 살아났다. 기운화는 눈을 떴지만 몸은 아직 기운이 없어서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은 이미 사방을 샅샅이 훓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왔다.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그지없는 방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곳은 그녀가 어요곡에서 머무는 곳이었다. 바로 그녀의 처소이자 그녀의 감옥으로 말이다. 비록 이 방은 전에 큰 난리로 좀 못 쓰게 되었지만 이 보이지 않는 감옥의 난간은 여전히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이 때, 기운화 방에 누군가 한 명이 더 있었다. 여우 요괴 경서가 조용히 기운화의 침대 옆에 앉아 은침으로 모든 손가락 끝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은침이 닿는 곳마다 기운화의 이미 죽은 것 같은 손가락이 하나 하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운화는 앉으려고 했지만 힘을 한번 쓰자 이마 사이로 다시 극심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온몸으로 전해져 기운화의 뼈 마디 마디가 모두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리었다.
“은혼침(隱魂針)이 아직 다 풀린 것이 아니다. 함부로 움직이면 결과가 어찌될지 네가 잘 알 것이다.”
경서가 냉담하게 말을 했다. 은혼침은 임창란의 수법으로 침 하나로 사람의 영혼을 고정시켜 마치 시신처럼 사람의 오감을 상실하게 한다. 경서는 은침을 하나 하나 기운화의 혈자리에 놓으면서 말했다.
“곡주께서는 아직 네가 죽지 않길 바라신다.”
기운화는 이 말을 듣고 그저 냉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이 어요곡에서 죄수에게 자유란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지.기운화는 기를 쓰고 입을 열었다.
“교인은?”
그저 입을 열어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기운화는 가지고 있던 온 몸의 힘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경서가 힐끔 기운화를 쳐보더니 말했다.
“다시 갇혔다.”
교인이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 할지라도 역시 몸에 부상을 입었기에 이 늙은 여우를 당해낼 수가 없었구나.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비록 그녀와 장의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교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한 사람을 친구로 삼았다면 틀림없이 친구를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정신이 혼미했던 그녀는 아마도 장의가 도망치고자 했을 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기운화는 눈을 감았다.그리고 나서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네가 주인님 방에서 훔쳐낸 약, 내가 꺼내놨다.”
경서가 냉담하게 계속 말했다. 기운화가 그 말을 듣고 놀랐지만 이내 진정했다. 그녀가 십방진에서 벗어나고 여풍당 뒷뜰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기운화가 십방진에 빠지기 전에 한 행적을 임창란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신들 뭘 하려고 하는 거지?”
기운화가 숨지도 피하지 않고 경서를 바라봤다. 기운화의 이런 행동은 최악의 결과를 감당할 각오가 됐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든 죽음이든, 고통이든 고난이든지 간에 기운화는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경서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차갑게 비웃었다.
“상한(傷寒: 중의학에서 차가운 기운으로 인해 열이 나는 병의 총칭)을 방지하고 온보(溫補: 성질이 더운 약을 가지고 허증(虛症)과 한증(寒症)을 치료하는 방법)할 수 있는 환약이다. 원하면 가져가도 된다. 곡주께서는 관대하시니 이걸로 너에게 죄를 결코 묻지는 않을 것이다.”
경서는 손에서 침을 뽑아내고 기운화의 멍한 얼굴을 보더니 경멸하는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꺼내서 네 책상 위에 놓았다.”
온보 환약이라니…… 임창란은 진작 기운화가 자신의 속내를 숨긴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줄곧 집안에 이런 물건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언제고 그녀를 치욕스럽게 짓밟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녀의 자유와 자존심을 짓밟으며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관대하고 너그럽기에 결코 이로 인해 네게 죄를 묻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그것도 윗사람의 모양으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보아라, 아무런 힘도 없는 벌레처럼 가련한 너를. 무모하게 일을 결국 벌이더니, 주제를 모르고 덤벼들었구나라고.
기운화가 손끝을 움츠려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경서는 기운화의 표정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고 대충 그녀의 이마에서 침을 뽑아 내자 기운화는 몸이 순간 가벼워지더니 다시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이렇다. 침 하나로 기운화의 혼을 고정시켜 온몸을 꼼짝달싹 못 하게 할 수 있고 손만 뻗어도 이 침을 뽑을 수도 있었다.그들은 언제나 기운화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들이 그녀에게 살라 하면 살고 죽으라 하면 죽는 그들 손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녀를 조종하는 것은 이처럼 쉽고 쉬운 일이었다.  
“기운화, 네가 마음속으로 뭘 생각하든 주인님은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만 생각하는것으로 그쳐야 한다. 네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도 단지 머릿속에서만 생각만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고. 하지만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은 주인님이 네게 하라고 할 때만 할 수 있다.”
기운화가 차갑게 웃었다.
“이번에는 네가 거리낌없이 계곡에 있던 어요사들에게 손을 쓰려고 해서 주인님이 너를 제지하셨다.”
경서가 손으로 들고 있던 침을 흔들더니 몸에 있던 침 주머니에 넣었다.
“주인님께서 너의 호법 자리도 지켜주셨으니 너는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크나큰 은혜에 감사하거라.”
마치 방 전체에 보이지 않는 실이 있어 기운화의 관절 하나 하나를 묶은 후 다시 그녀를 조종하는 듯했다. 기운화는 차마 이런 자신을 볼 수가 없어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기운화는 십방진을 벗어나게 되면 자유로워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십방진에서 그녀는 짧디 짧은 자유를 겨우 누렸다.
“경서대인.”
문밖에서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경서가 침 주머니를 챙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들어오너라.”
문밖에서 어요사가 문을 밀고 들어와 경서에게 다가왔다. 어요사는 경서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몇 마디 말하자 경서의 눈빛이 순간 빛나더니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 있는 기운화를 바라보았다.
“기운화, 주인님께서 너보고 즉시 여풍당으로 오라고 하신다.”
기운화가 몸을 돌려 경서와 어요사를 등지고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소인 몸에 부상을 입어 명을 따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어쨌든 임창란 이 늙은 영감탱이는 그녀가 살기를 원하고 당분간 그녀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호법 자리도 지켜주려 한다. 이때 그녀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면 언제 허세를 부리겠는가? 앞서 저들에게 속셈도 간파당하고 비웃음도 당할 대로 당했는데 지금 눕는 것도 제대로 못 눕는단 말인가?경서가 말했다.
“교인이 입을 열어 말했다.”
기운화가 눈을 번쩍 떴다. 경서가 이어 말했다.
“그가 묻길 당신들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냐고 하더군.”
의심할 것도 없이 교인이 말하는 ‘그녀’란 바로 기운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운화는 이때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마치 온몸이 못투성이 위를 구르는 것마냥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