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천의 상황 때문에 촬영 일정이 꼬여버렸다. 콘티 수정이 불가피해 작가와 통화를 한다는 것이 새벽까지 끝나지 않았고, 눈을 떠보니-
“아 늦었네.”
조연출의 문자와 전화가 꽤 쌓였다. 차라리 빠듯하게 남기고 일어났다면 늦지 않게 부산을 떨 텐데 아주 늦어버리니 맥부터 풀렸다.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한숨을 푹푹 내쉬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 몸은 물 먹은 솜 같았다. 욕실까지 가면서 바닥에 있는 양말과 수건은 왼쪽, 맥주캔과 휴지는 오른쪽으로 발로 밀어둔다.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 조연출에게서 전화가 두 통, 메시지가 한 통 더 와 있었다. 감독님제발연락좀하세요저죽겠어요! 라는 문자의 답에 그럼 죽든가. 라고 보낸 후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 말릴 시간까진 모자라지 싶다.
호가는 그대로 열쇠와 콘티, 핸드폰만 챙겨 나갔다. 일 분 후 그의 방문이 다시 열린다. 다급한 걸음으로 뛰어들어온 그가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약, 약이...”
구석까지 밀려들어가 있던 약봉투를 손을 뻗어 끄집어냈다. 봉지를 연 그의 얼굴에 낭패가 스친다. 호르몬 보조제는 있었지만 억제제가 없었다. 처음에야 곽건화와 그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강박증으로 약을 먹어왔는데 촬영이 진행될수록 띄엄띄엄 챙겨먹은 건 사실이다. 애초 약을 꾸준히 챙겨먹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도 못 되었다. 새벽 촬영은 다반사고, 들어가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신발만 벗은 채 잠에 빠진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소홀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일은 이제 기억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너무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서……는 핑계였고 자주 먹어봤자 내성만 생길 뿐 강박적으로 굴 필요 없다는 의사의 조언을 편할 대로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늦잠을 잔 게 혹시 주기가 다가와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약 먹은 기억이 희미해 오늘은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와 보니 약이 없었다. 처방받으려면 상해로 가야한다. 일반적으로 약국에서 사용하는 억제제를 먹어도 될 것인가. ‘내성 생긴다던데, 들어 먹힐까?’
호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을 한다. 조연출이다. 그는 인상을 쓰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알았어, 가고 있어.”
대꾸도 듣지 않은 채 종료하곤 방을 나섰다. 일단 지금의 고민은 다음 순위였다.
납 주머니를 들고 가다 말고 퍼스트가 호가를 바라본다. 스크립트를 점검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등 촬영장에선 사적인 전화도 잘 받지 않은 감독이 멍하게 앉아 수면만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감독님, 컨디션 안 좋으세요?”
호가는 미간을 쓸어 올리며 마른세수를 한다. 새삼 좋을 것도 없지. 내내 앉아있더니 온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그는 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중 촬영팀은 수중용 카메라를 들고 수영장 물 위의 조명에 대해 이야기 중이다. 대기 중인 배우들을 둘러보다, 제 얼굴을 살피는 퍼스트의 시선에 그는 혀를 찼다.
“그거 들고 평생 있을래?”
멋쩍은 얼굴로 퍼스트는 종종걸음으로 간요 역 여배우에게 갔다.
간요가 수영장에 빠지고, 그것을 보 교수가 구해내는 장면이었다. 스테프가 간요의 발목에 납 주머니를 두개씩 달곤 묻는다. 하나 더 달까요? 옆에 있던 매니저가 고개를 저었다. 가벼워서 그 정도만으로 충분할거 같아요.
“각도를 좀 다양하게 하고 싶은데. 일단 간요 풀로 하나 가고, 그다음에 미디엄, 클로즈업, 얼굴 순으로.”
“보 교수는?”
“둘이 일단 핸드 클로즈업 하나씩 가고. 투샷 그다음에 풀로.”
촬영감독이 산소통을 들춰메곤 웃는다. 일단 내가 여러 가지로 찍어 볼게. 개 중에서 적당히 골라 써먹어. 호가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감독님이 고생이 많아요.
그리고 돌린 시선에 문득 곽건화가 걸린다. 피할 일이 아니었기에 피하려고 한 적도 없었건만 희한하게 오늘이 처음 얼굴을 본 것이다. 조연출에게 촬영 각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옆모습이 신중하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곽건화가 고개를 돌린다. 호가는 굳이 눈을 돌리진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거둔 건 곽건화 쪽이 먼저였다.
호가는 한숨을 내쉬곤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늦게 시작한 촬영에 치여 잊고 있었는데 억제제를 먹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요인인지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굴러다니는 생수를 집어 들이키곤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쟤가 수영을 할 줄 알았던가?’
간요의 손 끝에 보 교수의 손이 닿는다. 호가는 모니터를 보다 조연출에게 사인을 넣었다. 컷! 이제 풀 샷으로 갑니다.
“와 이틀 쉰다!”
스크립터가 들고 있던 대본을 날리며 소리를 지른다. 듣자하니 상해에 두 살짜리 딸래미를 떼놓고 왔다 했던가. 촬영장을 정리하는 손들이 들뜨고 재빠르다. 왁자하게 떠드는 말 속에서 이번에 빌린 수영장에 화제에 오른다.
“그냥도 아니고 호텔에 딸린 수영장이잖아, 되게 비쌌겠는데.”
“비수기라 망정이지 보통 때는 어림없지.”
조명선을 짊어지던 스텝 하나가 지나가다 픽 웃는다.
“호텔 매니저가 곽건화 팬이라서 아주 원활한 협조가 이뤄졌다는 소리도 있던데.”
“뻥이라도 그럴듯하긴 하다.”
“근데 진짜 아깝다. 촬영도 두 시간이나 빨리 끝났는데. 놀다 가면 안 되요?”
“젖어서 덜덜 떨며 버스 타도 좋다면야.”
수영장 끝에 쭈그리고 앉은 채, 호가는 수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좀 전부터 가라앉은 몸 상태를 갈무리하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왜 속까지 미슥거리는 거 같지?’ 새삼 의사가 말한 부작용이란 단어를 상기한다. 그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이틀간 휴차라 천만다- 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미끄러운 타일 위에 그의 발이 헛돌았다. 타일바닥에 머리를 찧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물에 빠졌을 뿐이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감독님!!!!!”
거대하고 출렁이는 입 속으로 한꺼번에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눈도 못 뜬 채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호가는 속으로 외쳤다. 나, 나 수영 못해!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 막히고, 귀는 먹먹하고, 숨통은 죄여오는데 도저히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 발목을 아래로 계속 끄집어 당겼다. 머리가 어지럽고, 손을 위로 뻗어야 하는데 수압에 짓눌려 쉽지가 않았다.
억센 힘이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낚아채 위로 들어올렸다. 누군가의 손길에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인 건 난생 처음일 것이다.
“감독님!”
“감독님 괜찮으세요?!”
수면 위로 머리를 들어 올렸을 때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잠깐, 어디, 여기, 생각은 단어 단위로 파편화되었고 상황판단이 불가능했다. 지푸라기라도 없으면 허공이라도 잡겠다는 듯 수면 위에서 첨벙거리는 호가의 손을 곽건화가 잡아채곤 침착하게 이끈다.
수영장 끄트머리에 매달린 조연출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죽죽 뺄 거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손에 호가를 인계하려다, 곽건화는 생각을 고치곤 제 손을 내민다. 그의 팔에 잡힌 호가는 정신을 통 차리질 못했다. 바닥 위로 끌어올리자 바로 엎드려 물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저에게 건네진 수건을 그의 몸에 씌우며 곽건화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건 사적으로 닿은 거 맞아.”
물이 가득 찬 귓속에서 다 쉰 목소리가 물결을 일으킨다. 물속이 아닌 단단한 땅에 온 몸을 기대고 있음에도, 호가는 여전히 억센 팔을 붙든 채 쿨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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